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58화 (159/171)

제158화. 전야 (3)

“형님, 기다려!”

엇갈리는 발걸음 소리에 섞여,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우렁찼다.

철저히 무시하려는 듯 성큼성큼 걷기만 하는 크리스토퍼의 어깨를 루크의 손이 거칠게 붙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루크의 얼굴이 보였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불만?”

“그래, 불만. 그 여자는 결혼했잖아! 언제까지 미련을 떨 건데?”

어두운 복도를 따라 은은하게 빛을 내는 벽등이 두 사람의 표정을 흐릿하게나마 드러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의견과 제라니아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러니 헛소리 그만하라고 말하려던 찰나, 루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형님이 이렇게 결단력 없는 사람일 줄 몰랐는데, 다시 봤네. 죽은 셀리나가 무덤에서 통곡하겠어.”

마지막 문장을 듣자마자 크리스토퍼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거칠게 제 어깨에 올려져 있던 손을 털어냈다.

“어쩌다, 악!”

루크는 제 멱살을 우악스럽게 붙잡는 손에 이어,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했다. 꿀꺽, 침을 삼키는 동생을 노려보며 그는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더 지껄여 봐. 셀리나가, 뭐라고?”

“…….”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난 한 번도 그 애를 잊은 적 없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차갑게 부패하기 시작한 몸, 거무스름해지기 시작한 피부, 굳건하게 다물린 눈과 입술.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여동생의 모습을 보았을 때, 분노를 달래고자 꽉 쥔 주먹을 따끔하게 찌르던 손톱의 감촉까지도.

“원통하고 억울해. 셀리나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아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크리스토퍼의 눈에 붉은 핏발이 섰다. 그는 이를 악물고 동생의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손가락 두 뼘 정도의 거리를 둔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얘기하는 게 좋겠네. 잘 들어, 루크.”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셀리나를 죽인 범인은 이미 잡혔어. 물론 억울하고 분하지. 하지만 그 애를 죽인 주체는 왕실이 아니야.”

제라니아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니 이 문제에 있어 셀리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나 역시 데릭 왕자에게 실망했고, 이 일을 숨기고 넘어가려고 한 왕실에 화가 났지만 거기까지야. 거기서 끝내야 한다고. 원망을 이어가고자 한다면 한도 끝도 없어.”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 불퉁한 시선을 보내는 루크에게 크리스토퍼가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정말 우리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

아무리 셀리나가 원했다지만, 왕실과의 교류를 위한 발판으로 그 애를 이용한 건 자신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책임을 지운다면 자신들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루크가 눈을 치켜들고, 반항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형님의 결정에 아무런 사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반대해? 모두가 바라는 일이잖아. 형님만 수긍하면 된다고.”

크리스토퍼가 픽 웃음을 흘렸다.

“가문의 사활이 걸린 일이야.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없어. 반란이 말처럼 간단한 줄 아는 거냐?”

선왕이 재위했던 시절에도 그들은 크레이츠를 이기지 못했다.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해도 좋을 지금, 과연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회의적인 감정이 명치를 꾹 조여 왔다.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냉정해져야 한다고.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줘야 해?”

“…….”

“할 말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

크리스토퍼가 잡고 있던 멱살을 내팽개쳤다. 콜록거리는 동생을 뒤로한 채 움직이려던 크리스토퍼는 저를 붙잡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적당히 좀 해!”

목을 부여잡고 소리를 쥐어짜 내는 루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이성적이라서 좋겠네, 형님은. 냉정하고 고고하신 형님, 아버지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생각해본 적 없어? 형님을, 우리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

비아냥대는 음성이 사정없이 마음을 푹 찌르고 후벼 팠다. 말이 없는 크리스토퍼에게 루크는 재차 말했다.

“형님이 뭐라고 하든, 이미 결정은 내려졌어. 설마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셈은 아니지? 그럴 거라면, 난 더 이상 형님을 존중할 수 없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루크는 크리스토퍼가 가문을 배신할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평생 일탈이라고는 모르던, 존경과 질투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던 제 하나뿐인 형. 가문을 위해 헌신하던 그가 이제 와서 등을 돌릴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감정은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혼처를 고사할 정도로 좋아하던 상대와 적대해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휴스타인의 적법한 후계로서, 난 내 역할에 충실할 거다.”

그 말만을 남기고 걸어가는 크리스토퍼를, 루크는 붙잡을 수 없었다.

촤악,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검이 그의 급소를 노렸다. 재빨리 막아내는 크리스토퍼의 얼굴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마자 상대는 다시금 같은 곳을 겨냥했다. 부드럽게 흘려 넘기며 크리스토퍼는 반격을 개시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곧 검 한 자루가 천장을 향해 뱅글뱅글 돌며 솟아올랐다. 공중을 날아간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제 목에 닿은 칼등의 감촉이 선득했다.

“졌습니다.”

항복이라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자, 샤를로테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환호성이 평소보다 현저히 작았지만, 언제나와 같이 무시했다. 제 검을 주워든 크리스토퍼가 샤를로테와 가볍게 악수를 했다.

