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64화 (165/171)
  • 제164화. 어느 페이지의 마지막 (1)

    요 근래 잠잠하다 싶었던 서쪽 국경선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진 까닭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헤리타 왕국을 다스리는 셀레만 왕조와 평민층 사이에서 발발한 갈등이 슬슬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마법사들을 중심으로 뭉친 시민들은 있는 힘껏 저항했으나 끝내 왕국군을 이기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그들의 잔혹함을 이기지는 못했다고 해야 옳았다.

    아무리 해도 시위의 물결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왕국군은 어느 순간부터 강경해졌다.

    제 앞을 가로막는 이들의 목을 베고 팔다리를 잘라냈으며, 심장에 칼이 꽂힌 채 지푸라기 인형처럼 쓰러지는 사람들의 머리를 밟았다.

    인간이 아닌 마수에게도 이토록 무자비할 수는 없으리라.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핏물이 바닥에 낭자했다.

    농기구를 무기로 들고 저항하는 농민들이 검과 기병, 체계적인 체제로 움직이는 군대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시위대를 돕던 마법사들이 있었으나, 왕국군에는 그보다 더 많은 마법사가 있었다. 수로만 생각해도 불리한 대결이었다.

    유일하게 왕국군이 생포하고자 노력하는 존재는 오로지 마법사로 보이는 이들뿐이었다.

    이는 마법사들과 평민들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결국 세력은 와해되었다. 허망하다면 허망한 결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끝까지 저항하는 이들도 있는 한편 왕국군의 눈을 피해 도주하는 이들 역시 상당했다. 문제는 그들 중 마법사가, 귀족의 소유라는 낙인이 찍힌 채 탈주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헤리타에서 마법사란 귀한 자원이다. 그 누구도 함부로 국경을 벗어날 수 없었다.

    탈주자들을 잡기 위해 국경 근처로 거슬러 내려온 헤리타군과 요새의 군사들이 충돌을 빚었고, 그들을 내놓으라는 저쪽의 요청을 리베라 후작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여, 지금 위기란 말이군.”

    단정하게 접힌 서신이 프란츠의 두 손가락 사이에서 팔랑팔랑 흔들렸다. 일제히 기립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바로 아래에 서 있는 전령을 내려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틀 안에 지원군을 보내도록 하지. 준비하도록.”

    서늘한 낮.

    숲을 가로지르는 제법 넓은 길 위로 말 한 필이 들어섰다. 말을 타고 있던 남자가 쥐고 있던 고삐를 당기자 말은 천천히 걸어가다 곧 멈추었다.

    바닥으로 내려선 그가 말을 근처 나무에 묶고 조심스럽게 수풀을 밟았다.

    새들이 하늘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햇빛조차 비집고 들어오지 못할 만큼 울창한 숲속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간 뒤, 남자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습니다….

    메아리가 진득하게 울려 퍼졌다.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나둘씩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구에 가득 꽂힌 나뭇잎들이 이따금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창들이 일제히 제 목을 향해 겨누어지는 것에 남자는 곧장 후드를 벗었다. 그제야 그가 누군지를 알아본 병사들이 숙덕거렸다. 그럼에도 칼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병사들이 양옆으로 물러섰다. 그 사이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제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꼿꼿이 서서 알란과 샤를로테, 윌터를 직시하는 루이스의 등으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못난 아들을 바라보는 알란의 눈에 미약한 경멸이 어렸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요.”

    맹수의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을 똑바로 응시하면서도 루이스는 꽤나 초연했다.

    서쪽 경계의 상황이 심상찮다는 보고가 들려왔을 때부터, 알란은 조금씩 제 병사들을 준비시켜 이올레 산맥으로 보낸 뒤 대기하게 했다.

    길잡이가 없다면 누구든 길을 잃을 정도로 험준한 산. 바꿔 말하면 길잡이가 있다면 제법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카암에서 말을 달려 고작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는 데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넓은 산맥은 무언가를 숨기기엔 제격이었다.

    리하르타넨과 동맹을 맺은 덕에 국경선 방어에 쓸 인력이 확 줄어들었고, 이는 거사를 준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대신 왕실에서도 외부로 군대를 돌릴 일이 거의 없다는 게 단점일 뿐.

