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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67화 (168/171)
  • 제167화. 어느 페이지의 마지막 (4)

    “이야압!”

    비앙카가 검을 휘두르자, 샤를로테는 사뿐히 물러서 그 검을 피했다. 다른 기사의 공격을 피한 샤를로테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짧은 단검을 가차 없이 상대의 목에 박아 넣었다.

    촤악,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기사의 몸이 종이로 된 인형처럼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둔탁하게 부딪힌 몸이 옅은 흙먼지를 날렸다.

    “율리안!”

    “잠깐, 멈춰!”

    비앙카의 만류에도 기사는 용감하게 샤를로테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가슴을 베어내려는 검을 막아낸 샤를로테가 슬쩍 공격을 흘린 뒤 옆으로 돌아 기사의 등을 푹 찔렀다.

    제 몸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곧장 뒤로 돌아선 샤를로테의 손이 검을 휘두르려는 기사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힘으로 떨쳐내려는 순간 샤를로테는 있는 힘껏 그의 급소를 발로 찼다.

    “컥!”

    힘이 빠진 틈을 타 샤를로테는 날렵하게 단검 하나를 더 꺼내 기사의 목을 그었다. 그가 좌중을 슥 훑었다.

    남은 건 셋.

    “물러서라, 내가 나서겠다!”

    비앙카는 검을 고쳐 잡고 샤를로테를 노려보았다. 샤를로테는 무감한 눈으로 그런 비앙카를 마주 보았다.

    고요해진 가운데 휘잉, 바람이 불었다.

    샤를로테가 바닥을 있는 힘껏 딛고 뛰어나갔다. 시야로 훅 들이치는 날카로운 검을 정면으로 맞받은 비앙카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한참 힘겨루기를 하다가, 서로 검을 올려 친 다음 뒤로 물러섰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을 요란하게 울렸다. 그사이 비앙카의 검은 샤를로테의 허벅지를 그었고, 샤를로테의 검은 비앙카의 팔을 그어냈다.

    피가 뚝뚝 떨어지며 고통이 엄습하는데도 둘의 움직임에는 빈틈이 없었다.

    비앙카가 막고 있는 동안 여기를 빠져나가야 했다. 제라니아는 기사들과 함께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칫!”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샤를로테가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하늘 위를 빙빙 돌던 매가 곧장 제라니아가 있는 쪽을 향해 낙하했다.

    번뜩이는 부리가 제라니아의 머리를 덮치려는 순간, 기사 하나가 검을 휘둘러 매를 쫓아냈다.

    “어서 가십시오!”

    비앙카는 몸을 숙여 샤를로테의 앞으로 파고들었다. 예리한 칼날이 상대의 가슴을 세로로 그었다. 베었다, 라고 확신하는 순간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없는 것에 비앙카는 숨을 들이켰다. 곧, 복부에 차가운 고통이 엄습했다.

    쿨럭, 피를 토해내며 비앙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베어진 부위에서 빠르게 번져나간 피가 가죽을 흠뻑 적셨다.

    “왕비님에게, 손대…지, 마라.”

    바닥에 쓰러진 채 피를 철철 쏟으면서도 비앙카는 있는 힘껏 읊조렸다. 샤를로테는 그런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어, 멀어지고 있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급한 대로 갑옷 안쪽에 입고 있던 셔츠에서 팔이 있는 부위를 찢어냈다. 긴 천으로 상처를 지압하듯이 묶은 다음, 샤를로테는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헉, 헉….”

    얼마나 더 달려야 하는 걸까.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들어오는 감각이 선연하다. 호흡이 가빠지고, 발걸음 역시 점점 무거워진다. 목이 타는 감각에 자꾸만 침을 삼키게 된다.

    제라니아는 비 오듯 떨어지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뛰어갔다.

    쌀쌀한 공기에 얼굴이 건조하게 당겼다. 손끝이 얼어가는 감각에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무릎 아래까지 치맛단을 찢어낸 덕에 달리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경악하는 기사들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체면보다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런 그들에게 내려온 보상처럼, 저 멀리 밖으로 나가는 길이 보였다. 숲의 출구가 코앞이었다.

    “으악!”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기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뒤를 돌아보자, 등에 검이 박힌 채 쓰러진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역시도.

    다른 기사 하나가 샤를로테에게 달려들었으나 달리느라 힘이 빠진 상태인지라, 쉽게 그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제라니아는 쉽사리 뒤돌아 뛰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등을 돌린 순간, 끝장일 것 같아서.

    “발이 빠르시군요.”

    당신만 할까. 저렇게 상처를 입고도 자신을 따라잡았다는 게 놀라웠다. 날렵하고 빠른 건 몸놀림만이 아닌 듯했다.

    제라니아는 호흡을 고르며 아주 천천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샤를로테 역시 성큼 다가왔다.

    “왜, 이렇게까지 날 쫓아오죠? 무엇을 위해?”

    샤를로테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은 것을, 제라니아는 놓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렇구나.”

    프란츠는 무사하다. 반란에 승기가 있었다면 그들의 중추 중 하나인 이 사람이 여기까지 왔을 리 없으니까.

    자신을 노린다면 그건 아마도 인질극을 염두에 둔 거겠지. 아니, 정말 그런가?

    묘하게 어두운 샤를로테의 눈동자를 본 순간 제라니아는 직감했다.

    “…날 죽일 셈이군요.”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졌다. 샤를로테의 손에 들린 피 묻은 검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가씨, 샤를로테의 검을 조심하게. 그것만 피한다면 아가씨는 꽤 오래 살 거야.’

    오래 전에 들었던, 먼지 쌓인 예언의 한 귀퉁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건 지금의 이 상황을 뜻하는 거였나.

