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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61화 (162/171)

제161화. 전야 (6)

뒤따라 멈춘 이렌스 역시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음악 소리 같은데….”

“국왕 폐하의 처소에서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악사를 들이신 걸까요?”

“그런 내밀한 장소에 말입니까?”

“가 보면 알겠죠.”

처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리는 더욱 커졌다. 맑고 흥겨운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서둘러 걸어간 두 사람이 침소의 문 앞에 섰다. 시종과 시녀들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음악 소리가 그들에게로 훅 들이쳤다가, 뚜껑을 닫은 것처럼 뚝 끊겼다.

무의식적으로 침대가 있는 쪽을 가장 먼저 바라본 제라니아는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제니스와 아이라를 발견했다. 그 다음으로,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던 프란츠와 눈을 마주쳤다.

황망한 얼굴을 한 프란츠가 입에 물고 있던 숌1)을 내려놓았다. 세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찰나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프란츠였다.

“…일찍 돌아왔군요.”

“어머니!”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아이들이 일제히 제라니아에게로 달려갔다. 얼떨결에 무릎을 굽힌 제라니아가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두 아이의 눈이 평소보다 더 과하게 반짝거렸다.

“제니스, 아이라. 여기서 뭐 하고 있었니?”

“아버지가 저거 불어줬어!”

“재미있어!”

꺄르르 웃어대던 아이들이 팔을 벌려 붕붕 흔들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제라니아와 달리, 이렌스는 주군이 눈짓으로 축객령을 내리는 것을 감지하고 빠르게 정신을 수습했다.

“흠흠,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 전하도 슬슬 가보셔야 할 시간 아닙니까?”

“에에, 난 더 놀고 싶은데!”

“놀고 싶은데!”

“재미있는 책이 들어왔는데, 보러 가시지 않을 겁니까?”

그에 솔깃했는지 아이들은 이렌스의 손 하나씩을 와락 붙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기운 넘치는 꼬마들을 데리고 자리를 뜨는 이렌스를 뒤로한 채, 제라니아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제라니아는 천천히 걸어 프란츠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보니 악기만 있는 게 아니라, 테이블 위에도 종이로 된 악보가 흩어져 있었다. 신기한 듯 그것들을 구경하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연습하고 있었던 거예요?”

머뭇거리던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낌새를 보니, 나한테 비밀로 하려던 거 같은데….”

“그건…. 아직 연습 중이라 말입니다.”

“네?”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되면 말하려고 했습니다.”

주변에 사람을 물리라 명해두었을 텐데, 갑자기 아이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그도 제법 놀랐다. 입단속을 시키려 한들 어린아이들이라 아마 오래가지 못하고 들키겠지.

골치가 아팠지만, 신기한 것을 보듯 박수 치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싫지 않았다.

구김살 없이 태평하게 웃고 있는 제니스와 아이라를 보고 느꼈다. 이 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구나. 음식을 먹을 때마다 독이 들었나 확인할 필요도, 억지로 의젓해질 필요도 없었다.

그게 뭐라고 이런 기분이 되는지 모르겠다. 심장이 뜀박질을 한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누군가를 위해 연주를 한다면, 당신에게 맨 처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만….”

아이들이 선수를 칠 줄은 몰랐다. 프란츠는 반짝거리는 시선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올망졸망하게 모여 있는 아이들의 얼굴에 실망이 번져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제라니아만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서툴지만, 그는 그 나름대로 아이들을 아끼고 있었다. 제라니아는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왜 갑자기 악기 연주를 시작한 건데요?”

“……취미를 만들어볼까 해서.”

“취미요?”

“당신이, 다른 거에 흥미를 붙여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라니아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프란츠는 고민을 거듭했다.

경쟁자를 처리하고 국가 내정을 관리하며, 입지를 굳히고자 제 편을 만드는 것. 그의 인생은 저 세 가지로 이루어졌다.

정리하자면, 왕자이던 시절부터 국왕이 된 지금까지도 그는 이렇다 할 취미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남성 귀족들이 주로 즐기는 취미라면 보통 수렵이나 토너먼트, 쥬스트2)와 같은 것들이지만, 프란츠는 무언가를 사냥하거나 경쟁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었다.

