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자해 공갈단 (1)2021.12.11.
“이게 뭐예요?” “이걸로 장사 좀 해보려고요. 하나 팔 때마다 10만 원씩 준다는데요?” 강준은 커다란 상자 하나를 안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 상자에는 막 시판되기 시작한 차량용 블랙박스들이 들어 있었다. 당시에는 블랙박스라는 게 많이 보급되지 않아서 차주들이 그 존재를 잘 모를 때였다. “이게 다 뭐예요? 카메라예요?” “네, 차량 내부에 달아서 전방 상황을 녹화하는 겁니다.” “계속요?” “시간이 지나면 메모리를 뒤집어쓰면서 새로운 영상이 녹화되는 거죠. 좌우간 전 이걸 팔러 갑니다!” 최은정은 블랙박스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해했지만, 당최 강준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지 못했다. 입술을 꽉 다문 최은정은 운전석에 앉았다. “목적지가 어디죠?” “연남시 운전면허시험장이요.” “네? 거긴 왜요?” “출발하시죠. 가면서 설명해드릴 테니까요!” 서울에서 한 시간 반 거리. 차 안에서 강준은 블랙박스를 설치해 자해 공갈단의 범행증거를 잡자는 계획을 설명하고는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이상하게 차만 타면 졸게 되는 강준이었다. * * * 연남 운전면허시험장. 필기시험과 신체검사, 그리고 주행 시험이 한꺼번에 진행되는 곳이 바로 운전면허시험장이었다. “여기에 자해 공갈단이 있다고요?” “네.” “어떻게 알아요? 정보공유는 사전에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자해 공갈단의 주범인 양태식이라고 제 동창 놈이죠. 그 정도면 설명이 된 겁니까?” “……아, 지난번 차량 보험사기를 쳤던 사람 중 한 명이죠?” “아쉽게도 고병훈만 구속되고, 양태식은 벌금형으로 그쳤죠. 그래서 이번에 꼭 집어넣어 보려고요.” 운전대를 잡은 강준은 서행으로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런 강준이 뭘 살피는지 최은정은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뭐라도 있어요?” “저기 쟤네 보입니까?” “아! 저기 오토바이들요?” “네, 삼삼오오 모여있는 애들이요!” 강준이 가리킨 곳에는 평소 배달에 쓰이는 오토바이를 탄 대여섯 명의 젊은 남자들이 모여있었다. 기껏해야 20대 초반. 몇몇은 10대 후반으로 보였다. “양태식이가 후려치기 딱 좋은 놈들이네요…….” “저 애들이 양태식의 자해 공갈단이라는 거예요?” “네, 아마도요.” “아마도요? 확실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알아요?” “보면 딱 알죠…….” “이번에도 감이라고 말하려는 거예요?” 벌컥! 최은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준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는 뒤쪽의 블랙박스가 가득 담긴 상자를 안아 들었다. 강준은 자해 공갈단이라던 아이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운전면허시험장 입구로 걸어갔다. 최은정은 뭘 하려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혹시 여기서 블랙박스라도 팔려는 거예요?” “네. 그럼 이걸 왜 갖고 왔겠어요?” 강준은 상자를 내려놓더니 갑자기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서 손뼉을 쳤다. “자자! 국내 최초 차량용 블랙박스 Q30! 이거 차에 다시면 억울하게 사고 당하는 일 없을 겁니다! 설치비까지 30만 원! 일단 구경이나 해봐요! 에헤!” 신이 나서 소리치는 강준을 보고 최은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이내 함께 블랙박스를 집어 들고는 소리쳤다. “블랙박스 사세요! 블랙박스요!”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인 호객 문구였다. 한 번도 남들에게 아쉬운 게 없게 살아온 최은정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최은정이 그러고 있을 때, 강준은 몇몇 사람들에게 은밀하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돈도 받지 않은 채 블랙박스를 넘겼다. “뭐예요? 돈 받았어요?” “아니요.” “그런 게 어딨어요? 얼른 가서 돈 받아와요!” “후불로 받기로 했습니다. 진짜 영업을 잘하려면 고객들이 일단 써보게 해야 한다고 해서요.” 