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어느 페이지의 마지막 (5)
그는 갑옷을 착용한 후 그 위에 새까만 로브를 걸쳐 입었다. 천으로 코와 입을 덮은 뒤 투구를 썼다. 앞장서서 반란을 돕고 왕실에 충성하기로 맹세한 검으로 왕국의 병사들을 베어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이자고 결심했던 만큼, 패전한 것에 충격받지는 않았다. 다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샤를로테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다고 이미 결정된 전세가 바뀌지는 않을 텐데요!”
치열하게 맞붙은 검들 사이로 끼기긱,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있는 힘껏 힘을 주어 검을 밀어낸 크리스토퍼가 샤를로테의 다친 어깨를 노렸다.
샤를로테는 비스듬히 검을 올려 공격을 흘려보낸 뒤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헉, 허억….”
그의 숨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거칠었다. 지압해둔 허벅지에서 다시 피가 흐르고, 어깨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지 다른 쪽보다 살짝 내려와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이제 와서 저쪽에 빌붙겠다는 건가.”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하압!”
몇 번의 합이 더 오갔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대련할 때보다 감각이 첨예했지만 그 이상으로 틈이 없었다. 잘 벼려진 칼처럼 둘은 신중하게 움직였고,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물론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대치 전부터 이미 피투성이였던 샤를로테의 호흡이 점차 가빠지는 것이 그 증거였다.
누구보다 샤를로테의 기량을 인정하는 만큼, 크리스토퍼는 정말로 눈앞의 상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그만 멈추는 게 어떻겠습니까.”
“…….”
“가문에 충성하는 당신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더 이상은….”
“시끄러워!”
샤를로테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선연한 감정이 그의 얼굴 위로 피어올랐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는 거지?”
늘 정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차분하고 단정한 기사. 샤를로테 케라온을 수식하는 단어로 꼭 알맞은.
“충성이라고? 고작 그런 단어 따위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내가 있을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런 그가 처음으로 화가 난 듯 고함을 내지르는 것에 크리스토퍼도, 제라니아도 깜짝 놀랐다.
샤를로테는 주먹을 쥐고 제 가슴을 계속, 계속 세게 내리쳤다. 뭉쳐 있는 답답함이 채 가시지 않아 괴로운 사람처럼.
“나로서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렇기 때문에 매달릴 수밖에 없어!”
아무리 저를 홀대한다 한들, 케라온은 제 뿌리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한순간에 등을 돌릴 수 있을까. 검을 다룰 줄 알았기에 인정받았고,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어떻게든 온전히 자신으로서 서기 위해 샤를로테는 단련하고 또 단련했다. 여인이 아닌 기사가 되어야 했다.
틈을 보인다면 아버지가 제게서 그것을 쉽게 거둘 수 있다는 걸 알아서, 어떻게든 쓸모 있고 내세울 만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검을 휘두르고 있자면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돌아오니까. 똑같은 도구라면 먼지 쌓인 장식품보다는 전장에서 휘둘러지는 실용품이 나았다.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라고? 무력이 모든 것을 해결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한평생 검만을 쥐어왔는데, 강해지는 것을 추구했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놓으라고 말하면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그간의 제 인생은 무엇이었을까.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평생 동안 소속되어 있던 집단에서 외면당하는 고통, 그 소외감. 루이스가 숱하게 견뎌왔던 것. 곁에서 지켜봤기에 더더욱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았다.
짐승이 포효하는 것처럼 절규하던 샤를로테가 휘파람을 불었다. 빙빙 돌던 매가 아래로 날아들었다.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 샤를로테를 막아내던 크리스토퍼는 귓가로 다가오는 섬뜩한 소리에 순간 집중을 놓쳤다. 촤악, 살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옆구리를 강타하는 고통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자세가 무너진 크리스토퍼의 뒤통수를 예리한 발톱이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꿱!”
제라니아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은 매가 휘청거렸다. 샤를로테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컥….”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크리스토퍼는 샤를로테의 복부에 있는 힘껏 검을 찔러 넣었다. 피가 튀고, 살갗을 베어내는 감각이 손끝에 달라붙었다.
