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기억을 읽는 남자2021.12.01.
강준은 타인의 기억을 읽는 능력을 얻었다. 원래 자신의 몸이 아닌 타인의 몸에 빙의한 이후로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과거로 돌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강준, 그는 동명이인인 또 다른 박강준의 몸으로 빙의했다. 무려 15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서 말이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인가? 문제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식물인간의 몸에 들어왔다는 점이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눈동자. 그에 반해 잔인하게도 또렷한 의식. 박강준은 벌써 몇 달째 병상에 누워 주변을 듣고 보고 느끼고 있었다. ‘아이 씨! 정말! 이제, 그만 일어날 때도 됐잖아……?’ 강준은 몸 주인에게 투정하듯이 중얼거렸다. #1화. 기억을 읽는 남자 강준은 타인의 기억을 읽는 능력을 얻었다. 원래 자신의 몸이 아닌 타인의 몸에 빙의한 이후로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과거로 돌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강준, 그는 동명이인인 또 다른 박강준의 몸으로 빙의했다. 무려 15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서 말이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인가? 문제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식물인간의 몸에 들어왔다는 점이었다. 오로지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 그에 반해 잔인하게도 또렷한 의식. 박강준은 벌써 몇 달째 병상에 누워 주변을 듣고 보고 느끼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병문안을 핑계로 강준의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는 두 놈은 보험사기범들이었다. 한 명은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수리비를 뻥튀기해서 보험금을 타내는 녀석이었고, 또 한 놈은 일명 손목치기로 불리는 차량 고의사고범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는 이는 담당 간호사 송지희였다. 그때, 병실의 문이 열렸다. “어, 여기 다 와 있네…….” “지점장님! 오셨어요?” 보험사기범들과 친근하게 인사하는 사람은 몸의 주인인 박강준의 상사인 정승태 팀장이었다. 성원화재 연남지점장. 강준은 몸의 주인인 28살의 박강준의 기억을 통해 그가 성원화재 연남지점의 영업부에 근무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기서는 지점장이라는 놈이 제일 문제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거나 다름없거든…….’ 병실을 찾은 정 팀장이라는 인간은 보험사기꾼인 두 놈이 뻔히 연성사기(보험금을 더 타내려고 피해를 부풀리는 행위)를 저지른다는 걸 알면서도 묵인해주고 있었다. 그는 영업실적을 올리기 위해 지점의 보험금 지급률이 올라가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었다. 어차피 본사에서는 지점의 영업실적에만 신경 쓴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너희들 좀 보려고 했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다음 주에 감사 나온단다…….” “네? 그럼 우리 좆되는 거 아니에요?” 성격 급한 고의사고범 양태식이 겁먹은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병실에는 아직 간호사인 송지희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정승태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조용히 해! 인마! 태식이 너는 매사에 조심성이 없는 게 문제야…… 쯧!” 간호사는 그런 정승태 일행을 슬쩍 한번 쳐다보고는 수액 조절기를 조절한 후 병실 밖을 빠져나갔다. “수상한 사람들이네…….” 송지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병실 복도로 몸을 돌렸다. 그녀에게 산재 처리 때문에 박강준을 찾아온다는 정승태를 말릴 명분은 딱히 없어 보였다. 간호사가 나가고 나자 카센터 주인인 고병훈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지점장님, 진짜 괜찮은 겁니까? 이거 감사에서 조사하면 우리도 혹시…… 줄줄이 알사탕으로 탈 나는 거 아닌가요……?” 정승태는 소심한 고병훈을 보며 한심한 눈길을 보냈다. “괜찮아, 내가 그 정도도 못 막으면서 지점장 달고 있겠어? 