018. 가짜 진단서 (3)2021.12.18.
현금다발이 들키자 이해성 원장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강준이 다가섰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건…… 내 돈입니다…….” 딱 봐도 거짓말하는 게 티가 나는 말투였다. 덜덜 떨리는 입가와 불안한 눈빛. “이런 가방을 원장님께서 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년이 병원 돈을 빼돌렸어요! 난…… 그걸 다시 가지러 온 것뿐이라고요!” “무단 주거침입에…… 불법 절도행위군요!” “절도는 무슨 절도……! 이건 병원 돈이라니까!” 원장은 강준의 손에 있는 가방을 다짜고짜 뺏으려 들었다. 하지만 15년 전으로 회귀한 강준의 완력은 원장을 압도했다. “경찰 불러도 됩니까?” “뭐……?”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원장이었다. 떳떳하지 못한 구린 돈이라는 뜻이었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이진철 경위의 전화였다. “네, 경위님!” ―최혜리 위치 추적됐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나요?” ―어…… 그러니까 지금 연남시 두원동 38번지…… 그 근방이네요. “그쪽으로 오실 겁니까?” ―그래야죠! “그럼, 거기서 뵙겠습니다” 강준은 전화를 끊고는 원장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최혜리 씨 어디 있는지 찾았다네요. 핸드폰 위치 추적해서요…… 직접 만나서 이 돈이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면 되겠네요.” “아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 돈이라니까!” “그러니까요. 누구 돈인지는 최혜리 씨한테 물어보자고요!” 강준은 돈 가방을 움켜쥐고는 최은정의 차량으로 향했다. 원장은 이 돌발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망설였다. “뭐합니까? 같이 안 가실 겁니까?” “아니…… 내가 왜 따라가야 하는데…….” “그럼, 이 가방 들고 경찰서로 갈까요? 절도 신고하러요?” 절도 신고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원장은 안색이 변했다. “걱정 마요. 당장은 신고 안 할 테니…… 그러니 같이 갑시다. 왜? 최혜리 씨 만나는 게 겁나요?” 원장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최은정에게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계산을 마쳤는지 원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차량에 올라탔다. ‘멍청한 자식! 이제 넌 끝장이다…… 적어도 넌 보험사기범이니까!’ 연남시 두원동 38번지. 그 맞은편에 라성캐피탈의 사무실이 있었다. 경찰이었던 강준이 부동산 기획업자 전대성을 쫓을 당시에는 이미 라성캐피탈은 전설 속 흑역사가 되어 있을 때였다. 하지만 2005년인 지금은 실존하는 사업체였다. 전대성이 전주로 있는 대부업체…… 실상은 법의 경계에서 온갖 불법을 저지르며 사채로 돈을 굴리는 곳이었다. 강준은 생각보다 초라한 그곳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붉은 벽돌의 낡은 건물은 언제라도 재건축이 필요해 보였고, 그마저도 일층과 이층은 인력사무소로 쓰이고 있었다. “여기는 왜 온 겁니까?” “혹시 박성우라는 이름 들어봤어요?” “네? 그게 누군데요?” 강준은 다시 원장의 어깨에 손을 대고 그의 기억을 읽으려 했다. 하지만 뿌연 형상만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내 맘대로 원할 때 기억을 읽을 수가 없네…… 그게 아니면 원장이 지금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건지도…….’ “그럼 송종철 사장은 이름을 들어봤겠죠?” “……네? ……모르는 이름인데요.”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원장이었다. ‘송 사장의 이름은 어떻게든 들어본 거군……!’ “뭐 해요? 올라갑시다.” 경찰은 최혜리의 위치추적을 했지만, 구체적인 장소를 특정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통신사 기지국 근방만을 특정했을 뿐이었다. “여기 뭐가 있는데요?” “라성캐피탈! 당신이 돈 빌린 데 아닙니까?” “내가 뭐가 아쉬워서 돈을 빌려요?” “사람이란 다 본전 생각이 있는 법이거든요. 온라인 도박에 빠져서 쓴 돈을 회복하느라 돈을 빌렸던 거 아닙니까?” “아니라니까요!” 강준은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라성캐피탈에서 최혜리에게 3천만 원이 나간 건 사실이지만, 그게 대출인지는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허위 진단서를 떼주는 거에 대한 대가성 돈이었군! 그리고 그 대가성 돈을 자신이 아닌 내연녀의 명의로 받은 거고…….’ “우리랑 같이 올라갈 겁니까?” “뭐…… 여기까지 왔는데, 갑시다!” 원장은 강준의 눈치를 보면서 라성캐피탈로 올라가자고 답했다. 그는 라성캐피탈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어차피 다른 대안도 없겠지만…….’ 라성캐피탈의 사무실은 3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자 금속판으로 쓰인 명패가 붙여져 있었다. 똑! 똑! 똑! “계십니까?”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문이 반쯤 열렸고, 안에서는 머리를 빡빡 깎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요?” “최혜리 씨 여기 있죠?” 강준은 대뜸 여자의 행방을 물었다. 제대로 답해줄 리 없는 질문이었다. “그런 사람 여기 없는데, 그냥 가쇼.” “박성우 부장이 데리고 있을 텐데…….” “아! 그런 사람 없다니까 무슨 소리야!” 강준은 남자의 울대를 잡아채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커…… 커헉…… 이 새끼가…….” 남자는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고개를 뒤로 젖힌 강준의 얼굴을 맞출 수는 없었다. 최은정은 이제 그런 상황들이 익숙한 듯 놀라지도 않았다. “안에 누가 계신지 사장님도 뵐까요?” 사무실 내실에서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나왔다. 그는 의외로 안경을 낀 중키의 남자였다. 마른 장작처럼 생긴 남자는 강준과 함께 따라온 이해성 원장을 노려봤다. “뭐야…… 이거 또 시끄럽게! 얀마! 