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출근2021.12.06.
성원화재 연남지점. “복귀 축하하네!” 정승태 팀장은 병원에서와는 딴판으로 달라진 태도로 강준을 환영했다. 연남경찰서에서 차량 보험사기 조작단의 수사를 대대적인 성과로 이미 발표했고, 강준에게 시민공로상을 수여했기 때문이었다. “강준 씨, 그간 맘고생 많았지! 이제 자네는 우리 영업팀의 자랑이야!” 뻥 뚫린 100평의 공간에 50명이 넘는 영업사원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영업 1팀 사무실이었다. 강준은 처음 보는 낯선 이들에게 익숙한 척 고개를 숙이며 눈인사를 나눴다. 박강준의 성원화재 복직은 회장의 특별 지시사항으로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그전까지 어떻게든 강준의 자진 퇴직서를 받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정승태 팀장이었다. 하지만 회장 지시사항에 그런 팀장의 입장은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었다. “팀장님, 제 자리는 어딥니까?” “어, 이쪽으로 와. 내가 미리 창가 쪽으로 잡아놨지.” 대세의 흐름에 촉이 빠른 정승태였다. 그는 강준을 팀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야겠다는 계산까지 마친 상태였다. “자자! 영업팀 모두 일어나세요! 우리 연남지점의 슈퍼스타 박강준 씨가 복귀했습니다! 박수!”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누군가 다가와 정승태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강준 씨, 일단 사람들한테 환영 인사부터 하라고!” 정승태는 그 말을 남기고는 후다닥 아래층으로 뛰어갔다. 1층에는 본사에서 내려온 최은정이 정승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휴! 오신다면 오신다고 전화라도 한 통 하시지 그러셨어요?” 최창식 회장의 막내딸이라는 걸 아는 정승태는 그녀가 연남지점에 왔다는 소식에 눈빛이 반짝반짝해졌다. “잘 지내셨죠? 인사이동 관련해서 급하게 전달 드릴 사안이 있어서요.” “네? 무슨 인사이동이요? 혹시 저 본사로 가게 되는 겁니까?” 정승태는 김칫국을 들이마시며 헤벌쭉 웃었다. 그런 정승태의 반응에 최은정은 냉랭한 말투로 대꾸했다. “정 팀장님이 아니라…… 박강준 씨요. 오늘부로 본사 보험조사팀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네? 아니 그런 게 어딨습니까? 박강준 씨는 이제껏 연남지점에서 키워왔는데요…….” 정승태의 순발력은 그 순간에도 자신의 공적을 포장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회장님 직접 지시사항입니다.” “헉……! 그럼 어쩔 수 없죠. 올라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팀장님, 전 일개 사원일 뿐이에요. 모시고 어쩌고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휴 그래도…….” 최은정은 정승태를 차갑게 한번 바라보고는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일반 직원들 중 최은정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없었다. 환영 인사가 끝났는지 사무실은 각기 영업용 전화통을 붙잡고 시끌벅적해져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정승태의 안내를 따라 최은정은 박강준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박강준은 그런 최은정을 기다렸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인사드리죠. 보험조사팀 최은정이에요. 오늘부터 박강준 씨는 우리 보험조사팀으로 발령 났어요. 그러니까…….” “보험조사팀으로 가는 겁니까?” “네. 따라오세요.” 강준은 얼른 서류 가방을 집어 들고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는지나 알고 일어서는 거예요?” “본사로 가는 거 아닙니까?” 최은정은 별다른 질문도 없이 따라나서는 강준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강준은 자신이 보험조사팀으로 가리라는 걸 이미 예상했었다. 회귀하기 전 최진태 때문에 한동안 성원그룹을 수사했던 강준이었다. 최창식 회장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최 회장이 나를 쓰기로 했군! ……근데 막내딸이 나를 데리러 온다라…….’ 정승태는 최은정을 아래층까지 다시 배웅할 태세로 줄레줄레 따라왔다. “정 팀장님 안 바쁘신가 봐요……? 이제 팀장님 일 보시죠?” 차갑게 돌아선 최은정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 순간을 이용해 강준은 손을 뻗어 최은정과 접촉했다. 원래 강준이 알고 있던 최 회장 일가의 그룹 경영에서 막내딸은 없었다. 변호사라는 딸은 로펌에 근무 중이었어야 했다. ‘아…… 뭔가 상황이 바뀌었군.’ 15년 전으로 돌아온 세계에서 성원그룹의 막내딸은 아직 로펌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강준은 최은정이 언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지 궁금했다. 오너의 딸이라는 걸 이용해서 충분히 갑질을 하고도 남을 수 있었다. 그게 편한 길이기도 하고 말이었다. 주차장에 내려온 강준은 먼저 말을 건넸다. “근데 입사는 언제 했어요? 나보다 선배인 거예요? 아니면 나보다 입사 후배인 거예요?” 최 회장의 딸이라는 걸 알고 나니 강준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고 싶었다. “흠…… 공채 10기라고 해두죠.” “전 공채 9기입니다. 뭐 선배 대접을 해 달라는 건 아닌데…… 어쨌든 뭐…… 그렇다고요.” 갑자기 기수 얘기를 꺼내는 강준에 최은정은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자기 입으로 회장 딸이라는 걸 내세우기도 싫었다. “그래서요?” “나이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 호구 조사하러 나오신 거예요? 전 직장에서 일하는 데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강준은 최은정이 자신과 동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성원그룹의 오너가에 대해선 낱낱이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은정은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새로운 팀이 만들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당연히 자신이 박강준을 끌고 나가는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음…… 그런 건 나중에 정하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그럼요, 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팀웍이잖습니까?” “잔말 말고 일단 타요!” 강준의 너스레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은정은 자신의 차 운전석에 탔다. “오면서 박강준 씨에 대해서 좀 알아봤어요. 입사해서 한 일이라곤 병원에 누워 있다가 뒷걸음질로 보험사기건 하나 잡은 거밖에 없더군요…… 게다가 영업팀에서의 실적도 바닥이고요.” “제가 누굴 설득하고 이런 거에는 좀 약해서요……. 