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전야 (5)
공동묘지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수십, 수백 개의 돌로 된 비석들이 사방에 즐비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놓여 있는 비석의 아래에 돋아난 초록색 풀들이 회색빛 사이사이서 푸르름을 뽐냈다.
겨울의 태양빛이 우중충한 공기를 환기하듯 흠뻑 쏟아졌다. 금빛 먼지가 나풀나풀 허공을 부유했다.
“오늘은 유독 사람이 없네요.”
“지금쯤 일하느라 바쁠 시간이니까요.”
단정하게 묶은 회색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이렌스가 준비해 온 작은 꽃다발을 비석 아래 내려놓는 사이, 제라니아는 이름이 적힌 작은 비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귓가에 들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일라 전하.”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이곳에 올 때마다 두 번에 한 번 꼴로 보는 얼굴이었다. 들꽃으로 엮은 꽃다발을 들고 있던 아일라가 이미 묘지 앞에 놓여 있는 진분홍색 꽃다발에 눈길을 주었다.
“자주 오네요.”
억양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어를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나, 그는 더 이상 입을 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이렌스 역시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까닥인 뒤, 가까이 다가온 아일라가 꽃다발을 무덤가에 놓았다. 물끄러미 비석을 응시하는 옆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감돌았다.
두툼한 천으로 만든 하얀 셔츠와 끈으로 묶어 고정한 검은 바지, 가죽으로 된 부츠까지. 평민 청년이 입을 법한 옷차림을 하고도 그는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그런 예절을 따지고 들 사람 역시 이 자리에는 없었다.
“범인이 잡혔다고 들었어요.”
불쑥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돌아보는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청명하게 빛났다.
“네, 덕분에 엄청 바빴어요. 남은 잔당들을 소탕하느라 좀.”
신전 내에 있는 협력자를 잡아내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관여되어 있는 인물 중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세드릭 산드리아였다.
왜 이런 짓을 벌였냐는 질문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뛰어난 한 사람을 살리고자,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이들을 소모한 게 무엇이 문제냐고. 그 말을 꺼내는 남자의 눈에는 어떠한 의문도 존재하지 않았다.
광기란 이런 걸까.
제라니아를 멀뚱히 쳐다보던 아일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바보 녀석이 들으면 반가울 소식이네요.”
핀의 비석이 자리한 공동묘지는 아일라가 살고 있는 저택과 상당히 가까웠다.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소녀는 왕궁을 나서기 전, 국왕에게 직접 찾아가 제 거처를 정할 수 있게 해달라 요청했다.
다른 왕족들이 항의할 때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국왕은 유일하게 아일라에게만 선택권을 주었다.
그에 일어나던 반발도 아일라가 선택한 장소가 수도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땅값이 낮은 지역인 것이 알려지고 나서는 사그라들었다.
국가에서는 매달 왕족들에게 품위 유지비로 상당한 금액을 지급한다. 그 돈을 가지고도 소년처럼 입고 돌아다니며, 신체가 불편하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이들을 저택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아일라의 기행에도 국왕은 침묵을 고수했다.
제라니아는 언젠가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왜 그런 사람들을 데려와 학교를 열었냐고. 아일라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호의를 받는 데도 순위가 있다면, 가장 마지막 순번에 있을 사람들이라서요.’
권력이 없고 신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왕족들 중에서도 가장 방치되고 외면받으며 자라왔던 소녀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나는 그래도 돌봐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잖아요. 버려져서 죽어가고. 그도 아니면 이용당하고.’
오로지 프란츠만이 소녀를 외면하지 않고, 제 측근을 보내 지식을 가르치게 했다. 아일라는 국왕이 된 프란츠를 피도 눈물도 없다며 손가락질하는 왕족들 사이에서 불평 한마디 없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온전치 않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아니, 사실 보여주지 않아도 좋아요.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고.’
더듬더듬 이야기하면서도 비밀을 털어놓은 듯 홀가분해 보이는 아일라에게 제라니아는 질문했다.
‘전하는, 지금 행복하신가요?’
“그걸 보고하러 찾아온 건가요?”
아일라의 질문에, 제라니아의 옆에 서 있던 이렌스가 대신 답했다.
“예, 뭐…. 그렇습니다.”
‘네, 물론이죠.’ 희미하게 번지는 기억의 파편 사이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렌스는 이럴 시간이 있으면 집에나 가보는 게 어때요. 가족을 혼자 둘 셈이에요?”
이렌스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가족이라니.
“분명 단순한 동업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사감은 전혀 없습니다.”
그는 아일라가 여덟 살일 때부터 그를 가르쳐왔고, 그 작은 소녀가 벌써 열아홉이 되었다.
그런 아일라와 고작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상대에게 도대체 무슨 감정이 생긴단 말인가. 파렴치한 인간들이 세상에 많기야 하다지만 그게 자신은 아니었다.
