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어느 페이지의 마지막 (3)
제롬은 윌터의 손을 밟고 있는 쪽 발을 중심으로 몸을 회전시켜 검을 피했다.
“아악!”
윌터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제롬은 발버둥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윌터의 가슴께에 자비 없이 양손으로 검을 꽂아 넣었다. 엄청난 힘에 철이 뚫리고 살갗이 벌어지는 소리가 났다.
쿨럭, 말뚝에 꽂힌 것처럼 땅에 몸이 박힌 남자가 입에서 핏물을 토해냈다.
그대로 검에서 손을 떼고 돌아서는 제롬에게 윌터는 더듬더듬 말했다.
“이, 비겁한….”
죽어가는 남자에게 제롬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승리하는 건, 언제나 살아남은 이뿐이므로.
궁에서도 내밀한 곳, 왕비가 기거하는 처소에 병사들이 난봉꾼처럼 밀어닥쳤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불한당 중 하나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시녀의 가슴을 검으로 찔렀다.
“…허?”
사람을 찌를 때 착 감기는 특유의 손맛이 없었다. 칼이 닿자마자 구름이 뭉쳐 있던 것처럼 시녀의 모습이 흐릿해지다 사라졌다. 이에 이상함을 감지한 병사들이 재빨리 처소의 문을 열어젖혔다.
흙발로 들어온 이들로 인해 깔끔하게 청소한 바닥이 더럽혀지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앞장서 들어왔던 병사들이 버럭 외쳤다.
“왕비가 없다!”
“찾아라!”
바깥에서도 난전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샤를로테와 검은 옷의 남자가 이끄는 후방의 군사들은 몰려드는 왕국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간단한 은신 마법을 쓴 마법사들이 그들 사이를 피해 궁전의 중심부로 향했다.
복도를 거슬러 올라가던 그들은 평범하게 생긴 나무 문 앞에 멈춰 섰다. 문 하나를 두고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다.
굳게 잠긴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방의 바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둥그런 마법진과 그 중심에 세워져 있는 사람 크기의 초록색 돌이 보였다.
아니,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돌에 손을 짚고 있던 이가 난데없이 들이닥친 불청객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칼의 남자, 벤자민이 서글서글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어이쿠,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치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제게 달려드는 이들을 본 벤자민이 돌에서 손을 떼어내며 몸을 피했다.
결계가 깨지는 감각이 모두의 뇌리를 두드리는 것과 동시에 비명 소리가 적막을 깼다.
“아악!”
벤자민에게 어깨를 붙잡혔던 남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남자의 어깨가 손가락 모양으로 푹 파여 있었다. 벤자민이 손가락을 천천히 까딱거렸다.
“정말로 정교해진 위장 결계는 현실과 구분할 수 없다지요?”
물론 거짓말이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그건 마법이 아니라 사기지.
어디까지나 겁을 주려 한 말이었으나, 어깨를 붙든 채 바닥을 구르고 있는 자를 보니 설마 싶었는지 그들이 살짝 주춤거렸다.
벤자민은 바닥에 쓰러진 이에게 힐끗 시선을 두었다. 어깨를 살짝 달궈줬을 뿐인데 엄살이 심하구만. 손이 파인 자국은 당연히 환영이었지만, 발버둥치는 것과 어우러져 제법 그럴듯하게 보였다.
원래라면 교리도 그렇거니와 귀찮아서라도 이런 일엔 나서지 않을 터인데, 이래서 사람이 빚지고 살면 안 되는 거다.
정말 이게 무슨 고생이람. 사십 줄에 들어선 게 언젠데, 근래 험한 일이란 험한 일은 다 겪는다 싶다.
속으로는 한숨을 쉬면서도, 벤자민은 상황에 맞지 않게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디 놀아볼까요?”
환영 결계가 깨진 뒤, 반군은 더욱 격렬히 저항했다. 마법사들 역시 결계가 깨진 뒤로는 여러 가지 마법을 시전해 아군을 엄호하고 적군을 공격하는 것으로 응전했다.
그러나, 아무리 반군의 수가 훨씬 많다 한들 협소한 장소에서 앞뒤로 포위당한 상황에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근접전 위주라 마법사들이 활약하기도 쉽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 앉아 있는 왕을 잡으면 끝나는 싸움인데도, 막강한 적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는 점도 난관으로 작용했다.
