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69화 (170/171)
  • 제169화. 끝나지 않는 내일 (1)

    소복하게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왕궁 내에서 일어났던 반란이 끝나니, 어전은 물론이고 궁의 복도와 바깥에도 시체가 즐비했다.

    새하얀 눈송이들은 풀밭으로, 나무와 지붕으로, 종래는 산처럼 쌓여 있는 비극까지도 내리덮어 그들을 추모했다.

    프란츠는 반란을 진압하자마자 비밀 통로로 병사들을 보냈고, 그들은 숲을 뒤져 쓰러져 있던 기사들을 찾아냈다.

    제라니아를 호위하던 여섯 중 셋은 숨이 끊어진 상태였고, 비앙카를 비롯한 셋은 다행히도 생명을 건졌지만 추운 외부에 장시간 방치되어 있었던 탓에 상처에 동상까지 겹쳐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제라니아는 숲 언저리에서 돌아온 병사들과 무사히 합류했다. 아직 살아 있는 기사들을 인계하고, 시신을 살피는 와중에도 말없이 죽은 이들의 곁을 지키는 여인의 얼굴은 모든 감정을 씻어내린 듯 초연했다.

    국왕은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것으로 본보기를 보였다. 여기에는 이미 죽은 이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트라이탄을 지키고 있던 네이선 휴스타인은 수도에서 보낸 병사들을 상대로 끝까지 저항했으나, 아버지와 형들의 시신을 돌려주고 다른 이들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는 제안에 결국 항복의 깃발을 달았다.

    한편, 루이스 케라온 역시 살아남았다. 나무 위에 번데기처럼 꽁꽁 묶여 있던 그는 ‘우연히’ 길을 지나가고 있던 에스파 후작의 수하들에게 구출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은 전부 참수했으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왕국의 북쪽과 동쪽을 다스리는 수장들이 사라진 지금,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조속히 새로운 영주를 뽑아야 했다.

    이를 위해 국왕은 조용히 살아남은 잔당 세력들과 협상을 시도했다.

    루이스 케라온은 오랜 협상 끝에 국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새 영주 곁에서 클라단의 자문을 담당하기로 했고, 네이선 휴스타인은 이를 거절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눈을 오래 맞아서일까, 왕비는 지독한 열병에 쓰러져 한동안 앓았지만 곧 훌훌 털어내고 일어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피로 물들어 비릿한 냄새가 만연하던 어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치워졌고, 사람들은 다시금 왕궁으로 돌아왔다.

    시간의 흐름은 반란이라는 큰 사건조차 역사서에 기록될 한때의 사건 정도로나 여겨지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춥고 춥던 겨울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봄이 다가오는 것을 상징하듯 날이 좀 풀려갈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비님. 몸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아이작은 모처럼 찾아온 딸을 향해 부드러운 웃음을 내보였다. 그들은 잘 꾸며져 있는 정원 내를 거닐고 있었다.

    초록색 잎사귀들이 제법 달려 있는 나무들이 가지를 아래로 드리웠고, 곳곳에는 꽃봉오리가 움텄다. 청량하고 맑은 분위기를 가진 정원은 벽들이 둘러싸고 있어 바깥보다 훨씬 따뜻했다.

    남쪽 경계에 자리한 아이슈파인 후작령은 왕국에서 가장 빨리 봄이 찾아오는 장소 중 하나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걸 보니, 봄이 다가오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

    “알겠다, 알겠어. 녀석 성격하곤.”

    곧장 존칭을 거두며 아이작은 눈을 찡긋했다. 나이가 든 것을 증명하듯 머리가 전보다 허옇게 세긴 했지만, 그는 나름대로 기운이 넘쳤다.

    역시 사람은 일을 그만둬야 건강해진다며 뼈가 있는 농담을 던지는 아이작의 시선이 다정했다.

    “수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소식은 들었다. 많이 바빴겠구나.”

    아이작은 덤덤한 투로 말했다. 아론 휴스타인과 친하게 지냈던 만큼 그에게도 이 소식은 제법 쓰게 다가왔을 터다.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제라니아는 기꺼이 존중하기로 했다.

