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끝나지 않는 내일 (2)
아버지는 분명 단정한 생김새긴 하지만, 그렇게 특출 나게 잘생긴 사람은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강인한 매력이 있지도 않다.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미인에 후작가의 방계이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예정인 백작가의 외동딸.
티엘라를 수식하는 단어는 하나같이 화려했다. 그만큼 구혼자는 발에 차이도록 많았고, 왕실은 물론 타국 귀족에게서도 구혼장을 받은 적이 있다던 일화는 유명했다.
아주 어릴 적 질문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너희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대답만이 돌아왔었다.
지금은 어떨까?
“내 앞에 무릎을 꿇었거든.”
“네?”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제라니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엘라는 추억에 잠긴 듯 가볍게 눈웃음을 쳤다.
“내가 스물한 살이었을 때였나…. 연회에 새 신발을 신고 갔는데, 그날따라 너무 오래 걸어 다녀서 그런지 발이 아팠지. 얼굴에 티 내는 편이 아니다 보니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그이만이 조용히 질문했어.”
‘혹시, 발이 불편하십니까?’
“회장에 내게 구혼했던 이들이 상당했지만, 눈치챈 건 그 사람뿐이었지.”
진중한 표정으로 묻는 남자의 태도에 순간 당황해, 아니라고 대답할 기회를 놓쳤다. 수작질을 하는 사람을 사교계에서 하루 이틀 만나본 게 아닌지라 경계한 것도 잠시, 유려한 언변에 어느 순간 휩쓸려 있었다.
“그러고는 날 구석으로 데려가서 앉히고는, 거침없이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내 발을 살피더구나.”
이제 갓 작위를 이어받은 젊은 공작.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을 낮출 필요가 하등 없는 남자는 여인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걱정이 가득한 눈동자에는 수치심 같은 건 없는 듯했다.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든 그와 눈을 마주쳤던 순간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그때 생각했지. 누군가와 꼭 결혼을 해야 한다면 이 사람이 좋겠다고. 이 남자라면, 필요한 순간에는 나를 존중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
‘너는 참 티엘라를 많이 닮았어.’
결혼을 앞두고, 가장 최선의 상대를 선택하고자 한 어머니. 방금 전 아버지가 했던 말을 제라니아는 이 순간 완벽하게 이해했다.
아버지의 말대로 자신은 아직 멀었나 보다. 누군가를 온전히 다 알 수는 없는데. 사람에게는 다양한 면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네가 봐도 내가 참, 남편은 잘 만난 것 같지 않니. 일벌레에 가끔 주책이긴 하지만 그이만 한 사람도 없단다.”
약간 사족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애정 어린 칭찬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전히 사이가 좋으신 듯했다.
아버지한테 직접 말씀해 주시면 참 좋아할 텐데. 하기야, 이 또한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일이 아니던가.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식당 문이 열리고, 아이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를 돌아보는 제라니아의 입매가 시원스레 호선을 그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 *
제라니아는 한동안 아이슈파인 영지에 머물렀다.
하는 일이라고는 별것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나갔다가 식사를 하고, 독서를 하다가도 간혹 말을 타고 영지를 둘러보러 나갔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밭이나 강물처럼 너울거리는 녹색의 보리밭, 물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라든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를 구경할 때도 있었다.
가끔은 말을 타다 멈춰서 지평선 너머를 응시하기도 했다. 아주 오랫동안. 말이 푸르릉 울어대고, 그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슬슬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긴 시간을.
많이 지쳐 보이기는 했는지, 아이작과 티엘라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라니아와 함께했다. 맛있는 걸 먹이고, 잠을 재우고, 간간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일주일간 부모님과 조용한 시간을 보낸 뒤, 제라니아는 수도로 다시 올라왔다.
마차의 커튼을 걷자, 창문 너머로 활기찬 시내가 내다보였다. 환한 태양 아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시끄러운 바퀴 소리,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들이나 가끔씩 섞여 드는 음악 소리가 흥을 돋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던 중, 무언가 앞을 지나가는지 마차가 잠시 멈추었다. 밖을 뛰어가던 아이들 중 하나가 제라니아를 돌아보았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이에게 마주 손짓했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화들짝 놀라 아이의 뒤통수를 푹 눌러 인사하는 시늉을 시켰다.
아무것도 아니라서, 그래서 더 귀중한 평화를 뒤로한 채 마차는 다시금 굴러가기 시작했다.
왕궁에 도착하자, 마담 세자르와 시녀들이 제라니아를 맞이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마담에게 제라니아는 평소와 같이 웃어주었다.
“국왕 폐하는요?”
“지금쯤 회의가 끝나셨을 겁니다.”
문제가 어느 정도 일단락된 다음 부모님을 찾아가고 싶다 요청했을 때, 프란츠는 아무런 질문 없이 제 부탁을 들어주었다. 며칠 쉬다 오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가 불안한 듯 저를 살피던 걸 생각하면, 안색이 어지간히도 안 좋았던 모양이다. 휴식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심신이 제법 지쳐 있었다.
제라니아는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궁으로 들어가니 지나가던 시종과 시녀들이 그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국왕의 처소가 있는 복도로 들어선 제라니아는, 맞은편 복도 끝에 보이는 무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프란츠.”
속삭이듯 중얼거린 목소리를 들은 걸까, 그 순간 프란츠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역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움직였다. 빠르게 걸어 서로의 앞에 선 두 사람이 팔을 벌려 상대를 꼭 끌어안았다.
그들 사이에는 안온한 침묵만이 존재했다. 마치, 닿아 있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듯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처럼.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렸다는 말 대신 내어놓은 대답에 작은 웃음소리가 닿았다. 제라니아는 기쁘게 화답했다.
“다녀왔어요.”
* * *
“아이라, 그게 뭐니?”