    그렇게 고민하던 차 마침 첩자에게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헤리타와의 격전이라면 상당한 수의 군사를 보내야 할 터. 그동안 수도의 경비는 자못 허술해질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겨울이다. 쌀쌀맞은 바람이 피부에 에일 시기. 병사를 산에 숨기는 건 좋으나 언제까지고 시간을 질질 끌 수는 없었다. 미리 보내둔 병사의 수가 제법 쌓였으니 움직일 만하겠지.

    휴스타인에 즉시 연락을 띄웠다. 그들 역시 빠른 시일 내에 합류하겠다 연락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루이스에게 알려준 적은 없었다. 이 쓸모없고 발칙하기 짝이 없는 아들이 거기까지 예상했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제발 그만두십시오. 아직은 돌이킬 수 있습니다.”

    끝까지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자신을 설득하려 드는 아들에게 알란은 기묘한 시선을 보냈다.

    루이스가 도망간 것도 모자라 추격대까지 따돌렸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분노했다. 이번 기회가 천운이라 생각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눈앞의 아들놈 때문이기도 했다.

    “왜 돌아왔지?”

    “…저는 도망치고자 했던 게 아니라, 대화를 하고 싶은 거니까요.”

    알란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다를 게 있느냐?”

    루이스는 침묵했다. 그래, 제 아버지는 언제나 이런 분이었다. 자신처럼 연약한 이의 말은 그에게는 한낱 미풍에 지나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건 느낄 수 있지만, 고작 그뿐이다.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

    이제 와서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자리에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배신자로 보이리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느 쪽이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아버님, 언제까지 이러실 생각입니까.”

    “뭐?”

    하고 싶은 말 정도는 남겨도 좋지 않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이런 식으로 계속 짓밟아서 쟁취하려 하실 겁니까?”

    “어이, 너 무슨 말을….”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윌터의 말을 무시하며 루이스는 알란과 시선을 마주했다. 묘한 기백에 알란은 흥미로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토지는 척박합니다. 비옥하기는커녕 농지로 개간할 만한 땅조차 많지 않지요. 그렇기에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고, 외부로 세력을 뻗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전란의 시대는 잦아들고 있고, 주변의 국가들 역시 외부와 싸우기보단 동맹을 맺고 내수를 키우고자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기를 버리자?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자는 거냐.”

    “아니요. 그저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받아들일 수는 없겠냐고 말하는 겁니다.”

    루이스는 심호흡을 했다. 당장이라도 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눈을 맞추었다. 숨조차 쉬이 내뱉지 못하는 군사들과 사랑하는 가족들 앞에서, 그는 조심스럽고도 슬픈 음성으로 말했다.

    “무력적인 강함만이, 언제까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분명 영지에 이득이 될 거라 생각해요.’ 떨리는 목소리 위로 어느 날의 잔상이 겹쳐져 올라왔다.

    ‘교통이 원활해지면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전보다 훨씬 나아질 테고요.’

    그에게서 젊은 왕비의 모습이 비춰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알란의 미간이 흉포하게 일그러졌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맨 처음으로 느낀 샤를로테가 재빨리 앞으로 튀어 나갔다.

    뭐라 더 말하려던 순간, 루이스는 순식간에 제 눈앞으로 다가온 샤를로테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곧 복부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윽!”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축 늘어지는 루이스를 받아 안은 샤를로테가 제 아버지인 알란과 윌터를 돌아보았다.

    “나무 위에 묶어 놓겠습니다.”

    “배신자를 그냥 살려 두겠다고?!”

    “내일이면 끝날 일이야. 그리고 배신했다면 곧장 여기로 오진 않았겠지.”

    분통을 터트리는 윌터를 내버려 둔 채 샤를로테는 병사 중 하나에게 밧줄을 가져오라 시켰다. 그때, 알란이 입을 열었다.

    “죽여라.”

    서늘한 명령에 윌터의 어깨가 흠칫 튀었고, 샤를로테의 입매가 살짝 떨렸다.

    “…죽일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합니다.”

    “샤를로테. 명령을 거역할 셈이냐?”

    “아버님, 거사가 코앞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필요 없는 살생을 하는 건 군의 사기에 좋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보기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느냐.”

    “잔혹하게 처벌해봤자, 방금 전의 말을 긍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샤를로테는 표정 없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알란은 기절해 있는 루이스를 힐끗 내려다보다 툭 내뱉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저걸 눈앞에서 치워라.”

    그 말과 함께 알란은 돌아섰다.