샤를로테가 쥐고 있던 검이 땡그랑,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함께 샤를로테의 두 다리가 풀썩 꺾였다. 무릎을 꿇은 상태로, 샤를로테는 꿀렁 피를 토해내는 뱃가죽을 떨리는 손으로 감쌌다. 몸이 바닥으로 풀썩 꺾이고, 얼굴이 바닥에 닿았다.
그 모든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는 제라니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씁쓸한 중얼거림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했던 말이 아니었는데.”
당신한테는 그렇게 들렸던 거구나.
“제리!”
제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히는 크리스토퍼의 숨소리가 꽤 거칠었다. 제라니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마주 보았다.
“너 대체, 어떻게 여기에.”
“저 사람을 따라왔어.”
중간에 한 번 놓칠 뻔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들을 발견한 게 천운이었다. 점점이 이어진 핏자국의 흔적이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친 데는 없지?”
제라니아는 재빨리 까진 손바닥을 가리기 위해 주먹을 쥐었지만, 크리스토퍼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이거….”
“별거 아니야. 나보다 네가 더 문제지. 구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왜…?”
왜 날 구했어?
“하고 싶은 일에 충실하기로 했어. 그것뿐이야.”
무뚝뚝하게 대답한 크리스토퍼가 제 옆구리에 닿는 시선을 느끼고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
“헛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제라니아는 다시금 제 드레스 밑천을 쭉 찢어냈다. 그 천으로 크리스토퍼의 허리를 몇 번 둘러 감은 뒤 최대한 힘을 주어 묶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제라니아가 쓰러져 있는 기사들에게로 다가갔다. 손가락을 코밑에 대어보니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치명상은 피한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통로에 그냥 숨어 있는 게 나았을까.”
혹시 뒤에서 추격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움직이는 게 낫겠다 판단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글쎄. 무슨 일이 생겼을지 알 수 없지.”
자책하는 제라니아의 곁에서 크리스토퍼가 조용히 위로했다. 그는 다친 부위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태연한 척하지만 안색만 보아도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한편, 석상처럼 고꾸라져 있는 샤를로테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허리춤에 있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단도를 꺼내는 그의 손끝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일단 숲을 나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겠어.”
제라니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살짝 기운 것을 보아 조만간 지원군이 도착할 듯했다. 저 멀리서부터 몰려오는 회색 구름들이 녹색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휴스타인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군법으로 냉정하게 다스려야 할 일이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자신을 구해줬다. 이 경우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게 처벌에 참작이 되나? 하지만, 크리스토퍼 본인이 정말 그런 걸 바랄까?
생각을 거두고 제라니아는 숲의 출구를 향해 돌아섰다.
그 순간이었다.
제라니아는 등 뒤에서 자신을 감싸는 커다란 몸에 흠칫 굳었다. 푹, 무언가가 꽂히는 소리가 났다. 불길한 예감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크리스토퍼를 올려다보았다.
“크…리스?”
크리스토퍼는 웃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꼿꼿이 세워져 있던 샤를로테의 몸이 허물어지는 것이 그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크리스토퍼의 어깨에 꽂혀 있던 단검에서 피가 흘렀다. 화끈한 고통이 전신을 두드리는 감각과 함께 그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크리스!”
제라니아는 허둥지둥 손을 뻗어 크리스토퍼를 반듯하게 뉘였다. 검을 뽑아내자 상처는 옅었지만, 나오는 피가 검었다.
독인가.
사람을 불러와야 했다. 이대로라면 그 역시 핀처럼….
“가지 마.”
움직이려는 제라니아의 손목을 크리스토퍼가 덥석 붙잡았다.
“……그냥 여기 있어줘.”
기운 없는 목소리로 애원하는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끝을 예견한 것처럼.
“시간이… 아까워.”
그 말을 증명하듯 그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던 제라니아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붙들고, 제 무릎 위로 올렸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며 크리스토퍼는 흐릿하게 웃었다.
