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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65화 (166/171)

제165화. 어느 페이지의 마지막 (2)

“알겠다. 우선 전령을 숙소로 데려가 푹 쉬게 해주도록 해라. 그리고 세 시간 내로 긴급회의를 소집할 테니, 아직 궁에 남아 있는 관리들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마에타스 대원수에게는 따로 연통을 보내라.”

“예, 폐하.”

시종장과 전령을 물린 뒤, 둘만이 남은 집무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프란츠는 다시금 종을 울려 시종을 불러왔다. 짤막한 지시를 들은 시종이 밖으로 나갔다.

둔탁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무겁게 닫혀 있던 프란츠의 입이 열렸다.

“좋은 기회겠군.”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주고받았다.

“지원군을 이끌 자는 누가 좋을 것 같나?”

“파벨 경이 어떻겠습니까. 지위도 적당하고 전술 머리도 꽤 좋은 데다, 남의 의견을 귀담아들을 줄 아는 자니까요. 제가 마에타스 장군이라면 아마 그를 천거할 겁니다.”

“그래. 밀서를 보내도록 하지.”

프란츠는 종이 한 장을 꺼내 깃펜에 잉크를 찍어 유려하게 밀지를 적어나갔다.

서쪽 성문 밖, 반나절 거리에 숲이 하나 있다. 거기에 도착하면 더는 진군하지 말고 그곳에 숨어 있다가 신호를 보면 즉시 돌아오라는 내용을 적은 편지에 직인을 찍은 그가 이렌스에게 그것을 건넸다. 이렌스가 공손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하오면….”

“하루 정도는 지원이 늦어져도 괜찮을 거다. 그 정도를 버티지 못할 사람은 아니야.”

프리드 리베라. 역전의 맹장이라 불리는 제 숙부의 명성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닌가. 분명 놓치지 않을 테지.”

반란의 기미가 있다는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자치권을 준 지역에서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드러나는 건 없더라도, 조각조각 모아보면 하나로 연결되는 사실이 있다.

클라단 성채에 모이는 병사의 수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경선을 지키는 병사의 수는 전보다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그 병사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가. 비밀리에 움직이는 세력이 있다는 건 언제나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알란 케라온은 바보가 아니다. 노련한 범이며 교활한 너구리였다. 그는 확실하게 이기는 걸 좋아하지, 승산이 애매한 싸움을 하려고 들지는 않는다.

사달이 날 징조가 이제껏 제법 있었음에도 여태까지 얌전했던 것은, 아무리 그라도 왕국군과 정면으로 맞서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기를 들겠다고 한다면, 최대한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려 할 게 분명했다.

그들과 손을 잡을 만한 상대라.

예리한 직감은 휴스타인이 있는 트라이탄을 가리켰다. 야생마와 같은 케라온과 달리 우직하고 진중한 이들이었으나, 정치는 선의로만 굴러가는 게 아니라는 걸 프란츠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쪽은 어떠한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트라이탄에는 마법사가 있다.

휴스타인 왕가가 마법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둔 것은, 트라이탄의 마법사란 족속들은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힘은 크게 위협적이지 않더라도, 뭉치게 된다면 더없이 성가셨다.

정기적으로 연락이 오던 첩자에게서 근래 소식이 오지 않는다는 것도 위화감을 형성했다. 때로는 답이 늦어지거나,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 곧 대답이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바로 어제, 루이스 케라온을 찾았다는 서신이 에스파 후작령에서 날아왔다. 열병이 도진 건지 현재 의식은 없지만, 도망쳐 나온 것 같은 행색이었다는 걸 보아하니 뭔가 일이 생긴 건 분명했다.

확인차 사람을 보낸 게 바로 어제인데, 서쪽에서도 일이 터졌을 줄은.

“지원을 보내지 않을 수는 없다. 하이센은 서쪽 국경의 중추를 담당하는 요새니까.”

그러니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이렌스가 문득 떠오른 사실을 농담조로 읊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면서, 크리스토퍼 휴스타인에게 기사단장 자리를 제의하신 게 놀랍습니다. 원수급의 자리가 아닙니까.”

“…적당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뿐이다.”