제롬은 윌터를 죽이고 난 뒤에도 굳건히 계단 밑을 지켰다. 흥분해서 앞으로 뛰쳐나가 무예를 뽐내지도 않았고 누군가 계단을 올라가게 두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반군이 진압되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노구를 이끌고도 끝까지 저항한 알란과 아론, 루크가 붙잡혀 계단 밑에 꿇어앉혀졌다.
창들이 한꺼번에 저를 겨누는 상황에서도 용맹하게 병사 절반을 베어내던 알란의 행보는 참으로 눈이 부셨다.
저 나이를 먹고도 저토록 날뛸 힘이 있다니, 그 오만함에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는 걸 증명한 셈이었다.
상황이 정리되어 가는 걸 본 프란츠는 왕좌에서 일어섰다. 제 어깨를 감싸고 있던 붉은 망토를 왕좌 위에 개켜둔 그가 느릿하게 손을 뻗어 왕관을 머리에 썼다.
보이기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쏟아지는 빛을 등진 채, 그는 움직였다.
핏자국이 튄 아랫부분을 제외하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한 돌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바닥에 발을 디딘 프란츠의 단정한 가죽 부츠가 피를 흡수해 검게 변했다.
청결한 계단에서 죽음이 선명한 경계로 발을 디뎠다.
피가 낭자한 홀 곳곳에 쌓여 있는 시체들을 향하던 프란츠의 눈길이 꿇어앉아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굴욕적인 상황에 알란은 제 앞에 선 국왕을 노려보았고, 아론은 눈을 내리깔았으며 루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와중에 프란츠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 서 있던 병사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수가 부족한 것 같은데.”
있어야 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함이 제 목줄을 틀어막는 감각을 애써 떨쳐 내며 프란츠는 입을 열었다. 우선,
“샤를로테 케라온은 어디 있지?”
* * *
“이제 슬슬 말해야겠지.”
나직한 중얼거림이 이렌스의 귓가에 닿았다. 군사와 보급품을 점검하러 간 티레인, 대신전으로 향한 세인과는 달리 이렌스는 마저 결재를 받아야 할 서류가 있었다.
“왕비님께 말입니까?”
눈치 빠르게 되묻는 책사에게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시고.”
“말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반란까지 기획했을 정도면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어느 한쪽이 파멸하지 않는 한. 케라온도 그렇지만, 휴스타인이라고 이런 문제를 가볍게 결정하진 않았을 테니.
“그렇다면,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칼자루를 쥐는 게 낫지 않겠나.”
한 번도 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한 번만 하는 일은 없다고들 한다. 그는 후환을 남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프란츠는 제라니아가 휴스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잘 알았다. 그들과 오래 교류했던 만큼 이 사실을 알면 충격이 크겠지. 자책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가능성을 주고 싶지 않았다.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순간부터 자책은 배가 된다. 그런 가능성은 저 혼자 감당해도 되었다. 어쨌거나 지금 왕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니까.
프란츠는 피식 웃었다.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지점에서야 이런 얘기를 털어놓는 자신을, 제라니아가 비겁하다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국왕을 보며 이렌스는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국왕 폐하께서는…. 정말 여전하시군요.”
“무슨 뜻이냐.”
“항해사가 키를 잡고 있다고는 하나, 배가 언제나 항해사의 마음대로 움직일 리 없기는 하지만.”
자신을 배에 비유하는 건방진 신하를 프란츠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렌스가 가볍게 덧붙였다.
“하지만, 맞춰갈 수 있기 때문에 항해란 더 즐거워지는 거라 하더군요.”
“……누가 말이냐.”
“책에서요.”
뻔뻔하게 대답하는 이렌스의 얼굴로 프란츠는 들고 있던 서류를 집어 던졌다.
* * *
새가 우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무정한 겨울 햇살이 아무것도 없는 풀이 가득한 바닥을 비추었다.
덜컹, 바닥이 흔들렸다. 곧 바닥이 뚜껑 열리듯 네모난 형태로 튀어 올랐다. 뻥 뚫린 구멍에서 레몬빛 머리칼의 여인이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완전히 땅 위로 올라선 비앙카가 아래를 향해 속삭였다.
“올라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에 뒤이어 제라니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왕궁에서 소란이 일자마자 제라니아는 비앙카를 포함한 몇 명의 기사들과 함께 본인의 처소 근처에 위치한 비밀 지하 통로로 피신했다.
