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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김준혁 (15/250)

015. 김준혁2021.12.15.

김준혁은 원래 프로그래머를 지망하는 대학생이었다. 변변한 학벌은 아니었지만, 미래를 꿈꿀 수는 있었다. 성실함. 그것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이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김준혁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학비도 벌어야겠다는 마음에 당분간 일하려고 들어간 게임회사. 그 회사는 필리핀 마닐라 마카티 지역에 사무실이 있다고 했으며, 현지 근무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월 350만 원, 초급 개발자가 받을 수 있는 꽤 괜찮은 급여. 그리고 현지 숙소와 식사를 지원하는 복지 조건. 김준혁이 한국에서의 고시원 생활을 접는 걸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준혁은 필리핀으로 건너간 지 8개월 만에 온라인 불법 도박장 운영의 공범으로 구속됐다. “야! 면회자 접견이다.” “네? 국선 변호사님이신가요……?” “몰라, 나가봐!” 귀찮은 듯 쪽지를 건넨 교도관은 철창의 문을 열어줬다. 면회실에서 준혁을 맞이한 사람은 강준이었다. “김준혁 씨, 성원화재 박강준입니다.” “아…… 형사님 아니셨나요?” “보험조사관이었습니다. 양태식의 자해 공갈단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준혁 씨도 직접 조사하게 됐던 거고요.” “네…… 그렇군요…….” 풀이 죽어 있는 김준혁이었다. 그는 강준이 왜 자신을 면회 왔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국선 변호사가 자신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국선 변호사를 만나봤어요.” “네? 정말이요? 뭐라 그래요? 전 피해자예요. 감금당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온라인 게임을 만든 거고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이라는 게 증명이 되어야 하는 거니까요. 주범들이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김준혁 씨를 쉽게 풀어줄 수도 없을 거고요.” 강준의 말에 김준혁은 크게 실망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죠.” “저 좀 도와주세요! 전 진짜 필리핀에서 도망도 못 치고 협박당했어요! 돈도 한 푼도 못 받았고요!” “박성우 부장…… 지금 어디 있어요?” “필리핀에 있을 거예요. 얼마 전부터 한국 쪽 일은 양태식이 전담했거든요.” 강준은 팔짱을 끼고는 유리 가림막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근데 한국에는 왜 왔어요?” “그게…… 실은 도박도 홍보가 필요한 거잖아요…… 계속 도박할 사람을 사이트로 유입시켜야 하니까…….” “그래서요?” “DB 작업을 하러 온 거예요. 그걸 빌미로 저도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거고요.” 회귀하기 전 강준은 김준혁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한창 코인 사기가 유행이던 시절, 내부고발자로 김준혁은 경찰에 자수했었다. 강준의 회귀로 인해 김준혁은 10년 이상을 앞서서 경찰에 잡힌 것이었다. ‘마음이 여려서 그때까지 끌려다닌 거군…… 쯧쯧!’ “DB 작업을 했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게…… 통신사 서버를 공격해서 고객 명단을 빼내려고 했어요…… 그걸로 문자를 보내는 거죠. 그렇게 되면 분명 걸리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요.” 2005년까지만 해도 DB 유출에 대한 심각성이 많이 대두되지 않던 시기였다. “그게 아니었으면 전 아직 필리핀 콘도에 갇혀 있었을 겁니다…….” 강준은 그제야 왜 송종철 일당이 감시망을 붙여서까지 개발자인 김준혁을 한국에 내보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혹시 보험사에서 일해 볼래요?” “네? 보험사요? 보험영업을 하는 거 말인가요?” “아뇨. 보험사기를 막는 보험조사 업무요. 김준혁 씨가 잘할 수 있는 일일 겁니다.” “제가요?” 유리벽 너머로 김준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절망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을 찾는 눈치였다. “보험조사의 전산 업무를 담당하는 일이죠. 도박사이트 운영보다야 훨씬 당당하고 보람찬 일일 겁니다.” “물론이죠! 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변호사를 통해서 불구속 수사를 받을 수 있게 해드리죠.” “어! 그럼 저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가요?” “아마도요…… 김준혁 씨,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습니다.” 김준혁은 유리벽에 붙어서서 강준의 말을 기다렸다. “아마 석방되게 되면 유혹이 많을 겁니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많겠죠. 이번에는 거액의 돈도 들고 와서 꽤 괜찮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들이 많을 겁니다. 그 유혹…… 이겨내실 수 있겠어요?” 강준의 말에 김준혁은 잠시 침묵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또다시 범죄에 영혼을 파는 일이었다. “……네, 그놈들한테 당한 게 저도 지긋지긋하거든요!” 김준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대답했다. * * * 성원화재 을지로 본사. “이 친구 이력이 좀…….” 인사팀장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의 숨은 임무는 따로 있었다. 그건 간밤에 최진태 이사가 부탁한 내정자를 뽑는 일이었다. “며칠 전에 인사과에 서류 합격자들 입사지원서 보내드린 거로 아는데요?” 최은정은 인사팀장이 갑자기 보험조사 2팀에 신경을 쓰는 것이 무척 이상했다. 괜찮은 지원자들을 보내 달라고 할 때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던 그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김준혁 씨…… 전에 일했던 곳이 게임업체라고 했는데 뭘 개발했나요?” “……카드 게임이었습니다.” “카드 게임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게임을 말하는 거죠?” 강준은 팔짱을 끼고는 김준혁의 대답을 지켜봤다. “도박을 목적으로 한 카드 게임이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무척 반성하고 있고요.” “흠…… 도박이라…… 알겠습니다.” 인사팀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은정은 그런 인사팀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대학생 시절 만든 지역 홍보사이트가 큰 반향을 일으킨 적도 있었죠?” “아…… 네. 