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57화 (158/171)

제157화. 전야 (2)

제라니아는 다 식어가는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멀뚱히 제라니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리암이 불쑥 말을 꺼냈다.

“제니스 전하랑 아이라 전하는 잘 지내?”

“응. 아이라는 많이 컸어. 어찌나 활발하게 움직이는지 나도 가끔 놀아주다 지치더라고.”

“미하일이랑은 딴판이네. 걔는 움직이기를 정말 귀찮아해서.”

누굴 닮아 그런 건지 모르겠다며 리암은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너지. 제라니아의 반박에 억울하다는 듯 그가 눈썹을 휙 올렸다. 반격이 들어오기 전에 제라니아는 화제를 전환했다.

“아이라랑 미하일이 동갑이던가?”

“그렇지. 걔가 늦겨울에 태어났으니까…. 3개월쯤 차이 나네.”

“나중에 얼굴 보긴 할 텐데, 둘이 잘 지내려나….”

“글쎄. 딱 봐도 안 맞을 것 같은데….”

“우리도 성격이 다르지만 잘 지내잖아. 걔네도 그럴지 누가 알아.”

머리를 긁적이던 리암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말았다.

“그럼, 조만간 초상화를 새로 그려야겠네.”

“봄이 오면 그럴 생각이야.”

“올해 겨울도 추울 것 같다던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그럴게.”

이후를 기약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 봄의 햇살처럼 찬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크리스토퍼는 그러니까, 아무래도 좀 곤란했다.

수많은 얼굴들이 자신을 일제히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란! 회랑의 벽에 걸려 있는 수많은 초상화들을 무시하며 크리스토퍼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국왕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에 흐릿하게 형체가 번졌다.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앞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걸음걸이는 단정했으나, 속도는 꽤 느렸다.

네모난 형태로 이어져 있는 네 개의 회랑은 역대 국왕 일가의 초상화를 보관하는 곳으로, 오직 국왕과 그의 가족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장소였다. 허락 없이 들어왔다가는 경을 칠 수 있었다.

안에는 국왕과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혹여 딴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 이러나. 잡스런 생각을 털어내려 고개를 흔드는 그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꽂혔다.

“크리스토퍼 경.”

“예, 여기 있습니다.”

긴장을 숨기고 대답했다. 국왕은 어느새 복도의 끝에 가 있었다. 회랑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은 방으로 따라 들어가자, 커다란 그림 한 장이 보였다.

넓은 벽의 가운데에 걸려 있는 커다란 초상화. 유화 물감을 사용해 국왕 부부를 섬세하게 그려낸 그림이 그를 맞이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제라니아의 녹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자, 크리스토퍼는 화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덤덤히 그림을 올려다보고 있던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기사단장 자리를 거절했다 들었다.”

“예.”

“이유가 뭐지?”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국왕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겸손이 과하군. 나이든 경력이든, 이미 충분하지 않나? 부단장 자리를 거절하길래, 더 높은 자리를 원하나 싶었더니.”

국왕의 지적은 타당했다. 왕실 기사단에서 손꼽히는 검술 실력과 손꼽히게 괜찮은 집안, 침착한 성격에 인망도 확실했다. 오히려 그가 왜 아직도 일개 기사단원으로 남아 있는지가 의문이 될 정도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평소에 과묵한 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크리스토퍼는 지금 이 순간, 국왕의 안에서도 제가 그런 인상이기를 바랐다.

평소와 같아 보이기를. 무슨 일이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하도록.

“그래? 나는 영락없이, 나와 거리를 두려는 걸로 생각했지 뭔가.”

정곡을 찌르는 목소리에 크리스토퍼는 주먹을 꽉 쥐었다. 국왕은 여전히 여유롭고 느긋했다. 지나가듯 가볍게 툭 던지는 말들에 과하게 동요할 필요는 없다.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왜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그대가 그 자리에 걸맞은 인재이기 때문이지.”

