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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63화 (164/171)
  • 제163화. 전야 (8)

    남자로 태어나서 용맹함과는 거리가 먼 저와, 여자이지만 무예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누이.

    원래 핏줄끼리는 많이 싸운다던데, 데면데면한 사이인 윌터 형님과는 다르게 샤를로테 누님과는 어릴 때부터 자주 붙어 다녔다.

    은근하게 괴롭히는 기사들에게서 누이가 나를 구해주거나, 내가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누이의 식사를 따로 챙겨 찾아간다든가.

    서로 다른 우리 두 사람이 가진 신뢰에서 애정과 연민을 벗기면, 아마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동질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와 누이를 끊임없이 손가락질하고 비교하던 이들은 이따금 우리의 성별이 정반대였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누이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나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누이라면 분명 나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 텐데. 여성 최초로 왕실 기사단에 임명된 누이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누이가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형제 중 누군가가 영지를 지켜야 했다. 아버지가 순순히 누이를 외부로 보내줄 리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다. 나보다는 누이가 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아버지는 먹잇감을 보는 나른한 맹수와 같이 웃으며 제 요청을 수락했다.

    미력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누이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노력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기사들과 고용인들에게도 언제나 공정하게 대하려 애를 썼다.

    처음 1년째에는 숨어서 많이 울었다. 사내자식이 눈물을 보이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라 배웠기에, 우는 걸 들켜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2년째에는 그래도 다들 조금씩은 제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3년째에 들어서서는 제 지시를 군더더기 없이 따르고, 인사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관계는 되었다.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지?’

    하지만 정작 이렇게 되었을 때, 나를 편들어 주는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무서울 테지. 그래, 이해한다.

    그럼에도 조금은 허탈하고 슬펐다.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과거의 영광에 고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 지금의 결정이 또 다른 미래를 위한 도약일 수도 있어.’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수는 없습니까.’

    ‘아버님이라면 이렇게 말할 거다. 「그 결과는 벨로아의 일로 이미 증명되었다.」라고.’

    루이스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몇 번을 그리하다가 가까스로 용기를 쥐어짰다.

    ‘아버님의 뜻이 곧 누님의 뜻이란 말입니까? 아니잖습니까. 저나 누님은 아버님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대경할 소리를 함부로 하지 말아라. 너는 여기 가만히 있으면 돼. 여기에 연금당한 상태로 있으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차라리 안전할 테니.’

    샤를로테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안다. 자신의 처지를 염려해서겠지. 아는데도 화가 치밀어, 루이스는 홧김에 소리쳤다.

    ‘차라리 저도 같이 데려가 주십시오. 저 역시 케라온의 이름을 가진 만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설령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죽게 되더라도 이렇게 뒤에만 남아 있어야 하는 수치보다야 나을 것이다.

    당돌한 발언을 들은 샤를로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으나, 루이스는 보지 못했다.

    ‘살아남도록 해라. 무엇이든, 그게 제일 최선이야.’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이 루이스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어린 시절과 같이 다정하게. 산뜻한 손길에 그는 일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이만 가봐야겠구나.’

    ‘누님!’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샤를로테는 뒤를 돌아보았다. 루이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무사히, 돌아오실 거지요?’

    샤를로테의 입술이 말을 그려냈다.

    ‘우리는 승리할 거다. 내 운명은 케라온의 깃발 아래 있어.’

    그 말을 끝으로, 샤를로테는 문을 열고 나갔다.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그렇게 보이더라도 괜찮아. 멍청이 취급을 받는 건 이미 익숙하거든.”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저 포기하고만 있고 싶지는 않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설령 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해도.

    “……클라단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어.”

    가문과 관련된 일은 맞나 보군. 그렇게 짐작하면서도 유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미 그를 찾았다는 사실을 왕실에 보고했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미안한데, 유진. 기왕 이렇게 된 거,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날 좀 도와줄 수 없을까. 네게 피해가 가는 일은 아닐 거야.”

    역시 이런 흐름인가. 유진은 짐짓 태연하게 되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기분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루이스는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그래, 분명 내 편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제게 다른 음식을 몰래 넣어주러 온, 아는 얼굴의 하녀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하녀는 두려워하는 낯빛이 역력했지만 결국 제 부탁을 승낙했다. 그가 몰래 병사들이 먹는 음식에 수면제를 넣어주지 않았다면, 절대 그 방을 빠져나올 수 없었을 테니까.

    여기까지 추격대에 따라잡히지 않고 온 것만도 충분히 기적이었으나, 더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빠져나오기 전 직면했던 군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몸을 쓰는 데 재능이 없다 한들, 아버지와 누이가 군사를 이끄는 걸 지켜본 게 평생이다.

    초조해졌다. 어쩌면 그때가, 제 예상보다 더 빨리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아, 나에 대해서는 일단 비밀로 해줬으면 해. 부탁해도 될까?”

    “뭐, 봐서요.”