당분간만 자중하면 돼. 병훈이는 감사 끝날 때까지 카센터 휴업하고 있고, 태식이 너는 애들 좀 자중시키고 있어!”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둘은 자신의 밥줄인 정승태 지점장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자신들이 친 사고를 지점장이 매번 수습해주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휴…… 그니까 왜 애를 이 꼴로 만들었어?” 정승태가 환자복 밖으로 드러난 강준의 발목을 팔로 툭툭 쳤다. 그 순간 식물인간인 강준의 머릿속으로 지점장의 기억이 들어왔다. [정 과장, 최 이사님이 조직을 이번에 대대적으로 개편하기를 원하시는 거 알지?] [네, 부장님. 알고 있습니다!] 읽어 들인 기억 속에서 정승태가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성원화재의 인사팀장이었다. 강준은 식물인간이 된 몇 개월 동안 주변인들의 기억을 읽으면서 대략 원래 몸의 주인인 박강준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자네를 추천했으니까 조만간 자리가 한번 마련될 거야…….]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뭐? 최선?] 인사팀장은 갑자기 눈썹을 치켜올렸다. 뭔가 실수한 게 아닌지 흠칫 놀란 정승태는 말을 바꿨다.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팀장님!] 고개를 조아리는 정승태였다. [이봐, 정 과장…… 이사님이 가장 원하는 간부들의 역량이 뭔 줄 알아?] [그야…… 물론 능력 아닙니까?] [능력? 천만에! 능력 있는 놈들은 세고 셌지! 아마 능력 위주였다면 자네한테 이런 기회가 오지도 않았을 거야. 이사님이 원하는 건 오로지 충성! 충성이야!] [……헙! 알겠습니다!] 정승태는 그제야 냉정한 현실을 인지했다. 인사팀장의 말에서 모멸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명확해졌다. 오로지 충성! 충성만 하면 그뿐인 거였다. 정승태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강준은 기억을 읽는 걸 끝내고는 손가락을 미세하게 떨었다. 기억을 읽어 들일 때마다 뇌에 자극이 되는지 손가락 끝이 반응했다. “여기 박강준 이렇게 된 거…… 태식이 네가 아는 사람이라고?” “네, 아는 형님한테 부탁한 건데,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해외에 있는 사람이거든요. 헤헤!” “하여간 박강준 깨어나면 너희나 나나 골치 아프니까 당분간 상태 지켜봐.” “에이, 식물인간인데 깨어난다는 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죠. 저희도 실은 경찰에서 사건 종결한다고 해서 한번 와본 겁니다. 이제 정말 끝이에요. 끝!” 보험사기범이자 친구 관계인 양태식과 고병훈은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 연남 중앙병원 중환자실. 새벽 시간, 문이 드르륵 열리며 홀로 누워 있는 강준에게 간호사가 다가왔다. 매번 강준을 체크하러 오는 간호사 중 한 명이었다. “잘 지냈어요? 박강준 씨!” 송지희는 강준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몇 개월간 강준을 담당하는 간호사였다. 의사는 강준에게 식물인간 판정을 내렸지만, 근래 몇 주간 송지희가 관찰한 강준의 신체 반응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었다. 물론 보고를 받은 의사가 송지희의 의견을 뭉개버릴 정도의 미약한 변화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송지희는 강준의 눈동자가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강준에게 매번 깨어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인사를 한 것이었다. 송지희는 강준의 수액을 교체해주고는 작은 반응이라도 관찰하듯 세심하게 그를 살폈다. 하지만 전에 봤던 손가락 끝의 움직임은 더는 없었다. ‘내 몸에 손을 대야지만 그 사람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거군.’ 강준은 자신이 얻는 능력을 어떻게 해야 사용될 수 있는지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드르르륵. 송지희 간호사가 나가고 나자 강준은 눈동자를 굴려 벽면의 달력을 바라봤다. ―2005년 4월. 벽에 걸린 달력은 강준이 경찰로 살아왔던 2020년 4월로부터 정확히 15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쩌면 강준이 동명이인인 15년 전의 박강준으로 빙의한 건 우연이 아닌지도 몰랐다. 몸의 주인인 박강준은 성원화재의 대졸 신입사원이었다. 어렵게 취업한 그곳에서 그는 보험사기를 의심하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렇게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 근데 박강준을 식물인간으로 만든 바로 그 보험사기범들을 비호하는 배후세력이 성원화재의 최진태 이사였다. 