저의 충심을 정말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을 애써 내리누르고 표정을 정돈했다. 그제야 국왕은 천천히 뒤를 돌아 크리스토퍼를 응시했다.

국왕의 몸이 절묘하게 초상화를 가리고 있어, 마치 그가 초상화 안에 그려져 있는 것만 같았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공작은 잘 지내나? 요즘 들어 소식이 영 없던데.”

“……아버지께서는 잘 지내십니다.”

“그래….”

약간의 공백 끝에 대답하는 크리스토퍼의 목울대가 완만하게 오르내렸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아까부터 불길하게 일렁이던 예감이 점점 실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혹시, 무언가를 알고 자신을 떠보는 걸까. 아무도 없는 장소를 선택한 건 그래서?

하지만, 정말 그렇다 해도 위험하지 않은가. 어쩌면 제가 칼을 휘두를 것까지 계산하고 저러는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꼼짝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내가 영 껄끄럽다면, 왕비는 어떤가.”

“예?”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왕비를 위해서 그 자리에 선다고 생각하면 의욕이 나겠나.”

두서없이 튀어가는 대화에 크리스토퍼는 어안이 벙벙했다. 제 마음을 알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죄송합니다.”

거절의 말을 입에 올리며 꽉 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폈다.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가락이 저릿저릿했다. 불쑥 튀어나온 의문을 혀로 밀어냈다.

“왜 그렇게까지, 저를 그 자리에 영입하려 하십니까?”

집요하게 권유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아는 국왕 폐하는 언제나 깔끔하고 냉정했다. 필요하지 않다면 과감히 쳐내는, 가끔은 피도 눈물도 없다 느껴질 정도로 단호한 성격.

자신이 기사단장에 어울린다고는 하나, 찾으려고 한다면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대체할 수 없는 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불경한 생각이지만 어쩌면, 본인조차도 국가의 부속품쯤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대의 이런 태도가 의아했다.

뜻밖에도 국왕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를 크리스토퍼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린 채 고민하던 국왕은 곧 손을 내렸다.

“글쎄. 딱히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네. 그저 그대가 적격이라고 생각해서 권유한 것뿐이야.”

미소 띤 얼굴로 고저 없이 말하던 예전과 달리 목소리에 온기가 있었다. 그에 크리스토퍼는 꽤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보다도 더, 국왕 본인이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아니면, 꼭 거절해야만 하는 다른 이유라도 있나?”

저를 꿰뚫어보듯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에 숨이 턱 막혔다. 크리스토퍼는 간신히 혀를 굴려 입에 담았다.

“없습니다.”

진심을 담은 거짓을.

* * *

쌀쌀한 밤공기가 창문을 두드리며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온갖 문양이 수놓아진 둥그렇고 붉은 모직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벽난로에 넣어둔 장작들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일렁이는 불꽃이 서늘한 방 안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소파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휴스타인 삼 형제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아론을 마주 보고 서 있는 크리스토퍼, 루크와 달리 네이선은 아버지의 뒤에 서서 소파를 한 손으로 꼭 붙잡고 있었다. 비어 있는 누군가의 자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온화하고 평화로워야 할 가족 모임에는 유례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독립을 선언하는 걸로 끝낼 수는 없겠습니까.”

세 쌍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희에겐 충분한 군사력이 있습니다. 쳐들어가는 건 위험하더라도, 영지를 지킬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크레이츠는 예전보다 부강해졌지만, 저희라고 성장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겁부터 먹고 꼬리를 내리자는 거야?”

뭐라 더 떠들려던 루크는 아론의 손짓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차분한 목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크리스토퍼. 너도 알지 않느냐. 그건 불가능해.”

고개를 내젓는 아론의 눈가 아래로 긴 그림자가 졌다.

“그쪽에서 순순히 우리의 독립을 허용할 리 없어. 희생이 나지 않을 수는 없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공격은 방어보다 많은 위험을 짊어져야 합니다. 반란은 실패하면 죽음뿐입니다.”

