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자해 공갈단 (3)2021.12.13.
“정말 이 중에 강준 씨 뺑소니범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있을 겁니다… 사고당하기 전에 고병훈이랑 양태식, 그 두 놈이 벌이는 차량 보험사기를 알고 있었거든요. 그간 해먹은 액수가 크니까 제 입을 막으려고 했던 걸 겁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죠.” 강준의 말에 최은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머리로는 흉악범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팀장님이 성원그룹 오너가 일원이라 일이 쉽게 풀려가네요.” 강준의 말에 최은정이 미간을 좁혔다. 최 회장 명함 때문에 경찰 협조가 잘되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제가 오너가 일원이어서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자신을 능력이 아니라 출신으로만 보는 강준에게 날이 선 말로 대꾸하는 최은정이었다. “잘못됐을 리가 있나요, 오히려 잘됐죠!” “잘됐다니요…?” 강준의 답변은 최은정이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전 팀장님을 좀 이용해보고 싶은데요?” “네? 저를요?” “우리 목적은 의심되는 보험사기들을 잡아내는 건데 솔직히 수사권도 없고 경찰을 비롯한 관계자들 협조도 잘 안 이뤄지죠….” “그래서요?” “팀장님이 오너가 일원이라는 걸 이용해서 협조 좀 얻어내 보려고요. 그건 반칙인가요?” “당연하죠! 전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거든요!” 강준은 최은정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자존심 싸움에 휘둘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실력으로 인정받아서 뭘 하시려는 거죠? 성원그룹의 경영자가 되고 싶은 겁니까? 아니며 최진태 이사를 밀어내고 후계자 자리라도 차지하고 싶나요?”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최은정은 강준이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불쾌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의 이복 오빠인 최진태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어차피 팀장님은 두 가지 이점을 가지고 시작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두 가지라고요…?” “하나는 알다시피 팀장님이 오너가 집안이라 주변에서 알아서 도와준다는 거고.” “나머지 하나는요?” “저 박강준이 팀장님과 같은 편이라는 거죠.” “…네? 풉!” 강준의 말에 최은정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 아니에요. 제가 팀장님이 그룹 내에서 실력으로 인정받게 도와드리죠.”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저도 소문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최진태 이사 라인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고요? 전 팀장님 라인 하렵니다.” “별 재미 없을걸요….” “그야 두고 보면 알죠.” 최은정은 누군가 자기편을 해주겠다는 말에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럼 우선 저기 유리창 너머의 뺑소니범부터 한번 잡아봐요. 그럼 제 라인에 넣어주죠.” “정말입니까? 약속한 거예요.” 강준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강준에게 최은정은 처음으로 호감을 느꼈다. 둘이 있는 곳은 연남경찰서 경제수사과의 조사실이었다. 임철호 국장 덕분에 블랙박스에 담겼던 공갈단을 비롯해 일단 십여 명이 경찰에 붙잡혀 있었다. 생각보다 그들 사이의 의리는 얄팍했다. 한 명씩 따로 불러 감형을 빌미로 실토하게 하자 너나 할 것 없이 아는 것들을 다 토해냈다. 덕분에 양태식이 자해 공갈단의 주동자라는 건 금세 밝혀졌다. 문제는 뺑소니범에 대한 문제였다. 강준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놈들을 하나씩 살폈다. 딱 동네 양아치처럼 생긴 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 눈빛이 좀 매서운 녀석 한 명과 겁먹은 놈 한 명이 있었다. “한번 저놈들하고 얘기해보시겠어요?” 진철이 유치장 열쇠를 손가락에 걸고는 강준에게 말했다. “저 친구하고 얘기해보죠.” 강준이 가리킨 녀석은 눈빛이 매서운 놈이었다. 그는 팔뚝에 문신이 그려진 양아치였다. 조사실에 마주 앉은 강준은 한동안 그에게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강준과 눈빛을 피하지 않던 양아치는 눈치 게임을 하듯 말을 툭 뱉었다. “당신! 태식 형님이랑 친구라면서요! 근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서로 알만한 사람들끼리….” “몰라서 물어? 양태식이 너희 시켜서 나 차로 밀어버리려고 했잖아?” “네? 지금 그게 뭔 소리 하는 거래요?” 아는 걸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예상치 못한 거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너 작년에 연남 기차역 뒷길에서 사고 낸 적 있지?” 눈치 빠른 녀석은 상황이 덤터기를 쓰는 형국으로 전개되자 눈알을 굴리면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강준은 양아치 녀석이 경찰서를 드나든 게 한두 번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불리할 때는 입을 다무는 게 최선이거든!’ “너 이름이 뭐냐?” “박종길이요….” “아는 거 있으면 얼른 말해! 괜히 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박종길은 혼란스러웠다. 강준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취조당하는 자는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모르게 할 것! 강준이 경찰 시절에 배운 심문의 첫 번째 규칙이었다. “물 한 잔 마시고 천천히 생각해 봐.” 강준은 빈 컵에 물을 직접 따라서 박종길에게 쓱 건넸다. 벌컥벌컥! 목이 말랐는지 아니면 속이 탄 건지 박종길은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이건 태식이 형이랑은 상관없는 건데….” 