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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62화 (163/171)

제162화. 전야 (7)

유진은 픽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상관이냐. 이곳이 클라단과 가깝다지만 엄연히 내가 다스리는 영지다.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 잡았다고 내게 뭐라 할 수 있겠느냐.”

후작으로 강등되었다 하나, 엄연히 한 국가의 공작이었던 만큼 유진이 다스리는 영토는 넓고 강대했다.

그 자신은 무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든든한 기사들을 거느리고 주변 영주들과 연합한 만큼 지금 그의 세력은 클라단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왕국이 멸망하고, 열아홉의 나이에 자리를 물려받자마자 그가 맨 처음으로 한 일은 아버지인 선대의 세력을 솎아내는 것이었다.

선대가 뭐라 하든 그저 엎드려 충성하던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추진력이었다.

척박한 영지에서 지내던 만큼, 농사를 통해 성장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광산에 남아도는 광물과 그것을 제련하는 기술에 주목했다.

단, 대장장이들이 전처럼 무기를 제련하는 대신 실생활에 필요한 농기구와 도구를 만들도록 독려했고, 외부와의 교역을 장려했다.

이는 부하들로부터 상당한 염려와 반발을 불러들였지만, 유진은 묵묵히 제 방식을 추진해 나갔다.

차근차근 성장하기 시작하던 에스파는, 현왕이 즉위하고 직접적으로 왕실에 특산품을 납품하기 시작한 뒤로 유례없는 발전을 거두었다. 그들이 만든 도구들은 타 지역에서 만드는 것보다 튼튼하면서도 가벼웠던 만큼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인근의 영주들 역시 자신들과는 놀라울 정도로 다른 성장세를 보이는 에스파에 주목했고, 슬금슬금 그에게 동맹의 손길을 뻗어왔다.

작고 작던 것들이 뭉치기 시작하니 엄청나게 커지는 것이 꼭 눈덩이와 같았다.

나날이 커가는 세력에 클라단에서는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벨로아를 상대하던 것처럼 그들을 찍어 누르고 이간질을 하는 시도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유진은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 않았다. 납작 엎드리는 것에 익숙하다 하나, 그라고 성질머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서, 현재 그들은 클라단과는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런 자신에게 국왕은 밀서 한 통을 보내왔다.

유진이 건조한 투로 말했다.

“클라단 쪽에 보낸 정탐꾼에게서는.”

“별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클라단에 병사들이 모이고 있다고 하지만…. 이즈음엔 훈련 때문에 늘 집결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예년보다 수가 적다던데요.”

“…폭풍이 오기 전이 제일 고요한 법이다. 아니라면 다행인 거지만, 경계를 늦추지 마라.”

알겠다고 기사들이 각을 재어 외치려는 순간, 그들의 앞에 있는 수풀이 흔들렸다. 입을 열었던 그대로 기사들은 정지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일제히 검을 빼어 들었다. 유진은 느긋하게 고삐를 쥐고 소리가 난 쪽을 관망했다. 한참을 바스락거리던 수풀 사이로 무언가가 뛰어나왔다.

“……잠깐.”

움직이려는 기사들을 유진이 한 팔을 들어 제지했다. 산발을 한 머리와 얼굴에 난 생채기, 너덜해진 옷을 입은 남자의 얼굴은 꽤나 익숙했다.

루이스 케라온.

그 역시 유진을 알아봤는지 동공이 커졌다. 하지만 곧 희번덕거리던 눈이 스르륵 감기더니, 이내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유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조금만 더 가면 클라단 영지와 제 영지를 가르는 경계가 나온다. 딱 봐도 도망을 나온 사람의 몰골이니, 필경 추격대가 있을 것이다.

생각을 길게 할 틈이 없었다.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린 유진이 루이스를 어깨에 짊어지고 말안장 위에 올렸다. 곧이어 말에 올라탄 그가 힘껏 소리쳤다.

“돌아간다!”

* * *

아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밀려오는 고통에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울컥 올라오는 비명을 어떻게든 내뱉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살려줘, 살려줘!

“……헉!”

물에 잠겨 있다 올라온 것처럼, 남자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숨을 토해냈다. 안개 속을 헤맬 때처럼 시야가 뿌옇다.

“헉, 허억, 헉…. 콜록.”

깜빡, 깜빡.

온몸에 힘이 없었지만 눈을 움직였다. 흐릿하던 시야가 천천히 선명해졌다. 은은한 갈색이 감도는 천장이 보이고, 제 몸을 받치는 푹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열 오른 머리로 생각했다. 여긴 어디지?

“정신이 든 모양이네요.”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고운 손이 그의 이마를 쓸었다. 미열이 있기는 하지만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여인의 옆에 서 있는 적발의 남자를 발견한 루이스가 눈을 깜빡였다.

“……유진?”

“정신이 듭니까?”

짐덩어리를 보는 것처럼 가늘어진 시선에 루이스는 일순 몸을 움찔했다. 유진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벨, 자리를 좀 피해줄 수 있겠습니까.”