드물게 강직한 사내이니, 정말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면 절대 그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막상 결과를 마주하니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긴 했지만.

“정말이지 여전하시군요.”

자기를 죽이러 온 암살자를 호위로 두던 배짱은 어디 가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는 이렌스의 뒤에서 문이 열리고 티레인과 세인이 들어왔다.

어리둥절한 얼굴이 근심 어린 표정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면전을 한다면, 어느 쪽이든 타격이 클 텐데요. 하나면 몰라도, 둘이 연합했다면 그리 만만하게 뚫리진 않을 겁니다.”

“최대한 안쪽으로 끌어들여 처리하면 된다.”

“설마, 폐하께서 직접 그들을 꾀어낼 미끼가 되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쨌거나 희생이 날 텐데요.”

다른 이들이 의견을 나누는 와중에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세인에게 프란츠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예? 예. 국왕 폐하. 이 일에 결계를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계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결계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력을 차단하고, 여차할 때 왕궁 자체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용의 결계였다.

그걸 위해 본궁의 중심에는 거대한 마법진과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증폭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결계의 성질을 그날만, 방어에서 환상으로 바꾸는 겁니다.”

병사들을 어전과 궁의 외부에 숨겨놓은 뒤 환영을 덮어씌워 그들의 눈을 속인다. 깊숙이 끌어들여, 완전히 속았다고 느꼈을 때는 돌이킬 수 없도록.

“물론 이게, 마법사들이 섞여 있다는 전제하에는 굉장히 불안정한 방법이긴 한데요. 조금만 틈을 줘도 바로 들킬 거라서. 하지만 병사들의 눈을 속이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진짜를 일부 남긴 상태에서 가짜를 섞으면 들킬 확률도 그만큼 낮아지리라. 세인의 의견을 들은 이렌스가 반론을 제시했다.

“그만한 결계를 만들어서 유지할 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세인의 말대로라면 왕궁 전체에 결계를 깔아 위화감이 없도록 위장해야 했다. 정지된 장면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넓은 범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투영하는 건 고위 마법사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게 제일 문제인데…. 제가 아는 한 딱 한 사람뿐이긴 합니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프란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명령했다.

“벤자민 산드리아에게 기별을 보내라.”

* * *

“으악!”

푹, 살이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앞에 서 있던 병사들 몇몇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화살 몇 개가 알란이 입고 있던 판금 갑옷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한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적막을 꿰뚫고 고함이 터져 나왔다.

“국왕을 해치워라!”

앞으로 튀어 나가는 알란의 뒤에서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한 손에는 방패를, 다른 손에는 검을 든 알란이 용맹한 검투사처럼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계단 앞에 간 순간, 섬뜩한 예감에 알란은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캉, 소리와 함께 허공에 칼이 멈추고, 안개가 걷히듯 그 앞에 서 있는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롬 플린트…!”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더 말을 섞을 생각도 없는지 제롬은 다른 손으로 알란의 목에 검을 찔러 넣으려 했다.

뒤로 한 걸음 움직인 알란의 가슴에 쇠끼리 부딪히는 둔중한 충격이 닿았다. 알란이 그 반동으로 몇 걸음을 더 물러났다.

그들의 뒤에 서 있던 몇몇 병사들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활을 꺼내 들어 국왕이 있는 쪽을 향해 쏘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방패들이 국왕의 앞을 가로막아 화살을 받아냈다.

홀의 뒤쪽에서 또다시 석궁 화살이 빗발쳤다. 화살이 다 떨어진 후에야 나타난 병사들이 앞다투어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반란군은 덤비는 이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으나, 허공을 베어내듯 느릿하게 통과했다.

“환영이랑 진짜가 섞여 있습니다!”

비명과도 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소리친 이가 뒤통수에 칼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반죽하듯 섞여 난전을 형성했다.

가죽 갑옷을 입고 군사들 사이에 섞여 있던 마법사들이 손을 들었다. 그들이 결계를 형성해 어전 전체로 밀어내자, 중첩된 결계 너머로 드디어 군사들이 보였다.

그 수가 크게 많지는 않았는지라, 병사들은 그제야 침착하게 그들을 상대했다.