“…너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야. 겨우 소원을 이뤘네.”
차갑기만 한 바닥과 화끈하게 번지는 어깨의 통증이 대비되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독이 퍼지는 속도가 생각보다도 빨랐다. 너스레를 떨면서도 숨통을 틀어쥐는 감각에 그는 고통스럽게 숨을 토해냈다.
“이게 내 최선이라 미안해.”
힘없이 제 모순을 인정하던 크리스토퍼는 얼굴에 닿는 따뜻한 물기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깨끗하고 맑은 녹색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리…?”
“너무, 화가 나.”
울컥 치미는 감정들이 제라니아의 말끝마다 번져 나왔다.
“왜…. 너까지, 너까지 이렇게 되고 마는 거야?”
울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나보다 더 아픈 건 너일 텐데, 당사자인 너조차 울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런데도 눈물이 멎지 않았다. 염치없게도.
“왜, 네가, 샤를로테 경이, 나는, 어째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걸까. 왜, 죽고 죽여야만, 하는 걸까. 너무 분해.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너무 분해!”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까. 내가 어리석어서, 그래서 막지 못했나. 좀 더 나은 길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나? 정말로?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셀리나가 죽었을 때도 핀이 죽었을 때도, 계속해서 고민했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할까. 어째서 막지 못한 걸까.
왜 너까지 이렇게 보내야 하나.
자신의 무력함이 이 순간 너무 서글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제리.”
크리스토퍼는 천천히, 멀쩡한 어깨에 붙어 있는 팔을 움직여 제라니아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피로 범벅인 손가락이 하얀 피부에 상흔과도 닮은 붉은 자국을 남겼다. 다정한 목소리가 상대를 달랬다.
“울지 마.”
더듬더듬 입을 열면서도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육신이 느껴졌다. 크리스토퍼는 애써 태연하게 웃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냥,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야.”
언젠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는 크리스토퍼의 눈빛에 온기가 서렸다.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돼. 그런 건 전부 내가 끌어안고 갈 테니.
아버지와 동생을 볼 낯이 없었지만, 그 정도는 각오하고 벌인 일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직접 보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 여겼고, 거기까지 생각하니 자신이 우스웠다. 모순투성이인 자신을 어쩌면 좋을까.
셀리나, 내 가엾고 소중한 동생.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마법사들이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영혼이라는 게 있다고들 한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좋을 텐데. 드디어 네게 용서를 빌러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슬슬 눈꺼풀을 들고 있는 것도 힘이 부쳤지만, 크리스토퍼는 끝까지 제라니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군가, 죽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들어줘. 네가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쿨럭.”
비릿한 맛이 입 안에 번졌다. 그가 토해낸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져 검게 뭉쳤다. 제라니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응, 그럴게. 그럴 거야.”
“염치없지만, 나를…. 기억해줄래?”
“…물론이지.”
제라니아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얼굴에 묻었던 피와 섞여 붉은 눈물이 되었다. 그게 못내 안타까워 크리스토퍼는 손을 올리고자 했지만 몸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많이 울지는 말고, 잘 지내. 하고, 싶은 거, 마음껏 다 하고…. 최대한 늦게 와. 먼저 가… 있을게.”
감각이 무뎌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흐려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설령 세상 모두가, 널, 탓한다 해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 크리스토퍼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니까.”
영원히.
크리스토퍼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 평온하게 눈을 감은 그를 제라니아는 다시금 불러보았다.
“크리스?”
몇 번을 불러 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멍하게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제라니아의 뺨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회색 구름이 가득 몰려든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풀나풀 춤추는 눈송이가 쓰러져 있는 기사들과 샤를로테의 시신,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은 크리스토퍼의 시신에 내려앉았다.
제 몸을 뒤덮듯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제라니아는 크리스토퍼를 끌어안고 숨죽여 오열했다. 피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슬픔을 가슴이 찢어지는 감각과 함께 받아들였다.
소중했던 유년의 한 페이지를, 그렇게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