“알겠어요.”

제 부인을 밖으로 내보낸 뒤 유진은 방금 전까지 이자벨이 앉아 있었던 의자에 걸터앉았다. 벌떡 몸을 일으키는 루이스를 바라보는 유진의 시선이 서늘했다.

“생각보단 팔팔하군.”

“지금 며칠이야?”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앓은 지도 이틀이 지났다. 날짜를 알려주자 루이스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 되진 않았네.”

후작과 작위 없는 공작의 아들. 신분이 확연히 달라졌음에도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유진은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어렸을 적, 나약하다는 이유로 후계자의 자질을 의심받던 자신을 유일하게 인정해준 사람이었다.

“네가 날 구해준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고마워. 하지만 어떻게….”

중얼거리듯 말하던 루이스의 눈빛에 곧 의문이 서렸다.

“왜 날 구했어? 내 아버지와 척을 지고 있으면서.”

충성스러운 가신이었던 에스파 가문이 케라온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건, 유진이 작위를 이어받고 난 뒤였다.

그 과정은 마치, 같이 걸어가는 줄 알았던 이가 어느 순간 다른 갈림길 쪽에서 손을 흔드는 것과도 같았다.

알란은 유진을 변절자라 힐난했고, 몇 년 전에는 그와의 교류를 전면 중단했다. 영지에서 나올 일이 거의 없는 만큼 루이스가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유진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왜 자길 구했냐니. 사람 구해주고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사람 죽어가는 꼴을 그냥 내버려 두고 올 만큼 매정하진 않습니다.”

“딱 그만큼 매정하면서.”

다 죽어가는 안색으로도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날카로운 지적에 유진은 할 말이 없어졌다.

루이스의 말대로 그는 남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클라단을 조사하라 이른 국왕의 명과, 얄팍하게나마 남아 있던 어린 시절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버려두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고마워. 이쪽으로 온 보람이 있었네.”

유진은 가만히 한쪽 눈썹을 실룩였다. 역시 도망치고 있었던 건가. 일부러 이쪽으로 왔다고까지 하면서 도망이라는 단어는 입에 담지도 않다니. 보기와 달리 자존심이 강한 건 여전했다.

이 꼴을 하고서도.

유진은 가만히 남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꾀죄죄한 복장도 복장이지만 신고 왔던 소가죽 부츠의 밑이 많이 닳아 있었다. 소지한 물건이라고는 동전들이 들어 있는 주머니가 전부였다.

다행히도 몸에 학대의 흔적은 없었다. 과연 그 정신까지 그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도 없이 여기까지 걸어온 건가. 무모하기는.

“계속 참고 견디더니, 이제는 좀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든 겁니까?”

비아냥거리는 어투에도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만이 돌아왔다. 애초에 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 아니긴 했다. 유진은 그저, 지그시 자신을 응시하는 투명한 눈동자가 거슬렸다. 무척이나.

“자신이 미련하다는 생각 안 합니까? 공작은 절대로 안 바뀝니다. 설득하려 해봐야 의미 없는 일을 어째서 반복하는 겁니까.”

약간의 심술 반, 동정 반을 담아 내뱉은 말에도 루이스는 허탈한 듯 미소 지었다.

“의미가 없다, 라….”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질문했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면, 그게 무엇이든 포기해야 하는 건가?”

유진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루이스가 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부어오른 목으로 힘겹게 침을 삼키고 답했다.

“결과가 나와야만 세상의 모든 게 의미가 있다면 나는 이미 실패작이겠지. 클라단의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적어도 비겁자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

제 처지를 덤덤히 인정하며 루이스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태연한 낯빛과 달리 이불을 꽉 움켜쥐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울 것 같은 눈으로 절대 울지 않는 모습이 비쩍 마른 가지처럼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변하지 않을 거라고 포기한다면, 변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사라지고 말잖아.”

“어리석군요. 그런 꼴이 되고도,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초췌한 안색을 지적하는 어투는 퉁명스러웠으나, 미약한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건 여전했다. 루이스는 그런 사람을 하나 더 알고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누님.’

창문도 없는 방에 연금되어 있던 그를 찾아온 샤를로테는 인사처럼 가볍게 한마디를 꺼냈다. 자신은 이제 곧 수도로 올라갈 거라고. 평소와 같은 인사였으나 그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눈가가 뜨끈했다. 일렁이는 시야를 무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겁니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차가운 돌바닥을 검게 적셨다. 샤를로테는 냉랭히 선언했다.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난다. 일개 개인이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지.’

‘시류는 바꿀 수 없다지만, 그 방향을 약간 틀어버리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걸 주도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갈릴 것이고.’

누구보다 영리하고 성실한 나의 누이, 샤를로테. 그런 누이가 세상의 변화를 아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수십 번은 더 내뱉었던 질문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누님은 정말 그걸로 괜찮습니까?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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