운을 띄우는 종길은 잔머리를 다 굴렸다는 듯 숨을 한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강준의 날카로운 눈빛이 반짝였다. “태식이 형이 사고 차량 차대번호 바꿔서 매입하는데 어딘지 알죠?” “알지, 중고차 매매단지 C동! 용식이!” “네, 얼마 전에 거기서 심부름을 하나 했는데….” “근데?” “뻔하잖아요! 동남아에서 들어오는 불법적인 돈인데… 제가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니까요? 이거 안 땡겨요?” 자신이 빠져나가려고 시선을 분산시키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박종길은 강준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강준이 말을 들어주는 척하며 종길의 어깨를 짚자 그의 기억이 영화 장면처럼 강준에게 전이됐다. [용식의 YS무역 사무실에서 가져나온 현금 뭉치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장면이었다. 어두운 창고, 그리고 그 창고를 지키는 또 다른 누군가… 그리고 흐릿해지는 장면들….] ‘이번에도 기억이 선명하게 들어오진 않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강준은 단서를 찾았다. 돈을 건네주고 돌아서는 길에 보이는 이정표. 연남시 외곽의 번암교차로! 강준은 그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창고들이 밀집한 고속도로 인근의 산업단지였다. ‘송 사장 금고가 거긴가 보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이미 김용식이 필리핀 정킷방 운영자인 송종철 사장의 금고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노련한 새끼! 나를 한번 떠본 거였구나!’ 용식은 경찰로부터 송 사장이 주목받고 있다는 걸 알려준 상태일 터였다. 용식은 결국 강준보다는 오랜 동업자였던 송 사장을 선택한 것이었다. 두 번째 심문 대상은 유치장에서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던 녀석이었다. 박종길은 유치장에서 그와 마주치며 무서운 눈빛을 던졌다. ‘뭔가 불지 말라는 거군…!’ 강준은 겁먹은 녀석이 들어오자마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 뭐냐? 통성명이나 하자. 나 박강준이야.” “…김준혁입니다….” 녀석은 강준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하지만 서둘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너 왜 여기 왔는지 알지?”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요….” “오토바이로 일부러 차에 부딪혀서 돈 빼먹고 그랬잖냐?” “전 한국에 있었던 적이 별로 없는데요.” “뭐? 그럼 외국에 있었던 거야?” “네. 필리핀이요.” 뭔가 냄새가 났다. 강준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노려봤다. “송종철 사장 알아?” “…아뇨. 모르는데요….” 겁먹은 얼굴이 더 울상으로 변했다. 김준혁은 거짓말을 하는 게 단박에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강준은 그런 김준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요? 전 그냥 어학연수 갔던 것뿐이에요.” “새끼야, 그래서 영어 많이 배웠냐?” “…아뇨, 공부는 체질에 안 맞아서….” “어디서 구라를 까!” 강준은 벌떡 일어나 김준혁의 멱살을 잡았다. 그 순간 그의 불완전한 기억이 강준의 뇌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예상보다 놀라운 기억이었다. [누군가의 차에 올라탄 그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길… 그리고 그때 기차가 지나는 소리가 들렸고, 길을 걷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부우우웅! 퍽…! 차로 박아버린 남자의 몸은 공중에 붕 떴다가 차의 앞 유리창에 떨어졌고,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남자는 바로 박강준 자신이었다.] 김준혁은 그런 박강준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뺑소니범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잡았네… 뺑소니범!’ “야… 김준혁! 너 작년 가을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 말이야….” 뺑소니 시점을 언급하자 김준혁의 얼굴이 벌써 사색이 됐다. “누구랑 있었냐? 누구랑 차 타고 다니면서 사고치고 다녔냐고?” “네? 저 차 안 타고….” “CCTV 뒤져보면 다 나온다… 알아, 네가 그런 거 아니잖아, 사람 치고 뺑소니친 거! 그거 네가 안 그런 거잖아?” 김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저… 그거, 박성우 부장님이….” “누구? 박성우 부장이 누구야?” “송 사장 부하요….” “송종철 사장 말이야?” “…네. 근데 전 진짜 차에만 타 있었어요! 진짜예요!” 강준은 손바닥으로 김준혁의 뒤통수를 때렸다. 퍽! 퍽! “이 새끼야! 너 뺑소니 방조죄는 종범으로 처벌되는 거 알아? 교통사고로 피해자가 다치거나 죽었을 때, 구호 조치 없이 도주하면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알아? 새끼야!” 퍽! 퍽! 빡! “강준 씨, 무슨 짓이에요!” 조사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진철이었다. 그는 흥분한 얼굴로 강준의 손목을 잡고 비틀었다. “믿고 대면하게 해줬는데 이거 뭡니까!” “이 새끼가 나 치고 도망친 뺑소니범 차에 타고 있었답니다! 경위님, 이걸로 뺑소니범 수사는 끝난 거 같네요.” “네? 그게 정말이에요?” “물어보세요. 직접….” 강준은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조사실을 빠져나왔다. 나머지는 경찰에게 맡기면 끝나는 일이었다. “뭐예요? 벌써 끝난 거예요?” 조사실 밖에 있던 최은정이 다가왔다. 그녀는 타 보험사 직원들과 함께 보험사기 피해 내역을 집계하는 중이었다. “뺑소니범 잡은 거 같네요.” “네? 벌써요?” “근데 입증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해외에 있는 놈이라….” 강준은 양태식이 어디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 경사님, 근데, 양태식은 언제 입건됩니까?” “지금 연락이 안 돼서… 아마 수배가 내려졌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갑자기 양태식이 보고 싶어진 강준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가볼 곳이 있었다. 번암교차로, 송종철 사장의 비밀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