    고개를 저었다. 예언 같은 건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떨리는 손을 감추려 등 뒤로 뒷짐을 졌다.

    성큼 다가오는 죽음의 손길이 보인다. 단정하게 걷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제라니아는 아주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도망갈 수 있을까? 이 사람한테서.

    “기왕 이렇게 된 거, 묻고 싶어요. 꼭 이렇게 해야만 했나요? 이렇게 검을 겨누는 것만이, 당신들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나요?”

    아마 불가능하겠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떨림이 점점 잦아들었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니까, 무섭지 않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인데.”

    그 말을 들은 샤를로테가 걸음을 멈췄다. 제라니아 역시도 조심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나는 경이라면 분명 이런 일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루이스 공자처럼요.”

    샤를로테는 가만히 눈가를 실룩였다. 제라니아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루이스 공자는….”

    “운이 좋다면 살아남겠고, 아니면 죽을 겁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긴 하다는 건가.

    “이 와중에도 남을 걱정하다니, 대단하시군요.”

    두렵지 않습니까. 내재된 뜻을 읽어내고 제라니아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면 안 되나요?”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곁눈질하는 제라니아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울렸다.

    “나는 죽기 싫지만, 저들이라고 죽고 싶어서 나를 감싼 건 아니겠죠.”

    도망가고 싶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을 나갈 수 있을 텐데. 병사들이 올 때까지 버텨야만 하는데.

    “난, 그저…. 조금이라도 더, 누군가가 죽지 않아도 되는 길을 선택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나. 때아닌 한탄을 겨우 입 안으로 삼켜냈다. 그런 제라니아를 의뭉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샤를로테가 입을 열었다.

    “왕비님, 당신은 저를 대단하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 끝에 못다 한 말이 이어졌다.

    “제게서 그것을 빼앗아가려 하는 건, 바로 당신이지 않습니까?”

    아리송한 말에 제라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샤를로테는 더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는지 사뿐하게 걸어 제라니아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주춤거리는 제라니아를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당신에게 유감은 없습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여기서 끝인가.

    제 얼굴로 떨어지는 검을 보며 제라니아는 눈을 부릅떴다. 적어도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죽기 직전에는 여러 잔상들이 떠오른다 했던가.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족과 친구들,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오랜 친구,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리고 프란츠.

    프란츠, 미안해요. 계속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그 순간이었다.

    둘의 귓가에 쌔앵,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돌아선 샤를로테가 검을 휘둘러 그것을 쳐냈다. 검날에 부딪힌 화살이 팽글팽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풀숲 위로 떨어졌다.

    그 틈을 타 제라니아는 뒷걸음질을 치다 바닥으로 넘어졌다. 다시금 제라니아에게 손을 뻗으려던 샤를로테의 어깨에 화살이 꽂혔다.

    “…큿!”

    아플 텐데도, 낮게 신음을 흘리며 화살을 뽑아낸 샤를로테가 난데없는 불청객을 향해 달려들었다. 들고 있던 활을 내던진 이가 검을 빼어 들었고, 곧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새까만 로브를 둘러쓰고 나타난 익숙한 얼굴에 제라니아는 벌어지는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크리스!”

    크리스토퍼 휴스타인. 그가 제라니아의 눈앞에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제라니아를 봤을 때, 크리스토퍼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제게로 달려드는 샤를로테와 검을 맞댄 채 크리스토퍼는 천천히 반 바퀴를 돌았다. 자신이 제라니아를 등질 수 있도록.

    샤를로테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눈빛이 흡사 맹수를 보는 듯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인질로 삼으려고 하나 싶었더니 그것도 아닌 듯한데.”

    어깨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샤를로테를 보며 크리스토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몸 상태를 보니 지쳤을 만한데,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체력이 솟아나는 걸까.

    홀에 머물렀던 이들이 체포되었으니 항복하라는 외침을 들은 순간, 샤를로테는 고개를 들었다. 그와 같이 하늘을 쳐다본 크리스토퍼는 공중을 빙빙 도는 새 한 마리가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바로 진영을 이탈하고, 새가 향하는 쪽으로 뛰어가는 샤를로테를 보자마자 불길함에 뒤를 쫓았다. 이 자리에 나선 만큼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제가 이 전투에서, 가문의 이름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주십시오.’

    거사를 위해 출발하기 전날, 크리스토퍼는 아버지인 아론에게 차분히 고했다.

    ‘패배를 두려워하는 건 아니나, 승리의 영광 역시 제게는 필요 없습니다. 겁쟁이란 낙인이 찍히더라도.’

    그는 가문을 저버릴 수 없었으나, 그렇더라도 타협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이유는?’

    ‘온전히 가문만을 위해 싸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한 치 앞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 이 자리에서는 솔직해져야 맞았다.

    ‘아버지, 제가.’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기사가 된 건…. 단 한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가문의 무게라든가 제가 가져야 할 의무, 기사로서 가지는 충성심. 그런 것들을 알기 전에 맹세했던 것.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근원의 이름.

    ‘가문을 위해서라면, 저 개인의 생각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습니다. 평생 동안 그래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이미 일은 시작되었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자신은 모두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

    그렇지만, 가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하지만, 제라니아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 온다면….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녀석을 우선할 겁니다.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모순을 질책하듯,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촛대의 불꽃이 화르르 흔들렸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어떻게 가문의 문장을 짊어질 자격이 있겠습니까.’

    이미 결심을 굳힌 아들의 표정을 본 아론이 조용히 한탄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은혜를 알지 못하면 짐승이라 하지 않습니까.’

    말문이 막힌 아버지에게 크리스토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애한테서 받은 것에 비해 돌려준 게 거의 없다시피 하니, 이렇게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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