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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59화 (160/171)
  • 제159화. 전야 (4)

    저게 무슨 일이지. 멀리서 보아도 심상찮은 광경에 크리스토퍼는 문지기를 돌아보았다가, 슬쩍 열린 정문 안쪽으로 발걸음을 디뎠다.

    크리스토퍼를 알아본 집사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칼리아 공녀.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꽤 번듯하게 생긴 남자가 절절하게 호소하는 모습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 했으나, 칼리아는 덤덤히 대답했다.

    “호칭을 헷갈리신 모양입니다. 바이첸 백작이라 불러달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 말과 함께 칼리아는 붙잡힌 손을 비틀어 빼냈다. 팔짱을 끼고 남자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인형과 같이 무표정했다.

    “예의를 차리실 줄 아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던가요?”

    입술을 짓씹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목 안을 빙빙 맴돌고 있던 말을 쥐어짜듯이 토해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마음은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몇 번을 오신다 해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혼신을 다한 고백에도 쌀쌀맞은 반응에 남자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어떻게 하면, 청혼을 받아주실 겁니까?”

    “청혼을 받고 말고를 떠나,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낮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리던 칼리아가 집사의 뒤에 서 있는 크리스토퍼를 발견했다. 네가 왜 여기 있냐는 듯한 눈빛에 크리스토퍼는 멋쩍게 눈만 깜빡였다.

    “혹시, 마음에 두고 계신 상대라도 있는 겁니까?”

    시기 좋게 치고 들어온 질문에 크리스토퍼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으나, 칼리아는 태연하게 시선을 거뒀다.

    아무리 사저라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지금도 힐끔힐끔 자신들을 살피는 여러 쌍의 시선이 골치 아프던 차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결혼할 생각 역시 없고요.”

    뭐라 말을 더 꺼내려는 남자에게 칼리아는 다시금 축객령을 내렸다.

    “돌아가세요.”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야?”

    움직이지 않으려고 버티는 남자를 고용인들을 시켜 끌어낸 다음, 칼리아는 그를 데리고 응접실로 이동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본디 말재주가 좋은 편도 아니었다. 소파에 앉은 채 어색하게 눈만 되록되록 굴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분홍빛 눈동자가 무심하게 훑었다.

    “방금 일을 신경 쓰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너랑 아무 상관 없으니까. 내재된 의미를 읽어낸 크리스토퍼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백작이 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래. 그 때문에 한바탕 난리지. 그 말을 하려고 온 거야?”

    “…아까 그 남자와 같은 일이 자주 있습니까?”

    어설프게 말을 돌리자, 칼리아의 입가에 찬찬히 미소가 떠올랐다.

    “상당하지.”

    피로가 얹힌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요즘 들어 더 극성이라며 칼리아는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매일같이 편지가 오고 있어. 무시로 일관했더니, 아까처럼 직접 방문하려는 자들도 나오더군.”

    “조심하십시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외출할 때는 호위를 꼭 대동하고 있어.”

    아직 납치 시도를 겪은 건 아니지만, 일이야 언제든지 터질 수 있었다. 지금처럼 집으로 찾아오는 정도면 차라리 양호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위험을 끌어안고 살겠노라 말하는 얼굴이 정말로 초연했다.

    결혼을 하면 서로가 가진 재산은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되지만, 아내는 남편의 동의 없이 재산을 처분할 수 없다.

    하지만 남편은 배우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재산을 처분할 수 있었다. 제가 백작이 되었다 한들, 법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리고, 구혼을 하는 이들은 장자가 아니라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거나 가문이 한미한 귀족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상황을 손바닥에 꿰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만큼, 칼리아는 한껏 입가에 비웃음을 내걸었다.

    “그 남자도 그래. 지금은 나한테 그렇게 애원하면서도, 나가서는 내 험담을 하고 다닐걸.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크리스토퍼의 표정을 살피던 칼리아가 툭 말을 꺼냈다.

    “그리고 전부터 말했지만, 나한테 부채감 느낄 필요 없어.”

    “예?”

    “내가 너한테 고백한 건, 내 마음 정리하려고 그런 거였다니까. 네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냉정하군요.”

    자신을 거절한 상대를 두고도 더없이 차분하게 구는 모습이 신기했다. 사람인 이상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무언가를 바라게 되지 않나.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이네.”

    어리둥절한 눈을 한 크리스토퍼를 지그시 마주 보았다. 이루어질 수 없다면 최소한 어색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이었으므로.

    “그런데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그래 보입니까?”

    “너랑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그 정도를 모를 리가. 그래서, 무슨 일인데?”

    붉은 기가 도는 깨끗한 분홍빛 홍채가 그의 푸른 눈을 한껏 머금었다. 얼굴부터 자세, 동작까지 우아하지 않은 곳이 없는 사람이다. 늘 무료해 보이는 시선에 감정이 담기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얼굴을 보자, 묘한 충동이 불쑥 튀어나왔다.

    기이한 동질감이 그를 감쌌다.

    “왜 백작이 되시기로 한 겁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칼리아의 눈썹이 곱게 휘었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백작이 되고 싶었으니까.”

    무척 간단해서, 허탈해지기까지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위험에 몸을 던지면서까지 말입니까?”

    “그러게. 내가 남자였다면 무척 간단하게 끝날 일이, 참 쉽지가 않네.”

    백작위를 받기까지 다른 이들보다도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마저도 아이작의 권위와 제라니아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럼에도 최초라는 말에는 의미가 있었다.

    선례란 가능성을 만들기 마련이므로.

    “남한테 인정받아야만 내 자신의 가치가 인정되는 게 싫어서, 어떻게 할지 고민해봤어.”