끝없는 어둠을 걸어 계단이 있는 곳에 다다라 문을 열자, 막혔던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비앙카의 손을 잡은 제라니아가 사뿐히 땅 위로 올라섰다. 저를 따라 하나둘씩 올라서는 기사들을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키 큰 나무가 사방에 가득했다. 초록색 잎사귀들이 가지 끝에 매달려 있기는 했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잎의 수가 적고 시들시들했다. 바람은 크게 불지 않았지만, 싸늘한 한기가 천을 뚫고 피부에 스미는 듯했다.
북쪽 성벽 근처에 자리한 거대한 숲. 프란츠의 말대로라면, 여기서 조금만 더 이동하면 북쪽에 위치한 성문이 나올 것이다.
‘통로에 숨어 있거나, 여의치 않다면 이동하십시오. 이미 병사들에게 북쪽 성문으로 모이라 명령을 내려 두었으니.’
저 멀리 왕궁을 상징하는 푸른 지붕이 보였는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호라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철렁했다.
문제없이 잘되고 있겠지. 제라니아는 애써 생각을 다잡았다.
“아이들은 괜찮겠죠?”
공작저에 맡겨 두었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비앙카가 못마땅한 듯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님께서도 같이 가 계시는 게 좋았을 텐데요.”
제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까지 나가 있었으면 바로 의심을 샀을걸요.”
프란츠가 자신을 아끼는 건 왕궁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미리 자신을 내보냈다면 낌새를 알아챈 게 아니냐는 의심을 했을 터.
심지어 자신은 요 근래 일정이 무척이나 바빴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며칠씩 휴가를 내는 건 제가 봐도 자신답지 않으니, 절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이들을 내보낼 때는, 최근 코델리아를 보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것이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저보다야 국왕 폐하가 걱정이죠.”
무엇보다 프란츠가 스스로 미끼를 자처하는데 자신이 이런 일에 겁을 먹을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프란츠에게 모든 설명을 들었을 때, 제라니아는 딱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은 비겁해요.’
예상했다는 듯 그는 타격조차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제라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감당할 수 있어요.’
‘할 필요 없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요?’
‘나한텐 그래도 남이지만, 당신한테는 아닐 테니까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화가 났다. 프란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훤히 알았다. 반란을 예감한 건 지금보다 훨씬 예전일 것이다. 미리 말하지 않은 건 아마도, 자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겠지.
제가 이렇게 심란해할 것도 알았으리라. 사실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세상을 선악으로 나눌 수 없듯, 어느 한쪽을 무조건적으로 응원할 수 없는 현실이 괴로웠다.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걸까.
“움직이실 겁니까?”
“그게 나을 것 같아요. 혹시 통로가 발견되었을 수도 있고….”
“그럼,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조만간 병사들이 돌아올 겁니다.”
신호를 보냈으니, 숨어 있던 병사들이 수도로 다시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이 숲을 나가서 그들과 합류해야 했다.
조심스럽게 방향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가자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것처럼 반듯한 길이 드러났다. 이걸 따라 걸어가면 출구가 있으리라. 주변을 신중하게 살핀 뒤, 일행은 길에 발을 디뎠다.
그 순간, 제라니아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감각을 느꼈다. 무언가 그의 뒤통수로 쌩하니 날아들었다.
“왕비님!”
제라니아의 등을 가로막고 선 비앙카가 검을 휘둘렀다. 제라니아를 향해 날아들던 날카로운 발톱이 검에 막혔다. 다시 하늘로 날아드는 매의 실루엣이 묘하게 익숙했다.
설마.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요. 그보다 어서 움직이죠, 비앙카 경.”
“네?”
“서둘러요. 이미 따라잡았을지도 모를….”
비앙카의 등 너머로 보이는 사람의 모습에 제라니아는 일순 말을 잃었다.
피범벅인 가죽 갑옷,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 뛰어온 듯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번뜩이는 눈동자는 매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고요함이 전신에 덧칠된 듯 우아하게 걷는 기사의 신발 아래에 있던 나뭇가지가 바삭, 부서졌다.
“……샤를로테 경.”
“안녕하십니까.”
예의 바른 어투와 무심한 얼굴, 전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았으나 상황만은 완전히 달라졌다.
비앙카와 다른 기사들이 검을 빼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