    보급품을 챙기고, 무기를 점검하고, 말들과 갑옷과 투구를 쓴 병사들이 일제히 정렬했다. 출진을 알리는 대장군의 목소리를 따라 병사들은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며 사기를 북돋웠다.

    서쪽 성문을 통해 군사들이 빠져나가고,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흐른 후였다.

    동쪽 성문의 성채 위에서 망을 보던 병사는 저 멀리서 날리는 흙먼지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게 뭐지?”

    그것이 군대라는 걸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군사들은 성문에서 제법 떨어진 곳, 화살이 쏘아도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 상태로 멈춰 있는 이들을 본 병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저 정도 규모의 군사를 데려왔다면 필경 어명을 받았거나, 반기를 들러 왔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전자라면 통행증을 내미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후자라면 저렇게 가만히 성 밖에 주둔하고 있을 리가 없는데.

    일단 왕궁에 보고를 해야겠지.

    동료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돌아섰던 병사는 제 앞에 나타난 인영에 깜짝 놀랐다.

    “다, 당신은 누구….”

    말을 마치기도 전, 새까만 로브를 둘러 입은 남자가 빠르게 다가와 남자의 복부를 주먹으로 쳤다. 짧은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은 병사의 허리를 잡아채는 남자의 등 뒤로 다른 병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절한 병사를 뒤로한 채,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개선장군처럼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의아한 얼굴을 한 백성들을 당당한 걸음걸이로 지나쳐 왕궁 앞까지 도착했다.

    성문을 열었던 신원 불명의 남자는 저 멀리 보이는 휴스타인 가문의 문장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합류했다.

    서로간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무리를 이끌고 앞장서던 알란과 아론이 서로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용케 들키지 않고 도착했군요.”

    “마법사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미리 병사들을 조금씩 집결시키던 케라온의 방식과 달리 휴스타인이 선택한 길은 위장술이었다.

    군대의 주변으로 커다란 환영 결계를 설치해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혹여 결계를 알아볼 신관이 있을까 봐 일부러 신전이 없는 영지를 골라 진군했다.

    덕분에 꽤 돌아오기는 했지만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을 여는 데도 마법사들의 도움이 컸다. 무지렁이 같은 놈들이 이럴 때는 쓸모가 있군. 알란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 생각을 대놓고 내뱉지 않을 눈치는 있었다.

    왕성의 정문으로 다가가자 창을 든 병사들이 눈을 부라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허가 없이 군사를 몰고 오는 건 반…. 으악!”

    서걱. 눈 깜짝할 사이에 가슴이 베인 병사들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알란이 소리쳤다.

    “진격하라!”

    정문이 열리고, 쏟아지듯 들어오는 병사들을 본 궁인들이 기겁하며 개미 떼처럼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꺄아악!”

    “도망쳐!”

    흙이 묻은 부츠가 위풍당당하게 대리석으로 만든 바닥을 짓밟았다. 처소로 향하는 일부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어전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들 사이에 섞여 걸어가던 마법사들이 의아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곧 고개를 돌리고 일행을 따랐다.

    탕, 문을 발로 차서 열자 넓은 홀이 드러났다. 놀라서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도, 무엄하다며 뒤로 물러서라 외치는 이도 있었다. 물론 알란이 다가서자 왕좌가 있는 쪽으로 와르르 피해 물러났다.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리고 손등에 비스듬히 턱을 괸 채, 그들을 내려다보는 국왕을 향해 알란이 칼을 빼들었다. 느긋한 동작으로 팔을 거둔 국왕이 왕좌에 등을 기댔다.

    “왔군.”

    “순순히 항복하고 왕좌를 내려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도록 하겠소.”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국왕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선대의 치세에는 납작 엎드려 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내게 검을 겨누는 건가?”

    “우리가 가져야 하는 권리를 다시 가지러 온 것뿐이외다, 국왕.”

    “어지간히도 내가 만만하게 보였나 보군.”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인데도 더없이 여유로운 태도에 알란은 물론, 뒤에 서 있던 아론과 다른 이들은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저건 허세인가? 아니면.

    “좋아, 여기까지 왔는데 선물을 주지.”

    그때, 일순 국왕과 그 주변의 모습이 일렁였다가 돌아왔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던 찰나, 아론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마법사들 몇몇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도망치십시오, 다들!”

    “환영 결계입니다!”

    그 말을 신호로 하듯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뚫고, 석궁이 빗발쳐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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