손님 왔으면 안으로 모셔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남자의 말에 사무실에 있던 서너 명의 덩치들이 강준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내실에는 강준이 예상했던 최혜리가 무척 두려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원장님!” 그녀는 원망의 눈초리로 원장을 바라봤다. 최혜리는 원장을 믿고 따른 것밖에는 없었다. 병원을 살리려는 원장의 노력, 그리고 몸을 섞은 애정. 그런 복합적인 것들이 최혜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이었다. “혜리야……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갑자기 이 사람들이 여기로 절 끌고 왔다고요!” 상황을 수습하려는 이해성 원장이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변을 위협당한 최혜리는 신경이 솟을 대로 솟아 있었다. “최혜리 씨, 이 가방 최혜리 씨 거 맞죠?” “어머! 제 가방이 왜 여기에…….” “이 가방에 현금다발이 잔뜩 들었던데…… 이걸 원장님이 갖고 나오시더라고요. 최혜리 씨 댁에서요.” 최혜리는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는 듯 매서운 눈으로 원장을 노려봤다. “뭐예요! 나한테 준 돈이잖아요!” “아니야, 혜리야…… 내가 네 돈 챙겨주려고 이렇게 갖고 온 거라니까.” “원장님 정말…… 내가 저런 인간을 믿고…… 진짜! 다 쓰러져가는 병원 살리려고…….” 강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근데, 최혜리 씨도 병원 살리려고 그런 건 아니지 않나요? 그냥 돈이 궁해서 그런 거였지…….” “누구세요?” “성원화재 박강준입니다. 허위 진단서를 써준 병원을 찾다가 해성정형외과를 찾게 된 거고요. 최혜리 씨가 잠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직접 찾아뵈러 온 겁니다!” 원장은 필사적인 표정이었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선 최혜리는 자신만이라도 살려고 입을 열었다. “전 그냥 여기에서 나오는 돈을 제 계좌로 받은 것뿐이에요. 진단서는 당연히 의사가 작성하는 거지, 간호조무사인 제가 했겠어요?” “라성캐피탈에서 받은 3천만 원의 돈은 그럼 뭡니까?” “그건…… 원장님이 받아달라고 한 것뿐이었어요…….” “아까는 본인 돈이라면서요?” “……아니에요. 제…… 돈…….”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하는 최혜리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중키의 남자가 껄껄거리고 웃었다. “병신 새끼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야! 최혜리 넌 돈 갚아 이년아!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네? 무슨 돈요?” “3천만 원! 아, 이게 그 돈인가?” 중키의 남자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강준이 들고 있는 가방에 시선을 옮겼다. “당신이 박성우입니까?” “어? 나? 내 이름은 왜?” “그러니까 박성우가 당신이냐고요!” 강준은 박성우 부장의 얼굴은 모르고 있었다. 타인의 기억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정작 자신을 죽이려 한 박성우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다. “아…… 보험회사 직원…… 박강준이 당신이군…… 난 박성우가 아닌데? 그리고 우리 라성캐피탈은 당신네 그 보험사기랑은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라고! 어디 와서 행패야!” “필리핀 송종철 사장의 계좌에서 라성캐피탈로 자금이 옮겨진 정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 계좌에서 허위 진단서를 떼주던 해성정형외과의 간호조무사에게 돈이 입금됐고요…….” 강준의 말에 중키의 남자는 태연하게 의자를 뒤로 끄떡거리며 원장을 지켜봤다. 그가 실토하지 않는 이상 보험사기와의 연관성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돈 빌린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 거 같아? 그리고 그 사람들이 여기서 돈을 빌릴 정도면 어떤 처지겠어? 보험사기가 아니라 강도질이라도 할 사람들일걸?” 지켜보고 있던 최은정이 나섰다. “그걸 알고도 돈을 빌려줬단 말이에요!” “우린 사채업자잖아……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우리도 힘들다고 돈 빌려주고 돈 못 받으면…… 그게 얼마나 좆같은지 아냐고?”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는 중키의 남자였다. “그건 법정에서 가려지겠죠…….” “크하하! 그래! 한번 그래 보자고, 우리도 뭐 변호사도 안 끼고 이 장사하는 줄 알아?” 그때 입구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경찰이라도 왔어?”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부하에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 누가 형님 보자면서 왔는데요?” “하! 참나! 내가 이렇게 바쁜 사람이라니까…… 쫄랭아, 네가 최혜리 대출 건 마무리 지어라. 직접 현금으로 들고 왔으니까 영수증 잘 써드리고.” “네 알겠습니다! 형님!”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원장을 노려봤다. 입을 열지 말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그때 강준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박성우 부장님!” 최은정이 놀란 눈으로 강준을 바라봤다. “이거 준혁 씨 목소리 아니에요?” “네, 신입사원이라 현장 경험도 시킬 겸 제가 불렀습니다.” “아……!” 덩치들에 이끌려 내실로 들어온 사람은 필리핀에서 박성우와 함께 있던 김준혁이었다.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원망의 눈초리로 박성우를 바라보는 김준혁이었다. “너 이 새끼……!” 당황하는 박성우였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부하들에게 손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덩치들은 강준과 김준혁을 에워싸았다. 그 덩치 중 한 명은 접이식 나이프를 품에서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금속이 형광등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오우! 나 피 보는 거 싫은데…….’ 강준은 쓸데없이 몸싸움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