가끔씩 마상 시합을 관전하러 가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란 인간에게 분노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왕이 되기 전에는 조금씩 자신을 비워냈다면, 이제는 다시 채워야 했다. 비우는 것보다도 채우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나는 뭘 좋아했던가. 고작 이 질문에 대답을 내놓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문득 어릴 때 주워 왔던 강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한 사람이 없어 외롭던 시절에 함께했던 강아지는 1년도 지나지 않아 독이 발린 음식을 주워 먹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 후로 프란츠는 동물을 기르지 않았고, 독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에 와서도 썩 내키지 않았다. 수명이 다르니 이별 역시 빨리 찾아올 테지. 아직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고민 끝에 이것저것을 구해 하나둘씩 시도해봤다. 사흘쯤 해봤을 때 더 하고 싶어지면 계속하고, 아니면 포기한다는 나름의 규칙을 정한 뒤에.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건 몇 가지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악기 연주였다. 노래를 부르는 건 썩 흥미도 없었고 잘 부르지도 못했지만, 음을 연주하는 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다만 왕좌에 앉아 권위를 내세워야 하는 존재가 가지기에는 소박하다 못해 이상한 취미이긴 했다.

성악이 주를 이루고, 기악이 천시되는 시대가 아닌가. 처음 제게 악기를 가르치라 했을 때, 주변의 시종들과 악사의 눈에 어렸던 당황스러운 감정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붙일 것을 찾는 일이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봐야 목적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잘 보여야 하는 건,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설명을 하고 나니 아무리 그라도 좀 멋쩍어 힐끔 시선을 벽으로 돌렸다. 평소라면 곧잘 돌아왔을 대답이 오늘따라 느리다. 제라니아의 얼굴을 돌아보고, 프란츠는 상당히 놀랐다.

“혹시, 이상하다고 생각합니까?”

형용할 수 없는 표정. 제라니아의 지금 얼굴을 설명하라면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겠다. 한 손으로 코와 입가를 가리고 있어,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손사래를 치는 제라니아의 눈가가 꾹꾹 문지른 것처럼 붉었다.

“그냥, 좀 감동해서요. 엄청 진지하게 생각해준 거잖아요. 오히려 나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제라니아는 한숨지었다. 프란츠가 숌을 집어 들고 만지작거렸다.

“한 곡 듣겠습니까?”

“불어줄 수 있어요?”

“……너무 어렵지만 않으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악보들을 뒤적거리던 제라니아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음, 그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로 부탁할게요.”

제라니아가 고른 곡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률을 자랑하는, 민간에서 꽤 많이 통용되는 민요 중 하나였다. 부르기도 어렵지 않고 공감하기도 쉬웠으므로.

궁정에서 연주되는 곡들은 악기가 여럿 들어가는 만큼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반면 대부분의 민요는 악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연주가 가능했다. 혼자서 온전히 다룰 만한 곡을 찾자면, 악보들 중 민요가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평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제라니아는 이런 곡들이 궁중 음악보다도 더 익숙했다. 솔직하게는 꽤 반가웠다.

고개를 끄덕인 프란츠가 숨을 들이마시고, 숌을 불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시작되는 음색은 밝고 따뜻해서, 무미건조한 얼굴로 소리를 내는 남자의 표정과 대비되었다.

제라니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프란츠를 마주 보았다. 곧 눈이 마주치고, 고운 입술이 열리며 흘러가는 선율 위에 부드럽게 가사를 끼얹었다.

화창한 햇살 아래서 새가 지저귀고

나비가 꽃 사이를 누비며

산들바람이 축복하듯

당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날

사랑하는 이들이여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

언젠가 불꽃이 꺼지고 잿더미만 남을지라도

그 기억만은 영원할지니

좋은 날만 있진 않겠지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새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을 때

슬픔에 잠겨 비탄하는 날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무엇이 대수인가

예쁘고 아름답지 않아도

사랑은 사랑이기에 위대하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자

아아, 영원이여

사랑을 하는 자들을 축복하소서

끝나지 않는 내일을….

물결처럼 흐르는 음률이 맑고 청아한 노랫소리를 실어 창문 밖으로 떠나보냈다.

토독, 빗방울 하나가 창문에 달려들어 부딪쳤다. 몰려들었던 먹구름 사이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물감을 덧칠한 듯 어두워진 바깥을 배경으로 화들짝 놀라 비를 피해 뛰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는 자연이 토해내는 거대한 슬픔에 매몰되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요란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것을 뚫고 어디선가 개굴,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 *

슈융, 날아간 화살이 날아가는 새를 맞혔다.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가, 바로 아래로 추락하는 새를 향해 말들이 철벅거리는 흙을 밟고 몰려갔다.

말에서 뛰어내린 기사가 화살이 꽂힌 채, 바닥에서 날개를 가녀리게 퍼덕이고 있는 새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것 보십시오, 주군! 제대로 잡았습니다.”

“그러하냐.”

얼굴이 상기된 기사와 달리, 정작 화살로 새를 맞힌 남자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이 널따란 숲의 주인이자 후작령을 다스리는 남자, 유진 에스파는 말 위에 앉아 심드렁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쪽지 같은 건 묶여 있지 않고?”

“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

턱을 잡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들의 주군에게 기사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각하. 각하께서 명사수이신 거야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이러다 저쪽에서 낌새를 채지 않을지 염려스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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