    “미루기만 해서는 때를 놓치지 않을까 해서요. 뵐 수 있을 때,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비를 너무 나약하게 보는 거 아니냐. 앞으로 30년은 끄떡없단다.”

    부러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아이작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뭘 묻고 싶길래 그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냐.”

    “왜 언니의 부탁을 들어주셨어요?”

    조용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질문이 아이작의 입가에서 미소를 살짝 지워냈다. 부모 눈에 자식은 아무리 커도 늘 어려 보인다고 하던가.

    자신보다 한참 작은, 어린 시절과 다를 것 없이 올곧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아이작은 상념을 털어냈다. 나이를 먹으니 쓸데없는 생각이 다 드는구만.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난, 그 애보다 네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

    이번엔 제라니아가 놀랄 차례였다.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딸에게 아이작은 당연한 것을 말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는 나를 많이 닮았으니까. 결혼한다고 했을 때는 놀랐지.”

    제라니아는 입을 달싹였다가, 도로 다물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겨우 소리를 쥐어짜 냈다.

    “아버지, 전. 사실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은 아니라는 뜻으로 들리는구나.”

    예리한 지적에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 폐하를 사랑하니까요.”

    사랑을 말하는 목소리는 담담했고, 그래서 더 진심이 담긴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분께 귀속되고 싶지는 않아요.”

    아이작의 손이 나무 위에 닿았다. 거칠고 단단한 나무의 겉피를 거슬러, 살짝 벗겨져 있는 속살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제게는 저의 인생이 있으니까요. 저를 부르는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 안의 저는 언제나 제라니아 바이첸인 것처럼요.”

    이름을 읊을 때, 유독 힘을 주어 강조하는 모습에서 고집스러운 면모가 엿보였다.

    제 딸은 언제나 그랬다. 욕심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중심이 분명하고, 늘 남들에게 양보하면서도 가장 중요하다 여기는 것만은 타협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올곧아 가끔 그 마음이 꺾이고 상처 입는 날이 올까 봐 늘 조마조마했더란다.

    “언젠가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죠.”

    ‘네가 남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이작은 기억을 더듬었다. 둘째 딸의 총명함을 눈치챘을 당시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때 제라니아의 표정은 어땠던가.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후로 제라니아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늘 반짝이던 녹색 눈동자가 상처받은 것처럼 일렁였기 때문에.

    “하지만 아버지, 제가 여자인 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제가 여자든 남자든, 원하는 걸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아이작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그래서 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꾸만 입 안이 마르는 감각에도 제라니아는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제 세대에서는 아니더라도, 제 이후에는 그런 세상이 올 거예요. 남녀를 가르는 경계가 지워지고, 여인이 원하는 옷을 입고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세상이 말이에요.”

    신분의 차이 역시도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다. 분명히.

    “싸우는 것보다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억울한 죽음에는 정당한 책임을 부과하며, 누구라도 보호받을 수 있는.”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르겠지만, 언젠가는 다가올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저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변하고자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희생을 당연하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말을 다 꺼내고 나니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후련하기도 하고, 반응이 두렵기도 했다. 긴장으로 자꾸 움츠러드는 어깨를 똑바로 펴고 당당하게 시선을 들었다. 꽁꽁 싸매어 감춰두었던 속살을 내보인 기분이 이럴까.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이작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운 길을 가려 하는구나.”

    “…….”

    “하긴. 너는 늘 그랬으니, 여전하다 해야 할까.”

    아이작이 천천히 걸어 제라니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제라니아는 몸이 굳었다.

    “고민이 많았겠구나.”

    주름지고 따뜻한 손이 제라니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다정한 손길을 받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속이 울렁거렸다.

    “제라니아.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거라.”

    아이작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멋쩍은 이야기를 꺼내기 전 보이는 버릇이었다.

    “미루기만 해서는 때를 놓친다고 했던가….”

    문득 그는,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이렇게 자식들을 안아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엄격한 아버지로 산 세월이 너무 길었다.