그리고 병원에 누워 있었던 건 내 의지가 아니었잖아요?” “그럼, 한 가지 물어볼게요. 입사할 때, 왜 영업팀으로 지원한 거죠?” “그야…….” 강준은 최은정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빙의한 몸의 주인인 박강준이 왜 영업팀으로 갔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제가 대신 말해 드려요? 공채 합격했으니 적당히 영업부서에서 버티다 보면 관리직으로 올라갈 거고, 그때까지만 어떻게 뭉개고 있어 보자…… 그런 생각이었죠?” “흠,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죠…….” “박강준 씨!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최은정은 같은 팀이 된 강준의 정신 상태에 살짝 화가 났다. “걱정 마요. 그렇다고 내가 민폐 끼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강준 씨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 제 직장에서의 일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어요.” “알아요. 새로운 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죠?” 최은정은 그제야 강준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에 대해서 뭐 들으신 거 있어요?” “최창식 회장님 비서실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변호사 출신의 보험조사관과 함께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그럼…… 혹시?” 강준은 최은정이 자신이 최 회장의 딸임을 아냐고 물어보려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 모른 체했다. “뭐요? 또 말해줄 사항이 있어요?” “……아뇨, 됐어요.” 강준은 언제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본인에 대해 얘기해줄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차량은 어느새 고속도로를 따라 연남시를 벗어나고 있었다.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을 알려드릴게요. 저랑 같이 팀에서 배당해주는 사기 의심 건들을 조사하는 거예요. 물론 그 과정에서 성과를 내야 하고요.” “보험 사기꾼들 잡는다는 거죠?” 경찰이었던 강준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보험사기 범죄자들을 잡는 것! 하지만 보험조사업무의 실상은 강준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때로는 무리하게 보험을 판 모집인을 조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보험 지급 금액을 두고 수령인과 싸워야 한다. 최은정은 그런 보험조사관의 업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 아파졌다. “대충 그렇다고 해두죠. 자세한 건 차차 알려드리죠.” 대화가 끊어지자 강준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대놓고 잠을 청했다. 최은정은 그런 강준을 슬쩍 봤지만 잔소리하진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저…… 박강준 씨! 이제 잠 좀 깨시죠.” 강준은 기지개를 켜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무 대놓고 자는 거 아니에요? 제가 이런 거 위에다 일러도 상관없어요?” “안 그럴 거잖아요.” 회귀하기 전 강준은 40대였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어린 여자의 심리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죠?” “최은정 씨 얼굴에 쓰여 있네요.” 강준은 그 말을 남기고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눈앞에는 거대한 빌딩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가 본사인가 보네요…….” “앞으로 박강준 씨가 출근하게 될 곳이기도 하죠. 긴장해요. 이제부터 저랑 한 팀이에요.” 그녀는 목걸이로 된 성원그룹 신분증을 강준에게 내밀었다. “영광입니다. 잘해봐요! 최 변호사님!” “여기서는 그냥 누구누구 씨라고 부르세요.” “……그러죠.” 강준은 건네받은 신분증을 목에 걸고는 최은정을 따라 보안 구역을 통과했다. “우리 보험조사 2팀은 11층이에요.” 1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사람은 김성호 이사였다. “박강준?” “네, 박강준입니다.” “반갑네. 난 보험조사팀의 책임자인 김성호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강준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반가울지 안 반가울지는 앞으로 지켜보자고.” 김성호 이사는 말끔한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눈가의 주름은 그의 실제 나이를 속이지 못했다. “첫 번째 사건은 이거네. 받아.” 손에 쥐고 있던 서류 봉투를 강준에게 내밀었다. 서류 봉투에는 ‘박순애 사건’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자세한 건 사무실에 들어가서 하지.” “네. 근데 전 최은정 씨랑 같은 팀원이라고 하던데 다른 팀원들은 어디 있습니까?” 회귀 전 형사과 경찰이었던 강준은 팀원 구성부터 파악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야 사건 현장에 인원을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한 대략적인 예상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팀원? 자네한테 아직 팀원은 없어. 여기 있는 최은정한테 잘 배우면서 따라와.” 강준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경찰 시절 직접 스무 명도 넘는 팀을 지휘하며 사건을 조사하기도 했었던 강준이었다. “그럼 팀원은 여기 있는 이 친구랑 저 딱 둘이라는 말입니까?” “왜? 뭐 문제라도 있나?” “아뇨, 없습니다.” 옆에 있던 최은정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준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녀가 보기엔 강준은 눈치 없는 동료가 될 것 같았다. “우리 보험조사팀은 이번에 두 팀으로 나뉘게 됐어. 기존의 인력들은 모두 1팀, 그리고 자네와 최은정은 신설된 2팀을 맡는 거지. 총괄은 내가 하네.” “임시 팀이라는 거네요…….” “눈치가 빠르군…… 회장님 지시사항으로 자네를 우리 보험조사팀으로 오게 했지만, 난 자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병원 중환자실에 몇 개월 동안 누워 있었다는 거밖에는…….” 객관적인 지표가 아니면 믿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이 사건 해결하면 정식 팀으로 굳히는 겁니까?” “아마도 그럴 확률이 더 올라가겠지?” “좋네요.” 강준은 최은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최은정 씨! 같이 한번 잘해봐요! 우리 팀 해체되면 안 되잖아요?” “그…… 그야, 그렇죠.” 최은정은 좀 전의 걱정했던 마음이 조금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