제라니아는 제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이라의 가슴께에 시선을 두었다.
아이라는 솜뭉치를 닮은 무언가를 꼭 끌어안고 있었는데, 제라니아의 말을 들은 것처럼 솜뭉치가 살짝 들썩였다. 곧이어 작은 얼굴과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야옹.”
아이라의 품에 안긴 채 고양이가 힘없이 울었다. 아직 덜 자란 새끼 고양이였는데, 흙바닥에 오래 구른 것처럼 털은 얼룩덜룩하게 뻗쳐 있었고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고양이!”
냉큼 대답하는 아이라의 등 뒤에서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듯했다.
“그래, 제니스가 드디어 고양이로 변신한 거니?”
같이 놀고 있던 제니스는 어디로 갔냐고 돌려 묻자, 아이라는 정색했다.
“어머니, 무슨 소리야. 젠이 이렇게 귀여울 리 없잖아.”
“그…렇구나.”
“젠은 아버지를 부르러 갔으니까! 곧 올 거야.”
아이라는 히죽 웃었다. 제라니아는 무릎을 굽혀 아이라와 시선을 맞추고, 다정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왜?”
“고양이랑 같이 있고 싶은데, 허락을 받아야 한다잖아. 그래서 나는 어머니, 젠은 아버지를 찾아오기로 했어. 허락해줄 거지?”
“아니, 잠깐만. 아이라.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잖아. 대체 고양이를 어디서 데려온 거니?”
“울고 있길래 데려왔어!”
제라니아는 힐끔 아이라를 수행하던 시녀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숲 근처에 고양이가 쓰러져 있는 걸 두 분께서 발견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더러우니 이만 내려놓으시라고 말씀드렸지만, 꼼짝하지 않으십니다.”
자세히 보니 고양이의 몸통에 천이 돌돌 감겨 있었다. 그에 대해 묻자, 아이라가 데려왔을 때부터 배에 커다란 상처가 있어 간단한 처치를 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시녀들은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상당히 떨떠름했다.
귀하게 키운 왕녀님이 왜 저런 더러운 길고양이를 애지중지 보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상전 앞에서 그런 생각을 내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아직 아가인 것 같은데…. 어미는 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나중에 어미가 나타나면 얘기해줘요.”
보통 이런 경우 근처에 어미가 있을지 모르니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지만, 상처를 입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처치를 하지 않았다면 생명이 위험했겠지.
제라니아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아이라를 돌아보았다.
“키우고 싶니?”
“응!”
“그럼 그러자. 혹시 어미가 오면 그 애도 같이 데려오고.”
프란츠야 적당히 자신이 설득하면 되겠지. 동물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원한다는데 끝까지 안 된다고 할 성격은 아니다.
더럽고 꼬질꼬질한 고양이를 마치 보물처럼 끌어안고, 아이라는 신나게 종알거렸다.
“젠한테도 안아보라고 했는데, 걔는 손대기가 무섭다고 해서, 그냥 내가 안고 있기로 했어. 씻어야 하나 했는데, 고양이는 물을 무서워해서 좀 기다려야 한대. 근데 얘는 외로운가 봐. 내려놓으려고 하면 계속 울거든. 그래서 계속 안아줬어.”
나 잘했지? 칭찬해 달라는 듯 눈망울을 아롱거리는 아이라에게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했네. 고양이를 계속 안고 있었는데 힘들지는 않았니?”
“팔이 좀 아프지만 괜찮아. 아픈 사람은 꼬옥 안아주는 거랬어!”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어린아이는 어른보다 정직하다. 그만큼 좋고 싫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깨끗한 것만을 보아온 사람은 자연히 더러운 것을 꺼리는 법이다.
그런데도 거리낌 없이 고양이를 안아 들고 의사를 찾았을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묘했다.
‘내가 먹는 걸 나누어 주면 안 되는 거야?’
‘그럼, 내가 더 많이 가지면 돼? 모두한테 나눠 줄 수 있을 만큼, 내가 가진 게 많아지면 되는 거지?’
언젠가 아이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니 더욱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맑게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조용히 질문했다.
“아이라. 아이라는 무엇이 되고 싶니?”
아이라는 즉시 대답했다.
“고양이.”
“응?”
“고양이가 돼서 나란히 햇빛 아래에서 뒹굴뒹굴할래~! 요리사도 하고 싶고, 왕도 되고 싶고, 또….”
아이다운 대답에 시녀들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지만 제라니아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저 제 딸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할 뿐.
손가락을 접어가며 꿈을 나열하는 아이의 얼굴에는 미래를 향한 희망이 가득했다. 이 아이는 분명 자신보다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세상이 오도록 힘써 노력할 테니.
언제나 기쁜 일만 있지는 않으리라. 슬프고 괴로운 일도, 가끔 견디기 힘든 시련도 다가올지 모르지.
이번처럼 소중한 누군가의 죽음을 딛고 나아가야 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그래도, 아직 나는 살아 있으니까.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니, 이 슬픔 역시도 과거가 되어 내 삶의 일부를 이루겠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 먼 훗날, 후회하지 않고 살았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내 사랑스러운 아이야. 너 역시도 그렇게 살아가길.
저 멀리서 제니스의 손을 잡고 다가오는 프란츠를 발견하고, 제라니아는 그제야 살포시 웃었다.
손을 내어 아이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기분 좋은 듯 곱게 휘어지는 푸른색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구김살 없이 환하게 웃는 아이를 보니 이상하게도 목이 메었다. 한평생 신을 믿어본 적이 없는 여인은 이 순간, 간절히 기도했다.
아아, 신이시여. 당신이 정말 실재한다면.
“그래,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거야. 네가 원한다면.”
부디, 이 작은 미래의 앞날에 축복을.
<완결>
by.[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