    책임과 의무에 치중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모든 걸 내려놓고 나니, 그제야 보이는 게 있었다.

    “그거 아느냐. 칼리아도, 프레드릭도, 코델리아도, 그리고 너 역시도, 충분히 내게는 자랑스러운 자식이란다. 티엘라도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일 테지.”

    낯간지러운 말을 꺼내는 건 영 익숙하지 않아 그런지 괜히 코끝이 찡했다. 말을 고르는 듯 아이작은 잠시 머뭇거렸다. 제라니아의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들 하지 않더냐. 너는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그래도 괜찮아. 설령 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렇더라도 우리가 널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을 테니.”

    그 말을 듣고서야, 제라니아는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아.

    사실은 그랬다. 사실은, 이런 자신을 인정받고 싶었다. 내가 여성이어도, 머리가 좋지 않아도, 착하지 않아도,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아니라고 부정해도,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간다고 해도.

    그냥 이게 나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 주길 바랐다.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제라니아는 살짝 팔을 들어 아버지를 밀어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네, 저도 사랑해요.”

    붉어지는 눈시울을 애써 억누른 채 활짝 미소 지었다. 아이작은 대견하다는 듯 제라니아의 어깨를 토닥이다가 손을 거두었다.

    “시간을 내어 네 어머니와 한번 수도에 올라가마. 티엘라가 전하들을 뵙고 싶다고 나를 긁어대고 있으니.”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애정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면, 너는 참 티엘라를 많이 닮았어.”

    “제가 어머니를요?”

    “그럼.”

    의뭉스런 웃음을 보이는 아버지를 제라니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네 남매 중 가장 어머니를 닮지 않은 사람을 고르라면 다들 두말없이 자신을 선택할 텐데.

    이유를 물어봤지만, 너도 아직 한참 멀었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어휴, 무슨 산책을 이리도 길게 해요? 아직 날이 쌀쌀한데.”

    정원에서 돌아온 두 사람을 티엘라가 반갑게 맞이했다. 새침하게 말하는 아내에게 아이작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생사를 의논하다 보니 길어지더군.”

    “아이고, 그랬어요? 보나 마나 아무렇지 않은 척 굴려다가, 감성에 젖어서 분위기나 실컷 잡았겠지요. 당신 특기잖아요.”

    정답이었다.

    “…그! 내가 언제 그랬소, 부인.”

    점잔을 빼면서도 민망한지 시선을 피하는 아이작의 귓가가 붉었다. 보다 못한 제라니아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냥,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좀 했어요.”

    “어머나, 그래? 할 말이 많았나 보구나. 그런 거면 더 늦게 들어와도 됐는데.”

    “티엘라, 당신. 방금 전이랑 너무 태도가 다른 거 아니요?”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한껏 휘는 아이작을 보고도 티엘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 나라의 왕비와 일도 안 하고 한가하게 지내는 한량이 같나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맞다, 제라니아. 오랜만에 식사하고 가렴. 네 아버지가 저래 봬도 널 무척 기다렸단다. 나도 마찬가지고.”

    “네, 물론이죠.”

    제라니아는 재빨리 대답하고 힐끗 아이작의 눈치를 보았다. 병 주고 약 주는 게 이런 걸까. 가만 보면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조련당하는 것 같다.

    “난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지.”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사라지는 남편의 등을 보며 티엘라는 쯧쯧 혀를 찼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바로 보이는 넓은 식탁에 세 사람분의 그릇과 식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중심에는 빵이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제라니아의 맞은편에 앉은 티엘라가 다정하게 말했다.

    “나머지 음식은 네 아버지가 오고 나서 부르자꾸나.”

    “네.”

    “국왕 폐하께서도 오셨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하는 모습이 역력한 티엘라를 보며 제라니아는 겸연쩍게 웃었다. 미남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성정을 생각하면,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코델리아의 지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그간 떠올리지 못했던 의문 하나가 의식 위로 떠올랐다.

    “어머니,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렴.”

    “어머니는 왜 아버지랑 결혼하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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