    칼리아 바이첸은 아름다웠다. 아마 그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왕국에 없을 것이다.

    ‘따님이 정말 예쁘시군요, 공작님. 커서 한 미모 하겠습니다.’

    ‘저토록 우아한 손짓과 미소라니, 마치 한 떨기 장미꽃과도 같군요.’

    ‘공녀께서 새를 좋아하신다 하여 가져왔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공녀님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우세요?’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부터 미모로 유명했고, 데뷔탕트를 거치고는 뭇 젊은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으며, 최고의 미인이라는 찬사를 당연하게 들어온 삶.

    분명 남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인데, 간간이 가슴이 선득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꺄아악!’

    ‘코델리아, 이게 무슨 짓이냐!’

    모름지기 가까운 형제가 뛰어나면, 자연히 주변에 비교되기 마련이다.

    자신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제라니아는 언제나 비교당해야 했다. 성내에서도 은연중에 제라니아를 동정하는 여론이 돌던 시기였다.

    코델리아의 기행은 바로 그러던 시기에 벌어졌다.

    이제 막 열 살이 된 소녀는 체력이 넘치는 만큼이나 거침없었다. 가위를 들어 제 머리를 삐뚤빼뚤 잘라버린 코델리아의 모습에 부모님은 경악했고, 프레드릭은 이마를 짚었다. 제라니아와 자신 역시도 크게 놀랐다.

    하지만, 보기 흉하다는 말에 코델리아는 씨익 웃었다.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는 얼굴이 해맑았다.

    ‘그치? 나는 이제 예쁘지 않으니까! 다들 둘째 언니한테 뭐라 하지 않겠지!’

    웃으며 소리치는 막내의 모습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이날의 일은 칼리아에게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보게 했다.

    칼리아는 살면서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했으니까. 아름다워야 하는 건 일종의 의무와도 같았다.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생각하니, 그 다음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을 빼면, 내게서 과연 무엇이 남나?

    “나는 제라니아처럼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코델리아처럼 자기 특기가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아름답게 치장하고 남들 앞에 전시되어 있을 수 있을 뿐이야.”

    고저 없는 음성과 달리 그 내용은 제법 신랄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장기적으로 내 미래에 과연 이득일까?”

    다른 여인들과 같이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아이를 갖고, 영지를 돌보고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나는 정말로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건가?

    “오래 생각해 봤지만, 역시 아니라는 결론이 났어.”

    칼리아는 가볍게 제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도도하게 턱을 치켜드는 여인의 눈동자가 청명하게 빛났다.

    “거창한 이유는 없고, 그냥 그게 다야. 내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 것뿐이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거든.”

    싱긋 웃으며 덧붙이는 얼굴 위로 제라니아의 모습이 겹쳐졌다. 외양은 전혀 닮지 않아 가끔 자매가 맞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지만, 이럴 때면 그들이 한 핏줄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평생 이러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살겠다는데, 누가 내게 간섭할 수 있지?”

    칼리아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휘둘려야만 하는 삶 따윈 질색이다. 그 상대가 눈앞의 이 남자일지라도.

    사랑은 그래서 성가셨다. 비가 온 뒤 질척하게 젖어 신발에 달라붙은 흙처럼, 쉽게 떨어지질 않아서.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늘 침착하고 냉랭하던 얼굴에 갖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묘하게 들떠 보이는 칼리아를 보며 크리스토퍼는 조용히 되물었다.

    “남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는 않습니까?”

    “신경이 쓰이지. 나 때문에 휘말리게 될 사람들한테도 미안하고. 근데 거기까지야. 내가 모든 사람의 사정을 전부 고려할 순 없잖아?”

    결혼을 하지 않은 걸 제외하면, 나름 착한 딸로 자라왔다고 생각한다. 가출을 감행하거나 머리를 싹둑 자르는 동생들에 비하면 제법 순탄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니, 이 정도는 허락되겠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그렇다 해서 지금의 내 결정이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결과를 추구하는 건 중요하지만, 집착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고.”

    피곤한 일투성이겠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미지의 길로 나아가는 건 두렵기도 하고, 그만큼 설레기도 했다.

    “내 감정에 충실하고 싶어. 그뿐이야.”

    “…….”

    “왜 그런 표정인데?”

    너 역시 내게 잔소리를 할 거냐. 그렇게 묻는 시선에 크리스토퍼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명쾌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부러울 정도로.

    그 말을 삼키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크리스토퍼를 칼리아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돌아가게?”

    “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왔는데, 무례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예의를 차려? 낯간지럽게.”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칼리아의 발치에서 새까만 드레스가 움직임을 따라 나풀거렸다. 크리스토퍼는 칼리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들고 손등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오늘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이첸 백작님.”

    푸른 대지가 당신의 앞날을 수호할지니.

    옛 왕국의 관습대로 정중한 작별 인사를 남기고, 그는 닫혀 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려고 했다.

    제 손목을 붙드는 손길에 크리스토퍼는 뒤를 돌아보았다. 붙잡은 건 본인이면서, 자신보다 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칼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여인은 굳이 불안함을 숨기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왜 그러십니까?”

    칼리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게, 내가 왜 널 붙잡고 있을까. 방금 전 돌아서는 그의 등이 이상하게 너무 멀어 보여서, 꼭 어딘가로 멀리 가버릴 것만 같아 불안했다. 남자의 손목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미련이 남은 건가.

    “아니야, 아무것도. 일이 정리되면 조만간 또 얼굴 보자.”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던 크리스토퍼가 알겠다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그제야 칼리아는 느릿하게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며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선득해지는 가슴을 애써 외면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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