그때, 바깥에서 시끌벅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태를 파악한 윌터가 대답했다.

“후퇴하라!”

외부에서도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수는 이쪽이 더 많을지 모르나 지형적으로 불리했다.

어떻게든 길을 뚫지 않으면, 이대로 여기에서 앞뒤로 고립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들리자마자 알란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호통을 쳤다.

“멍청한 놈! 뒤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샤를로테가 후방을 지키고 있으니 문제없을 것이다. 눈치 빠르게 말을 알아들은 윌터가 명을 거두고 침착하게 국왕이 있는 쪽으로 뛰어나갔다.

제게 덤빈 이의 가슴에 칼을 꽂는 아론의 뒤에서 다른 병사가 달려들었다.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푸른 불꽃이 병사의 몸을 감싸고 화르르 타올랐다.

불을 쏘아낸 마법사가 아론의 곁으로 다가와 소곤거렸다.

“각하, 이대로는 저희가 불리합니다. 전력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결계를 없애야만 해요.”

“방법이 있나?”

“예,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핵이 있을 겁니다. 아마도 왕궁의 결계와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녀와라.”

“알겠습니다!”

가죽 갑옷을 입고 군사들 사이에 섞여 있던 마법사들 중 몇이 난전 사이를 가로질러 홀을 빠져나갔다.

왕좌의 뒤에 설치되어 있는 창문에서 새하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프란츠가 앉아 있는 왕좌를 비추었다.

어느새 미소를 거두고, 권태로운 표정을 한 프란츠가 핏빛이 낭자한 아수라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주변에는 방패를 든 병사 여럿이 포진해 있었다.

저를 사로잡으려 덤비는 이들을 보면서도 프란츠는 무감했다. 그도 그럴 게.

“악!”

제롬이 죽지 않는 한, 이곳에서 가장 안전한 이가 그였으므로.

검으로 병사의 어깨를 내려찍는 제롬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그는 곧장 쓰러지는 병사의 뒤에서 튀어나온 이의 심장에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박아 넣었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병사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제롬 플린트. 현 국왕이 왕세자이던 시절부터 그의 호위기사로 근무했으며, 그 이름보다 충성스러운 미친개라고 암암리에 불리고 있는 남자.

왕좌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파수견처럼 서 있는 그는, 결코 제 등 뒤를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꼬챙이에 고기를 끼우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검에 병사를 꿰던 제롬은 제 왼쪽을 노리는 기습에 시체를 들이밀었다.

검이 꽂히는 감각과 함께 그는 시체에서 검을 빼낸 뒤 발로 찼다. 바닥에 쓰러지는 시체의 뒤로 검을 든 윌터가 보였다.

무덤덤한 얼굴에 피가 튀었다.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제롬과 마주 보며 윌터가 픽 웃었다.

“한 번쯤, 그 뻣뻣한 모가지를 꺾어주고 싶긴 했지.”

“말이 많군. 그냥 덤벼라.”

제롬은 피가 묻은 검을 들고 그대로 윌터에게 달려들었다. 판금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는 만큼, 윌터의 움직임은 제법 둔했지만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쉽지 않았다.

반면 제롬은 가죽으로 된 일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걸 입고 싸우고 있는데도 상처 하나 없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제롬의 검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윌터의 목덜미를 찌르려고 하자, 방패로 그것을 막은 윌터가 그대로 손을 뻗어 제롬의 가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제롬은 재빨리 몸을 숙여 그것을 피한 뒤, 밑에 떨어져 있던 검 하나를 세게 차 윌터의 앞으로 밀었다. 앞으로 뛰어나오다가 바닥을 굴러온 검을 밟은 윌터가 순간 균형을 잃었다.

“…컥!”

제롬은 때를 놓치지 않고 넘어진 윌터의 몸 위로 올라타 검을 쥐고 있던 손목을 밟은 뒤, 장갑을 발로 밀어 그가 들고 있던 검과 함께 벗겨냈다.

그 다음 그의 손바닥을 콱 밟는 것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윌터는 방패를 놓친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려 검 하나를 쥐고, 곧장 제롬의 다리를 찔러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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