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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차대번호 위조 (2) (4/250)

004. 차대번호 위조 (2)2021.12.04.

연남경찰서 경제수사팀. 강준이 회귀하기 전 근무했던 익숙한 경찰서였다. 15년 전으로 돌아왔으니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기도 했다. “이진철 경위님을 찾아왔습니다.” “네? 어떻게 오셨는데요?” 큰 키에 넙데데한 얼굴의 남자는 한정수 경사였다. 강준의 경찰대 동기인 이진철은 그의 텃세 때문에 한동안 꽤 고생했었다. “성원화재에서 나왔습니다. 보험사기 관련 업무는 여기서 한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래요? 그럼 앉으시죠.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강준은 먼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가 가진 기억을 읽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전이된 기억에서는 엉뚱하게도 경제수사과 팀장으로 온 이진철에 대한 불쾌한 감정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때그때 원하는 기억을 딱 얻을 수는 없는 거군……! 뭐 어쩔 수 없지. 이거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활용해 봐야지.’ “아니요. 이진철 경위님과 얘기하고 싶습니다.” 강준의 말에 한정수 경사는 눈썹을 꿈틀하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우리 경찰이 그리 한가하지 않아요……. 알다시피 보험사기 건은 너무 자잘해서 한정된 인력으로 수사하기도 힘들고요.” 강준이 빡빡하게 나오면 수사 협조를 해주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수사권이 없는 보험사가 아쉬운 입장이라는 걸 확인 사살해준 것이기도 했고 말이었다. “그래서 이진철 경위님께 부탁드리려는 겁니다. 여기서 제일 한가한 분이시잖아요?” 강준의 말에 순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한정수 경사였다. 외부에서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다는 걸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뭐, 그럼 앉아서 기다리시던지요. 아마 지금 게임머니 사기 친 놈들 조사하러 갔으니 좀 있어야 할 겁니다.” “저기서 기다리면 되는 겁니까?” 강준은 익숙하게 휴게실을 가리켰다. 15년 동안 근무했던 연남경찰서였다. 구석구석 뭐가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준이었다. “안에서 커피 타 마시고 그러면 됩니다.” “사발면도 먹어도 되죠?” “아, 뭐 그렇긴 한데…… 얼마나 있으려고요?” “이진철 경위님이 올 때까지요.” 강준의 단호한 대답에 한정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른 곳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더 이상 강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강준은 익숙하게 구내매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항상 먹던 사발면과 소시지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병원을 퇴원해서 처음으로 먹는 인스턴트 음식이 강준의 입맛을 돋웠다. 후루룩! 후루루룩! 뜨뜻한 배를 채워가고 있을 때, 낯익은 누군가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목에 신분증을 걸고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남자는 바로 이진철이었다. 그는 얇은 테의 안경을 끼고는 어색한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강준에게로 다가왔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네. 이진철 경위님.” “보험회사에서 무슨 자료를 요청하신다고 들어서요.” “전 자료를 요청하려는 게 아니라 자료를 제공해 드리러 온 겁니다.” 이진철은 회귀하기 전 강준의 경찰대학 동기였다. 그는 매사에 진지하고 열성적이었지만,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게 흠이었다. 덕분에 경찰대학 시절 성적은 좋았지만, 일선 경찰서에 부임한 후로 매번 진급에서 누락됐었다. 덕분에 윗선에 개기던 강준과는 매번 선술집에 마주 앉아 신세 한탄을 하던 사이였다. “오! 자료를 가져오셨다고요? 그럼 어떤 자료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 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네? 조건이라면…… 선생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우리 경찰은 범죄사실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든가 하는 일 따위는 못 합니다. 더군다나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역시나 고지식한 이진철이었다. “거래가 아니라 서로 협조를 하자는 겁니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진철이었다. 강준은 자신이 또다시 피곤한 일을 벌였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에 대해서 어떻게 전해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사에는 원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함부로 보험사에 수사대상자의 개인정보를 유출한다든지 하는 일은…….” 강준이 다 먹은 소시지 꼬치를 테이블에 탁 내려놓고는 진철의 말을 가로막았다. “한 해 보험사기로 인한 피해 금액이 1,800억 원입니다! 이게 보험사의 손실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보험사는 자선단체가 아니니까요…… 손실액은 결국 일반 보험계약자들에게 부담 지워지겠죠.” “물론 그야 그렇겠죠…….” “실제로 밝혀지지 않은 보험사기 건이 많을 테니 피해액은 1,800억을 훨씬 상회할 거고요.”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그렇지만 선생님, 경제수사과에서 보험사기만 수사하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래서 보험사의 민간조사팀과 공조해야 한다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민간조사팀에 수사조사권과 자료열람권을 보장하고 있죠.” 한정수 경사 같았으면 대번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일갈했겠지만, 신임 경위인 이진철은 그래도 강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려 했다. “좋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그 조건이라는 게 뭔가요?” “이건 제이모터스라는 곳에서 사들인 외제 차들입니다. 거의 반파에 가깝게 수리한 차들이 허다하죠. 그 사고기록들을 지우고 자체 보험에 가입한 겁니다.” 강준은 제이모터스의 외제 차 구매 내역이 담긴 종이를 진철의 눈앞에서 팔랑거렸다. “잠깐…… 그 기록들은 어떻게 지웠다는 겁니까?” “보험계약 시에 차량번호로 계약을 맺는다는 점을 악용한 거죠.” 차량에는 고유번호인 차대번호가 있지만, 차량번호는 수수료만 내면 언제든지 변경할 수 있다. 그 허점을 이용해 고병훈은 하자 있는 차량을 보험에 가입시켰던 것이었다. 그것도 동네 양아치들의 명의를 빌려 차명으로 말이다. “조직적이라는 거네요…….” “네. 경위님은 이 차량 소유주들의 보험계약 여부를 저에게 알려주시면 됩니다. 