“대신, 성공하면 혁명이 되겠지. 역사는 승자의 것이니까.”

무릎까지 오는 테이블 위에 편지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아론은 그것을 집어 들어 팔랑팔랑 흔들었다.

“트라이탄의 마법사들에게 은밀하게 서신을 보냈던 게 최근 도착했다. 우리에게 힘을 보태 주겠다고 하더군. 루미테인 공작도 준비를 마쳤다고 연락을 보냈고.”

“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루크가 호들갑을 떨었으나, 크리스토퍼의 눈빛에 새겨진 걱정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아버지, 한 가지만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말하거라.”

“케라온을 믿을 수 있습니까?”

크리스토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조용히 큰아들을 올려다보고 있던 아론이 입을 열었다.

“그럼 반대로 묻지. 너는 왕실을 믿을 수 있느냐.”

제라니아 리나엔을 믿을 수 있냐고, 그렇게 묻는 아버지의 시선에 크리스토퍼는 차분히 답했다.

“선대 국왕이 군림하던 때와 지금이 많이 달라졌다는 건 아버지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아론은 선선히 인정했다.

“많은 게 달라졌지.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제라니아 리나엔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 크리스토퍼에게 아론은 현실을 상기시켰다.

“우리의 출신을 생각하면, 이런 차별에서 언제까지고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저항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먹히고 말겠지.”

알고 있다. 이것은 이권의 문제였다. 모두가 기사도를 외치지만 실상은 자신의 권리를 따지고자 움직이는 것처럼.

도의니 뭐니, 그런 가치는 국가 대 국가 사이에서는 사실 크게 의미가 없다. 명분으로 내걸 수는 있지만 국가가 움직이는 원리와 상통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케라온을 믿냐고 물었지.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아. 그들과 우리의 군사력이 비등한 이상, 그쪽이라고 섣불리 우리를 배신할 수는 없을 거다. 알란 케라온이라고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믿을 거란 착각은 하지 않을 테니.”

아버지는 이득을 계산하고 결론을 내린 것뿐이다. 그걸 아는데도 입 안이 썼다.

“아니면, 너의 지금 태도는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감정의 발로인 것이냐.”

쐐기를 박는 한마디에 크리스토퍼는 숨이 턱 막혔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어떻게 오해한 건지 루크와 네이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제가, 고작 그런 감정 하나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걸로 보이십니까?”

침착하기만 하던 크리스토퍼의 눈빛에 선연하게 날이 섰다. 끓어오르는 화를 내리누르며 그는 목소리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솔직하게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모합니다. 프란츠 리나엔을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오. 10년도 훨씬 전부터, 이 나라의 내정을 안정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게 누군지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국왕 부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자신일 것이다. 지켜보았던 세월이 있으니까.

제라니아도 그렇지만, 국왕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크리스토퍼는 제가 가진 답답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바이첸 공작이 물러난 지 한참 되었는데도, 이 나라는 더는 위태롭지 않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정녕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아론은 잠시 말이 없었다. 위태로운 침묵이 이어지다, 나직한 한마디에 뚝 끊겼다.

“그는 전쟁을 직접 겪은 적이 없는 남자다. 내정에는 강할지 모르나, 전술에 관해서는 무지할 테지.”

“대신 주위에 뛰어난 이들을 두고 있습니다. 지휘관도 그렇거니와, 군사들도 그렇고요. 단언컨대, 왕국군의 수준은 켄드릭 선왕 때와 기량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허를 찔러야겠지. 정세를 보아하니 아마, 최적의 순간이 머지않았을 게다. 조만간 다시 수도로 올라가야겠구나.”

“아버지.”

“크리스토퍼. 계속 미적거리다간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가게 될 거다. 그땐 이미 늦었겠지.”

그 한마디로 크리스토퍼의 입을 봉해버린 아론이 나직이 선언했다.

“곧 서신을 보낼 터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거사 전까지 입단속을 단단히 해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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