“솔직히 저보다는 전하를 더 반길 것 같습니다만, 나중에 한번 들르시겠습니까.”
이렌스가 봤을 때, 그 당찬 공녀님께 필요한 상대는 남편보다는 또래 친구였다. 간간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심심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좋아요, 조만간 찾아갈게요.”
딱 한 번, 결혼식장에서 마주쳤지만 좋은 인상을 받았던 건지 아일라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없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니 잎사귀가 물을 머금은 것처럼 활기가 돌았다.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가, 아일라는 이만 가봐야겠다며 그들에게 인사하고 사라졌다. 두 사람은 통통 튀어 가는 활기찬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렌스.”
“예.”
비석 앞에 포개진 꽃들이 바람에 바스스 몸을 떨었다.
“어째서, 세상에는 고통받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까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음성이 허공에 닿아 바스러졌다. 이렌스는 직언했다.
“신분의 격차가, 부의 차이가, 타고난 재능의 유무가 있으니까요. 물론 가진 게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는 자는 불행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해도 행복하다 느끼는 사람은 있겠지만 많진 않겠지요.”
깔끔하고 정석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제라니아는 거침없이 질문을 던졌다.
“사람의 목숨에 경중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 목숨보다 왕비님의 목숨이 더 중하기는 하겠지요.”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이렌스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아, 제라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입술이 무겁게 그 틈새를 벌렸다.
“평생 선하게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을까요?”
와이엇 산드리아의 죄목은 명확했으나, 그를 둘러싼 배경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가 지은 죄는 분명하나, 그가 행한 선 역시 확실했기에.
평생 대신전에 헌신한 치유사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걸귀가 공존하는 사람.
의견이 분분했다. 그를 처형해야 하는지, 평생을 가둬놓고 그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는지.
결국 그에게서 마법을 빼앗고 가장 최악의 사형수들이 노역하는 감옥으로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으나, 머릿속에 들러붙은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이상한 걸까. 마음을 다잡고자 핀의 무덤을 찾았으나, 심란함은 한층 더 가속되어만 갔다.
“이렌스, 나는 두려워요.”
“무엇이 말입니까?”
“내가 과연 끝까지, 지금의 나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쌩하니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낙엽 한 장이 황량한 공동묘지의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총명하게 반짝이는 녹색 눈이 이렌스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그 말씀에는 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미래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솔직한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라니아는 웃음을 흘렸다.
“가끔, 세상을 선악으로만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이렇게 골치 아프지 않아도 될 텐데.”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는 건 익숙했지만 아주 가끔은 지칠 때가 있었다. 반듯하게 잘 뻗은 길을 외면하고 억세게 자란 풀밭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 이럴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해요. 삶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긍정적인 것들도, 부정적인 것들도 쌓여가기 마련이다. 빛이 있으면 자연히 어둠이 존재하니까.
“단순하게 사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것 역시 특권일 테지요.”
제라니아는 고개를 돌려 무덤가를 바라보았다. 이미 죽고 없는 소년이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과거에 멈춰 선 핀,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메리. 돕고자 한 건 같았지만 그 끝이 다른 두 아이를 떠올리니 입맛이 썼다. 삶이란 이토록 변화무쌍하고 비정하다.
비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뱉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과연 누구한테 말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렌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당신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닐까.
소곤거리듯 작게 덧붙이는 음성이 마치 맹세처럼 들렸다.
“내가 쌓아가고, 짊어져야 할 무수한 업보로부터.”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점차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피해 제라니아는 일찍 왕궁으로 귀환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제라니아의 등 뒤를 이렌스가 바짝 따라붙었고, 그 뒤로 시녀들이 세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맞다, 오늘 얘기는 비밀이에요.”
슬쩍 고개를 돌린 제라니아가 입가에 검지를 올리고 쉿, 소리를 냈다.
“국왕 폐하께도 말입니까?”
낮게 속삭이자 제라니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하는 그들의 주변으로 궁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하는 이들에게 제라니아는 살며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사람은 이런 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잖아요. 내가 원하기 때문에 어울려주는 것뿐이지.”
“저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군요.”
“아니에요?”
“맞습니다.”
이렌스는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예의는 깍듯하면서 의견을 내놓는 데는 망설임이 없어, 대화 상대로는 제격이었다. 신분의 고하가 없었다면 분명 좋은 동료 사이라고 부를 만할 텐데.
겉으로만 보면 더없이 무심해 보이지만, 의외로 섬세한 면모도 있었다. 예를 들면.
“왕비님,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요.”
“저는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럴 때라든가.
그 나름대로의 격려를 담은 말에 제라니아는 미소로 화답했다.
“나도 같은 생각…. 어?”
처소로 향하는 모퉁이를 도는 순간, 희미한 음률이 귓가를 맴도는 것에 제라니아는 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