그건 시험 삼아 한번 만들어본 건데…… 동네에서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지도와 연동한 부분이 호응이 컸죠…….” “혹시 보험조사관으로서 본인의 장기를 살린다면 어떤 아이디어가 있을까요?”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는 김준혁이었다. “보험사기는 결국 보험금 지급을 노리는 건데요…… 그런 지역별로 보험금 지급 현황을 만드는 건 어떨까요? 매년 그렇게 정보를 쌓아가다 보면 평년 데이터와 차이 나는 곳을 의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이터 통계자료를 토대로 보험사기를 적발하자는 거네요?” “맞습니다. 당장은 적용이 힘들겠지만…….” “보험사 간 보험금 지급 정보가 통합되어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나요? 우리 성원화재만 데이터를 수집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죠.” “아…… 그런가요……!” 김준혁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는 자책이었다. “지금까지 필리핀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만약, 성원화재에 합격한다면 서울에서 지낼 곳은 있나요?” 최은정의 질문에 인사팀장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의 입장에서는 절대 합격시켜서는 안 되는 지원자였기 때문이었다. “네, 지금은 고시원에 있습니다.” “불편하지 않나요?”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돈을 모아서 작은 원룸이라도 얻을 계획은 갖고 있습니다.” “네, 좋네요. 면접은 여기까지 하죠.” 자리에서 일어난 김준혁은 허리를 90도로 접어 인사하고는 면접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이미 자신을 불구속으로 빼내 준 강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면접 결과가 나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김준혁이 나가고 나자 인사팀장이 따지듯이 최은정에게 물었다. “최 팀장님!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사람을 뽑으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아직 결정도 안 됐는데 왜 벌써부터 그런 말씀이시죠?” “……김준혁인지 그 친구를 뽑으려는 거 아닌가요?” “그럼 인사팀장님께서는 눈여겨본 다른 지원자가 있으신가요?” “아무래도 한국대학교를 나온 이우혁 학생을 뽑아야 하지 않을까요? 객관적인 인사기준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이우혁은 최진태가 미리 부탁한 지원자였다. “음…… 부친이 성원건설 이사로 되어 있네요…….” “아무래도 같은 그룹 식구의 가족이면 애사심이 더 좋을 테니까요. 2대가 함께 근무하는 성원그룹…… 회사 이미지 차원에서도 좋을 것 같은데요?” “이우혁의 부친이 이종도 이사인데…… 최진태 이사의 최측근인 거 그룹 내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않나요?” “그거야…… 오해가 있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화들짝 놀라는 인사팀장이었다. 그는 최은정이 성원건설의 조직까지도 파악하고 있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역시도 이종도 이사는 저녁 자리에 초대받은 장소에서 처음 본 사람이었다. ‘이거 괜히 건드렸다가는 나까지 피해가 오겠는데…….’ 강준은 보신주의로 움츠러드는 인사팀장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번 특별 채용의 목표는 전산 특기자를 뽑는 거였습니다. 보험조사 업무의 체계적인 방법을 세워보자는 취지였죠. 그런 면에서 김준혁의 자질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아니! 범죄에 연루된 사람을 어떻게 뽑는다는 말이야?” 인사팀장이 공격 빌미를 찾았다는 듯 과장되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범죄에 가담하게 된 건 김준혁이 취업 사기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피해자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네, 맞아요. 법원에서도 불구속으로 석방했다는 건 무죄의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죠.” 최은정이 거들었다. “참나…… 그럼 정말 한국대학교를 나온 지원자를 제치고 김준혁을 뽑겠다는 겁니까?” “네, 스펙보다는 우리 팀에 필요한 사람을 뽑고 싶어요. 가뜩이나 인원도 없는데 그저 묻어가는 인력을 뽑을 순 없죠.” “이번 채용은 전적으로 최 팀장님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전 제 의견을 이번 채용보고서에 분명히 적을 테니까요…….” 굳이 무리해서 일을 뒤엎지는 않겠지만, 자신도 최진태 이사에게 할 말은 남겨두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시죠.” 최은정은 짧게 답했다. 인사팀장인 이희성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최은정을 곁눈질로 살폈다. 그는 생각보다 상황이 재밌게 흘러갈 것 같았다. 최진태 이사가 그룹의 후계자가 되리라 확신했었지만, 이번 채용 일을 계기로 그런 생각이 달라진 것이었다.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는 최진태보다는 명분을 챙기는 최은정이 더 경영자다웠기 때문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재밌어지겠는데…….’ 이희성은 끝까지 눈치를 살피며 어느 한쪽에 서지 않는 처세술로 인사팀장에까지 오른 자였다. 당장은 최진태 이사의 비위를 맞추지만 여차하면 반대편에 설 수도 있었다. 강준은 그런 이희성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회귀하기 전 세계에서는 이희성이 최진태의 개가 되어 그룹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면서 최진태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강준은 그런 그를 최진태가 아닌 최은정의 편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팀장님, 저녁 자리 마련했습니다. 같이 가시죠.” “아니야. 됐어!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회사 근처 한정식집에 코스로 예약을 해뒀습니다. 앞으로 저희 팀이 인사팀의 지원을 많이 받아야 하는데, 저희가 모셔야죠.” “아…… 그래? 최 팀장님도 가시나요?” 최은정은 강준이 왜 새삼스럽게 격식을 차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럼요. 저희 팀의 일인데 당연히 가야죠!” 최은정은 웬일로 빼지 않았다. 강준이 미리 단단한 일러둔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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