성원화재 말고도 여러 곳에서 비슷한 보험계약을 했을 테니까요.” 강준의 기억에 따르면 회귀하기 전까지도 보험사 간의 정보공유 시스템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었다. “음…… 분명히 조직적인 정황이 있네요. 정식 수사에 들어간다면 보험계약 여부는 충분히 알아낼 수 있습니다만…….” “그걸 밖으로 흘릴 수는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무래도요…….” “그럼 이것도 넘겨드릴 수가 없겠군요.” 진철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 경제수사과로 와서 계속 왕따만 당하며 답답한 상황을 겪고 있는 그에게 이번 건은 꽤 달달한 미끼일 터였다. “……서면 자료를 드릴 순 없습니다.” 진철은 한발 물러섰다. “물론이죠. 저도 경위님께 무리한 걸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보험금 지급의 당사자인 저희가 보험사기의 피해를 보지 않게 최대한 협조해 주시면 됩니다.” 강준은 진철의 속내를 훤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수사원칙을 지켜주면서 빠져나갈 퇴로도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근데 저를 어떻게 알고 찾으신 겁니까?” “경제수사 1팀의 팀장이 공식적으로 이진철 경위님 아닙니까?” “그…… 그야 그렇죠.” “책임자와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악수나 한번 하시죠.” 당연한 말을 한 강준이었다.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진철이 강준이 내민 손을 잡았고, 그 순간 강준의 머릿속에는 진철이 오늘 만났던 양아치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 중 한 명이 타고 있는 차량은 제이모터스에서 목격했던 빨간 스포츠카였다. “게임머니나 사기 처먹는 동네 양아치 놈들이 꽤 좋은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네요?” 강준의 말에 진철의 눈빛이 달라졌다. “혹시 제가 수사 중인 게임머니 사기범에 대해서 뭐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재밌네요. 오늘 만난 놈 중에 아마 여기 차량 리스트의 소유주가 있을 겁니다. 그놈을 집중적으로 캐보시는 게 어떠세요?”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강준은 손에 들고 있던 차량 리스트를 진철에게 내밀었다. 진철은 그런 강준을 멍하니 쳐다봤다. 뭐라도 해명해야 했다. “제가 그 정보를 얻은 건 연남 중고차 매매단지의 김용식이라는 놈입니다. 제가 정보를 얻으면서 그 바닥 양아치 중에 게임머니 사기 친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근데…… 그래도 정말 신기하군요. 선생님께서는 제가 오늘 만난 녀석이 스포츠카를 끈다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진철은 의심으로 변한 눈초리로 강준을 바라봤다. “에이! 그거야 감으로 맞춘 거죠. 대부분 그런 짓거리 하는 놈들이 허세로 스포츠카를 많이 타지 않습니까? 그래서 넘겨짚은 겁니다.” “아니, 아까는 분명히 확신에 찬 목소리로…….” “경위님, 어쨌든 오늘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강준은 진철의 말을 잘라버리고는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어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진철의 모습이 강준의 눈에 선했다. * * * 다음 날, 한국보험 연남지사. “성원화재에서 찾아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같은 업계끼리 이런 건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물론입니다. 저희야 이렇게 고급 정보를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죠.” 보험조사과의 담당자는 강준의 방문에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 경쟁사와 정보를 공유하는 경우는 업계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네, 주시면 감사하죠.” 강준이 건넨 차량 리스트를 일일이 찾아보느라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잠시 후, 원두 냄새가 진하게 나는 커피를 가져온 담당자가 강준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이고는 맞은 편에 앉았다. “성원화재에서는 보험조사 부서가 어떻게 움직이나요? 저희는 인원이 부족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하!” 담당자는 강준도 성원화재의 보험조사과에서 나온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 영업부서에서 나왔습니다.” “네? 보험조사과가 아니고요?” 둘 사이에서는 잠시 어색함이 흘렀다. 하지만 한국보험의 담당은 그 어색함을 지우려는 듯 미소를 유지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어떻게 차량 과다 수리 건을 잡으시려는 건가요?” “그게…… 제가 계약했던 계약자가 아무래도 고의사고를 낸 것 같거든요. 그것 때문에 문책도 당했고요.” “아…… 그러시구나…… 어쩐지, 근데 대단하십니다. 보통 그런 일이 있어도 우리 쪽에서는 영업담당자분들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웬만한 보험금 청구액을 가지고는 책임을 묻는 경우도 거의 없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성 보험사기(피해를 과장 또는 확대하여 보험청구액을 높이는 사기) 건이 늘어나는 겁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는 거 때문에요.” 담당자는 강준에게 호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 보험업계가 흐려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보험사들끼리 정기적인 교류 모임이라도 만들어야겠습니다. 하하!” 강준은 그가 말은 시원하게 했지만, 내심 강준의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수많은 차량 보험계약 건들을 괜히 건드렸다가는 일만 많아지고, 성과는 없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담당자의 부하직원인 듯한 사람이 보험계약서를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는 이내 뭔가를 그의 귀에 속삭였다. 담당자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혹시…… 이거 경찰에 보험사기로 신고는 하신 겁니까?” “네, 어제 이미 하고 왔습니다. 한국보험에서도 피해액이 있으시면 신고를 넣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 그럼요. 그래야죠! 보험금 지급이 이미 끝난 건이긴 하지만 반환청구 소송을 해봐야겠네요.”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근데 그 피해를 보신 보험계약 건 제게 공유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담당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시원하게 대답했다. “먼저 정보를 주셨는데 저희도 공유해 드려야죠! 하하!” 잠시 후, 강준은 한국보험의 보험조사관이 건네준 카피 자료를 들고는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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