그렇게 상자 안에 있던 블랙박스가 모두 사라지고 났을 때, 강준은 담뱃불을 하나 붙이며 숨을 돌렸다. “근데 후불이라는 핑계로 그렇게 마구잡이로 나눠줬는데 자해 공갈단이 뛰어들지 않으면요? 블랙박스고 뭐고 다 소용없는 거 아닌가요?” 강준은 차에 올라타 시트를 뒤로 제치고는 누웠다. 또다시 한숨 자려는 자세였다. “오늘 여기서 열리는 교육이 교통안전 운전 교육이거든요. 면허 취소가 된 사람들이 받는 필수교육이죠.” “아……!” 외마디 신음을 내뱉는 최은정이었다. 전직 경찰이었던 강준의 작은 노하우가 최은정에게는 무척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둘이 차량에서 기다린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을 때, 블랙박스를 받아 갔던 사람들이 강준에게로 되돌아왔다. “형씨! 기가 막히네! 어떻게 알았어요? 형사예요?” “보험조사관입니다. 이 메모리 제가 가져가도 되죠?” “아, 그럼요! 저런 새끼들은 콩밥 좀 먹여야죠.” “그놈들은 어디로 갔어요?” “병원에 드러눕겠다고 엠블란스 타고 갔어요. 참나! 어이가 없어서!” 무면허 운전으로 교육받으러 왔다가 다시 운전하고 돌아가는 사람을 노린 자해공갈 범죄였다. 무면허를 빌미로 협박해서 보험금보다 더 많은 돈을 뜯어내는 게 양아치들의 목적이었다. “제가 이거 취합해서 형사고소 대신해 드릴게요. 이제 편하게 집에 가셔서 경찰서에서 오는 연락 받으시면 됩니다.” “보험사에는 어떻게 할까요?” 강준은 명함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여기로 연락 달라고 하세요. 제가 선생님 보험사에 잘 말해놓겠습니다.” “아! 그리고 참! 이 블랙박스 제가 살게요. 저런 새끼들이 또 있을지 모르니…… 얼마라고 그랬죠?” “설치비까지 30만 원입니다. 설치는 구매하시면 설치 기사가 나가서 며칠 내로 제대로 해줄 거예요.” “카드 됩니까?” “아이고 물론이죠! 카드 이리 주세요.” 강준은 점퍼 주머니에서 이동형 카드리더기를 내밀었다. 그걸 보던 최은정은 속삭이듯 물었다. “아니…… 언제 이런 거까지 준비하셨대요?” “블랙박스 영업점에서 주더라고요…….” 강준은 씩 웃으면서 최은정에게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남자가 가고 나자 최은정이 원래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저 사람들 무면허 운전자들 아니에요? 공갈 사기범들 잡겠다고 저 사람들 봐주는 거예요?” “에이, 제가 설마 그랬겠어요?” “면허 취소된 사람이 받는 교육이라면서요?” “단순 벌점 까려고 받는 사람들도 섞여 있었거든요. 면허 취소자들한테는 경고해주고, 면허 살아 있는 사람들한테만 부탁한 거죠. 헤헤!” 강준은 그 말을 마쳤을 때, 블랙박스 메모리를 가져온 사람이 또다시 차량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일곱 개의 메모리가 모였을 때, 강준은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이제 영업 다 했으니 수당 받으러 가자고요!” “네, 어디로요? 블랙박스 판매점이요?” “……네, 뭐 대충 그런 셈이죠…….” 강준은 대충 얼버무리고는 악셀을 밝았다. * * * 연남시 자동차 매매단지 C동. “여기 뭐예요?” “김용식이라고…… 뭐, 이것저것 하는 놈이 있습니다…….” “우리끼리 가도 되는 거예요? 경찰이라도 불러서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최은정은 주변의 삭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한껏 위축된 표정으로 말했다. 곱게 자라온 그녀가 이런 곳에 와 봤을 리는 없었을 터였다. “지난번 제이모터스 건 말이에요…… 고병훈이 구속됐지만, 여전히 같은 이름의 간판을 달고 운영되고 있더라고요.” “그걸 또 언제 알아보신 거예요?” “제가 연남시 출신이잖아요. 이 근방 소식은 나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좌우간 그놈들이 고병훈 없다고 개과천선했겠습니까?” “그럼요?” “양태식이 자기를 따르는 동네 양아치들 모아다가 자해 공갈단을 운영했던 겁니다.” “그럼…… 이제까지 차량 파손은 제이모터스에서 과다청구하고 몸으로 때우는 자해 공갈단은 양태식이 주도했다는 거네요.” “아름다운 동업이었죠!”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정리해주는 강준에게 최은정은 묘하게 안정감을 느꼈다. 강준이 아니었다면 최은정은 음침한 자동차 매매단지에서 바로 차를 돌렸을 터였다. “지금 여기는 왜 온 건데요?” “양태식한테 붙어먹은 양아치들이 어디서 출몰하는지 알려준 사람이 여기서 일하는 김용식이거든요.” 강준은 손가락으로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3층을 가리켰다. 