    능청스럽게 굴면서도 절대 확답은 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도 그랬다. 투정 한번 부리려 들지 않는 고집스러운 꼬맹이. 빈말을 입에 담기 싫어하는 성질머리도 여전했다.

    그러니 에스파 공작과도 그렇게 싸웠지. 후레자식이라는 욕을 얻어먹고도 아버지를 노려보는 눈빛만은 거두지 않던 어린아이는, 서늘한 미소로 제 속을 감출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럼에도 가끔 루이스는 유진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꽤나 실례인 발언 같아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편지를 보내지 않은 지 한참이 지났으니, 왕궁에서도 슬슬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텐데. 말간 얼굴과 달리 단호한 눈동자를 가진 왕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선을 그을 줄 알았다. 모든 것을 관망하는 듯하면서도 판에 뛰어들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누이를 왕실 기사단에 천거한 것부터가 보는 눈이 있다는 걸 증명했다.

    언젠가는 왕비가 서신으로 물었다. 그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겠냐고. 그 글귀를 보자마자 조금 굳었고, 곧이어 정중한 거절의 답장을 적어 보냈다.

    당신이 보기에는 미련해 보일지 모르나, 이건 우리 가문의 일이어서. 외부에서 두드려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벨로아를 구하기 위해 당신이 한 일을 안다. 피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었겠지.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기엔 우리는 너무도 단단하고,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인정하는 자신이 서글펐다.

    “열이 펄펄 끓었다가 이제 막 깨어나서는,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이틀은 더 쉬어야 합니다.”

    유진이 침대에서 내려오려는 루이스의 어깨를 붙들었다. 원래도 말랐지만 아주 뼈와 가죽만 남았군. 스쳐 지나가던 생각이 루이스의 대답을 따라 흩어졌다.

    “난 괜찮아. 정신도 맑고.”

    “늘 골골거리기만 하면서 무슨.”

    “딱히 약하진 않은데…. 샤를로테 누님이나 윌터 형님보다야.”

    한참 부족하지만.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꼬르륵. 루이스의 배가 강하게 제 주장을 펼쳤다. 멋쩍은지 시선을 피하는 루이스에게 유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뭐라도 섭취하는 게 좋겠군요.”

    하루가 지난 뒤, 루이스는 유진의 도움을 받아 수도로 가기 위한 채비를 꾸렸다. 부인인 이자벨과 함께 그를 배웅하러 나온 유진이 루이스의 옷차림을 슥 훑었다.

    평민들이나 입는 하얀 셔츠에 검은색의 긴바지, 두툼한 갈색 망토를 둘둘 말고 뾰족한 후드까지 쓰고 있어 전체적으로 따뜻해 보였다. 겨울에 성큼 들어서 쌀쌀해진 바람이 유진의 손끝을 차게 식혔다.

    “그럼, 고마웠습니다. 부인의 환대에도 감사드립니다.”

    둘 모두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 루이스가 훌쩍 말 위로 올라탔다.

    동물과 친한 만큼 그는 승마에는 뛰어났다. 그가 검을 배우지 못한 이유는 체력의 부족도 부족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루이스 공자.”

    “응? 어, 네.”

    “정 돌아갈 곳이 없다면, 여기로 돌아와도 됩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자리 하나 정도는 내줄 수 있으니까요.”

    차가운 음성으로 덧붙이는 유진의 팔을 이자벨이 우아한 손짓으로 찰싹 때렸다. 다정다감하지만 엄격한 아내의 눈빛을 본 유진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루이스는 조금 웃고 말았다. 그냥 평범하게 걱정된다고 하면 될 텐데.

    “그럴게요.”

    유진은 루이스를 태운 말이 저 숲 너머로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아내를 데리고 돌아섰다. 한참 뒤, 숲에 대기하고 있던 세 필의 말이 조용히 그의 흔적을 밟아 가기 시작했다.

    * * *

    “올해 밀 수확량이 그리 좋지는 못한 모양이군.”

    “여름이 워낙 가물었으니까요. 그래도 보리농사는 예년보다 잘될 전망이라고 합니다.”

    “대신전에 보낸 협의안은?”

    “몇 가지 항목에 관한 조율이 오가긴 했습니다만, 큰 변동 없이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도 지금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합니다.”

    프란츠는 무심히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세금을 기록해둔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국왕 폐하, 급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말하자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꾀죄죄한 청년을 보고 프란츠는 가만히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시종장이 안절부절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오나 이 청년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 뵙고 서신을 전해야만 한다고 우겨대서….”

    “어디에서 왔지?”

    “하이센 요새입니다.”

    서쪽 국경에서 서신이 왔다는 소식에 프란츠는 재빨리 손짓했다. 청년이 성큼 내민 편지를 그 자리에서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그의 손에서 살짝 구겨진 종이가 이렌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서신에 적혀 있는 내용은 짧고 간결했다.

    『헤리타군이 요새를 포위했습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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