성원그룹 최진태 회장! 15년 후면 성원그룹의 2대 회장이 되어 있을 몸이었다. 그리고 빙의하기 전 강준이 형사과 과장으로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던 대상이었다. 성원그룹 창업자 최창식 회장의 둘째 아들. 친모인 윤미경 감사는 최창식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최진태는 그룹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가리지 않는 놈이었다. 그런 떡잎을 진즉부터 알아보았던 아버지 최창식 회장은 그를 내쳤지만 먹지 못하면 망가뜨려서라도 먹겠다고 달려드는 게 최진태라는 인간이었다. ‘그 새끼는 내 손으로 꼭 잡아넣고 죽었어야 했는데…….’ 강준은 자신이 죽은 것보다 그런 최진태를 어쩌지 못했던 것에 더 화가 났었다. 병상에 누워 가만히 과거를 떠올렸다. 빙의하기 전, 강준은 분명 폐차장에서 죽었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강준은 자신을 죽였던 성원그룹의 사원으로 빙의했다. ‘이쯤 되면 이건 운명이라는 건가……?’ 빙의 전 강준은 최진태를 수사하면서 온갖 압력에 시달렸었다. [야, 박강준! 너 이번에도 사고 치지 말고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해! 알겠어?] 강준은 경찰대 졸업 후 부임한 형사과에서 15년간 개같이 굴러서 형사과 과장 자리까지 올랐었다. 하지만 강준은 처음부터 말 잘 듣는 사냥개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진급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최진태의 외압이 들어와도 강준은 별로 겁나는 것이 없었다. ‘……근데 정말 나를 죽일 줄은 몰랐네! ……개새끼!’ 강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서는 자신을 회유하던 경찰서장이 떠올랐다. [강준아…… 우리 같이 지내온 세월이 15년이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또 바뀔 시간이야.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너나 나나 인생 펼 수 있는 거야! 인마!] [그렇다고 최진태 그 자식이 사기 치고 다니는 걸 눈감아 주라는 겁니까?] [새끼야! 검찰도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뭐라고 나서 인마! 덤비려고 해도 상대를 보고 덤벼야지. 그렇게 막무가내로 아무한테나 짖어? 이 미친놈아!] 어쩌면 그때, 보신주의자인 경찰서장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결국, 강준은 누군지 모를 놈들에게 결박당해 폐차장으로 개처럼 끌려왔으니까. [이해해라, 나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니까.] 칙칙한 점퍼를 입은 놈 중에 그럴듯한 정장을 차려입은 놈이 우두머리였다. 그가 손짓하자 강준이 탄 차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잘 가라! 원망은 최진태 회장한테 하고!] 그놈들은 잔인하게도 강준을 폐차장 압축기에 산채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2020년의 박강준은 죽었었다. 하지만 지금의 강준은 분명 살아 있었다. 아직 식물인간 신세이긴 하지만 말이었다. 강준은 둘의 사고와 죽음이 시공간을 넘나들어 하나로 겹쳐진 거로 생각했다. 그도 아니면 도저히 강준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끼이…… 이이익! 쿠쿠쿠쿵! 퍽! 강준은 자신이 죽었을 때의 순간을 떠올리며 눈을 번쩍 떴다. 식물인간이 된 채로 침대에 누운 신세였지만 압축기에 눌리던 순간이 떠오르니 온몸에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져 오는 것 같았다. 움찔. ‘어? 어라……! 근데 아까부터 느낀 건데…… 오늘은 왠지 감각이 다른데……?’ 강준은 온 신경을 집중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뇌의 신호가 척추의 중추신경을 타고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게 느껴졌다. 또다시 움찔. 강준은 힘을 줘 검지를 구부렸고, 시야에 들어온 자신의 검지가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걸 확인했다. 몸이……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담당 간호사 송지희가 체온계를 들고 다시 병실로 들어오던 찰나였다. 그녀는 강준의 손가락이 확실히 움찔거리고 있는 걸 단박에 알아봤다. “어머! 어머! 박강준 씨! 내 말 들려요?” 송지희는 이번에는 정말로 박강준이 식물인간에서 깨어났다는 걸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