실내에 마련되어 있는 연무장에는 후끈한 열기가 가득했다. 짙어진 땀 냄새가 코를 짓이겼다. 낮인데도 바깥은 상당히 어두웠고, 축축한 공기가 열린 문 안쪽으로 스며들어 왔다.

대련을 구경하던 기사들의 뒤로 물러서 구석으로 간 두 사람은 각자 가지고 온 천으로 얼굴을 닦았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시야를 흐렸다.

“비가 오는군요.”

묵묵히 천으로 얼굴을 닦아내던 샤를로테가 대답 아닌 대답을 건넸다.

“오늘따라 집중을 못 하는 것 같던데요.”

“솔직하게 말하면, 그랬습니다.”

“그런 날도 있는 거겠지요.”

더는 물어볼 생각이 없는지, 샤를로테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벽에 등을 기대며 크리스토퍼는 샤를로테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도 사교성 없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눈앞의 사람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저보다도 과묵하고 차분했다. 제라니아와 있을 때는 제법 말이 많던데, 낯을 가리는 건가.

“왜 그렇게 보십니까?”

“말수가 적으시구나 싶어서요.”

“말이 많아봐야 약점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물론, 그런 것치고는 대답에 망설임이 없고 솔직하긴 했다. 딱히 무언가를 숨겨야 하는 사람의 태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한마디에서 여인이 거쳐 왔을 고난의 세월이 엿보였다.

실력만 따진다면 윌터 케라온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한 검사가, 저 나이가 되도록 영지에 파묻혀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겠지.

기사단에 여자가 없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이 문서 정리나 보조를 맡았을 뿐 전면에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현왕이 즉위하고 난 뒤 외부에서 활동하는 여성 기사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샤를로테 케라온은 그중 하나였다.

왕실 기사단에 들어오는 최초의 여성 기사인 만큼 기사단원들은 처음에는 그를 홀대했다.

대련에서 기사단의 절반을 해치웠을 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곁에 오거나 말을 거는 이는 초반과 마찬가지로 드물었다.

같은 핏줄인 윌터와는 그 취급이 전혀 달라서, 그에 대한 반발심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자신과 그의 사이를 의심하는 이들도 간혹 보였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정말, 괜찮습니까?”

나직한 목소리에 샤를로테의 고개가 느릿하게 그를 향했다.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걸까. 차분하고 고요한 눈동자에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담겼다.

“당신은 괜찮지 않은 겁니까?”

날카롭게 되묻는 것에 크리스토퍼는 조용히 눈만 깜빡였다. 때를 맞춘 듯 연무장 중앙에서 또다시 요란한 고함 소리가 터졌다. 꿉꿉한 공기와 흐린 날씨조차 내부의 활기를 거두어 가지는 못했다.

밝게 떠드는 이들을 바라보는 크리스토퍼의 눈빛이 깊게 침잠했다.

“승산이 있다 생각합니까.”

옆 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음성에 샤를로테는 단호하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승산이 없다면 만들면 되니까요.”

얼핏 듣기에는 승부에 대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자신감이 과하다 느껴지는 윌터와는 다르게 고저 없는 음성에선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 느껴지는 순간은 오로지 검을 잡을 때뿐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는 보이는 것만큼 무뚝뚝하고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숨기는 것에 굉장히 익숙해진 사람이 아닐까 하는.

“걱정하고 있군요.”

제라니아 리나엔을.

크리스토퍼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그와 왕비가 소꿉친구 사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놀랄 것도 없었다.

우유부단한 반응에도 질책하지 않는 샤를로테를 그가 퍽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는 당신은 아닙니까?”

샤를로테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찰나에 드러난 동요를 능숙하게 묻어두며 나직이 단언했다.

“……변하는 건 없습니다.”

아무것도.

“…어지간히도 정신이 없군.”

커다란 저택을 올려다보며 크리스토퍼는 헛웃음을 흘렸다. 가만히 집에만 있으려니 생각만 많아지는 통에, 시내로 나와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바이첸 공작저.

수도에 올라온 뒤로 가장 자주 방문했던 장소라 그런 걸까. 지금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라니아가 웃으며 자신을 반겨줄 것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돌아가자.

“어, 크리스토퍼 경이 아니십니까!”

철창으로 된 정문 앞에 서 있던 문지기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모르는 척 지나가기엔 기회를 놓친 터라,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문지기는 무슨 일로 방문했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냥 걷다 보니 도착지가 여기였을 뿐이라.

“손님이 온 겁니까?”

정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가문 고유의 문장으로 보이는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눈짓하자 문지기는 말끝을 흐렸다.

“아, 예. 그런데 그게….”

그가 뭐라 덧붙이기도 전, 대문이 벌컥 열렸다. 환기를 시키려는 것처럼 활짝 문을 열어젖힌 집사의 뒤로 시선을 옮기던 크리스토퍼는 생경한 장면에 눈을 크게 떴다.

우아하게 서 있는 칼리아와, 그런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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