계단을 꾸역꾸역 올라가자 전과는 다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YS무역. “김용식이라서 YS무역인가…… 거! 이름 한번 촌스럽네.” 사무실 출입문에는 싸구려 아크릴 재질로 YS무역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어서오세…… 어! 시발! 너 저번에!” “잘 지냈냐? 왜 이리 놀래?” 강준은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김용식 부하의 기억이 강준의 눈앞에 펼쳐졌다. 양태식이 양아치 후배들을 데리고 YS무역에 드나드는 장면이었다. 김용식은 강준을 보더니 올 줄 알았다는 듯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야…… 이게 누구신가? 보험사 양반 아니야?” “네, 말씀하신 대로 운전면허시험장에 몰려 있더군요.” “거봐, 내 말이 맞지? 나 이래 봬도 구라는 안치는 사람이야, 하하!” 김용식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키득키득 웃었다. 주변에 있던 부하들도 눈치를 보고는 그를 따라 웃었다. “근데…… 네가 말했던 배필립이라는 친구 말이야…… 알아보니 정말 캄보디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더군.” “……온라인 도박장도 사업이라면 사업이겠군요.” “보험쟁이! 너 정말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는 거야? 그걸 알아야 나도 판단을 할 거 아니야?” 최은정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리둥절했다. 강준은 자해 공갈단의 출몰지역을 용식에게 얻는 대신 그가 위험에 빠지지 않을 힌트를 줬었다. 그 힌트는 강준이 회귀하기 전 용식이 체포됐던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성원그룹 같은 대기업에서는 나름의 내부정보팀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최 팀장님?” 내부정보팀과 관련해서는 금시초문인 최은정이었다. 그룹 내에 전략기획팀은 있었지만, 내부정보팀이라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혹시 전략기획팀을 얘기하는…….” 강준은 얼른 최은정의 말을 자르며 자신이 대신 마무리했다. “보통은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부릅니다.” “역시…… 대기업은 다르긴 다르군.” 그 말을 또 곧이곧대로 믿는 김용식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회사생활을 해보지 않은 용식에게는 내부정보팀이건 전략기획팀이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들보다 한참 위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믿는 거였다. “그럼 한 가지 묻자. 배필립 때문에 줄줄이 알사탕으로 엮여 들어간다는 건데…… 그럼 나보고 배필립인지 뭔지를 소개해준 송 사장한테는 어찌하라는 거야?” “어떠하긴요. 제쳐야죠!” 김용식이 강준의 말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보험쟁이 양반!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 하는 얘기야?” “그럼요. 송 사장이 조만간 한국으로 귀국할 겁니다. 경찰은 입국장에서 기다렸다가 송 사장을 체포할 거고요. 배필립하고 더럽게 엮었다가 수사 선상에 오른 덕분이죠…….” 강준의 말을 듣던 용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시발…… 으스스하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번 기회에 송 사장이 꿍쳐놓은 돈 우리가 먹읍시다! 저랑 사장님 둘이서요.” 태연한 강준의 제안에 표정이 심각해지는 용식이었다. “내가 너한테 목숨이라도 걸라는 말이냐?” 강준은 속주머니에 있던 블랙박스 하나를 툭 내밀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 기회에 손 싹 다 씻고 저랑 이거 사업하자고요.” “크크…… 크하하! 나랑 이거나 팔고 있으란 말이냐?” “앞으로 대한민국 모든 차에 이걸 달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장님과…… 아니 YS무역과 저는 큰돈 벌게 될 거고요.” “난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 블랙박스 사업이 지금 하시는 환치기보다 훨씬 더 전망이 좋을 겁니다. 저 믿으세요!” 아직 완전히 넘어오지는 않았지만, 용식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