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전야 (1)
리암을 데리고 제라니아는 야외 테라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겨울의 초입이라 그런지 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햇빛은 따사로웠다.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이 바닥에 수북하게 쌓였다.
곧이어 시녀들이 간단한 다과와 차를 내어 왔다. 차를 즐기지 않는 리암의 앞에는 따뜻한 우유에 꿀을 첨가한 잔이 놓였다.
“진짜 오랜만이네. 한 달은 더 일찍 얼굴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어쩌다 보니.”
슬쩍 딴청을 피우는 리암을 보며 제라니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너 일부러 출발을 미뤘지?”
“당연하지. 얘기만 들어봐도 가관이던데.”
아비스 와이엇을 둘러싼 재판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사후 처리는 만만치 않았다. 대신전의 수장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사람들을 기만해 왔다는 게 알려지고, 국민들은 뼛속 깊이 분노했다.
오래도록 이 땅의 국민들과 함께해온 만큼, 왕국에서 프란의 영향력은 무척이나 컸다.
비단 마법사를 보유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토착민들과의 사이에서 구축되어 있던 신뢰야말로 신전이 가진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였다.
두터운 기둥처럼 세워져 있던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린 만큼, 그 반동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나라 곳곳에서 반발이 일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이들은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으나, 유가족들은 대신전 앞으로 몰려가 이번 사건에 관해 제대로 된 대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신전은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아비스를 파면하고, 왕실과 협조해 이 사건을 끝까지 마무리할 것을 약속했으나 분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몇몇 이들은 근처에 있는 신전에 테러를 가하는 식으로 자신들이 가진 불안과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왕실은 본격적으로 아비스 와이엇이 가진 세력의 끄나풀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와 결탁해 있던 사람들은 물론, 그가 만든 조직에 비밀리에 투자했던 이들을 줄줄이 잡아들였다.
아비스의 부재로 혼란스러운 대신전의 상황이 정리되어 가고 있으니 슬슬 협의안을 보내도 될 듯했다.
리암은 당당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그 일로 얼마나 시끄럽던지. 근처 신전들이 계속 도움을 요청해서 병사들이 요 근래 쉴 틈이 없었어. 셀바가 이 정도면 수도 쪽은 완전 개판이 났을 게 뻔하잖아?”
그가 얌전히 작위를 이어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천성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리암의 눈동자에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일정을 멋대로 미뤘으니, 공작 각하께서 엄청 화내셨겠네.”
“말도 마. 이틀에 한 번씩 독촉 편지를 보내는데, 편지에서 호통이 들리는 느낌이었다니까. 그리고, 출발을 늦춘 이유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라고. 가뜩이나 국경 부근의 낌새가 심상치 않은데.”
“하이센 요새가 있는 곳?”
“어. 요즘 들어 탈주자가 늘어난 모양이야.”
헤리타 왕국과 등을 맞대고 있는 서부 국경에는, 천혜의 요새인 하이센을 필두로 여러 도시들이 분포해 있다. 영지는 척박하지만 봉화를 올리는 봉화대라든가, 파발이 움직이는 경로 등은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그쪽 상황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어서 그런가? 국경선에서 붙잡힌 사람들이 너도나도 귀화를 요청하는데, 마법사가 상당하다더라. 리베라 후작이 일단 우리 쪽에 인수인계를 했어. 일단 마법사들은 신전에 격리해둔 상태고.”
“몸은 수색했어?”
“당연하지. 일단 내가 확인했을 때까지는, 낙인을 가진 자는 없었어. 하긴 그게 있었으면 거기까지 도망 오지도 못했겠지.”
헤리타에서 만든 낙인은 정말로 정교했다. 한번 찍히면 해제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추적이 가능한 데다 주인이 죽지 않는 한 절대 효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마법사의 경우, 그 출신이 평민이라도 국가에 기여한 만큼 귀족과 마찬가지의 특권을 누리는 이들도 꽤 있었다. 즉, 헤리타 왕국 내부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정보꾼들이 손에 들어온 셈이었다.
“그래서 요 근래 정신이 없었어. 일단 온 김에 왕실에 정식으로 지원 요청을 넣을 생각이야.”
보고서도 열심히 작성했다며 리암은 한껏 우거지상을 지었다. 힘들었던 모양이다. 제라니아는 더 묻지 않고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일찍 올라왔네.”
“밀드레드가 슬슬 돌아가 봐야 하지 않냐고 해서.”
태연하게 말하는 리암의 등 뒤로 뒷목을 잡는 유리의 환상이 아른거렸다.
“밀드레드는 잘 지내?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다고 들었어.”
리암은 밀드레드가 둘째 아이를 임신한 뒤로 쭉 영지에서 지냈다. 첫째인 미하일이 태어났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이 특히 더 유난했다. 출산을 버티기 힘든 몸이라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문제로 아버지인 유리와도 크게 싸웠다고 들었는데,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리암을 대신해 수도로 올라온 유리를 만났을 때 제라니아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럼. 고비는 무사히 넘겼어.”
밀드레드에 대해 떠들기 시작하는 리암의 눈빛에 애정이 들어찼다. 제라니아는 가급적 아무렇지 않게 질문했다.
“아이는?”
“튼튼하지. 제 어머니를 고생시키더니, 아주 힘찬 녀석으로 태어났더라고.”
호전되었던 건강이 미하일을 낳고 다시금 악화되자, 리암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기를 원했다. 자신부터가 외아들이니 굳이 형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한몫했다.
둘째를 낳게 된 건 순전히 밀드레드의 의지였다. 부부가 된 뒤로 처음으로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지만, 늘 그렇듯이 리암은 밀드레드를 이기지 못했다.
그는 밀드레드가 임신했던 열 달 동안 안절부절못하며 그 옆을 지켰다. 수도로 다시 올라가라는 제 아버지의 호통을 옥수수를 씹듯 무시하며 아내의 안위를 우선했다.
“밀드레드가 그러더라. 혼자보다는 형제가 있는 게 든든할 거라고. 뭐…. 줄리아는 든든하긴 하지만.”
하나뿐인 언니를 성심성의껏 돌보고 있을 그의 처제를 떠올리며 리암은 오만상을 구겼다. 사이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해서 한숨도 못 자겠더라. 정말, 가능하다면 내가 대신 낳아주고 싶었어.”
“진짜?”
“당연하지. 혹시 그런 마법이 없나 싶어서 찾아보기도 했는데 없더라고.”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리암은 몸서리를 쳤다.
“비명 소리를 듣고만 있는데도 괴롭더라. 여자들은 참 대단한 것 같아. 너나 밀드레드나 말이야.”
“나는 그래도 좀 나았어. 입덧은 없었거든.”
아이를 낳았던 두 번 다 자신보다는 프란츠가 입덧을 했었다.
문제는 평소에도 음식에 관심이 없는 남자다 보니, 먹지도 않고 일에만 매진하던 당시에는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었다. 워낙 건강체라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힐데의 잔소리를 견뎌야만 했다.
“그거 다행이네. 체질인지는 모르겠는데, 밀드레드도 입덧은 안 했거든. 밥이라도 잘 먹지 않으면 못 버티겠더라.”
“진짜 부럽다. 프란츠는 그때 신 걸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자주 먹더라고. 아이 이름은?”
“에릭이라고 지었어.”
“남자애구나.”
“어. 아주 씩씩해. 울음소리부터가 남다르더라.”
덕분에 매번 밀랍으로 귀를 막아야 할 정도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지던 리암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얘기 들었어. 칼리아가 백작이 된다며?”
“소식이 거기까지 갔어?”
“아버지한테 들었어. 너희 아버지랑 친하잖아.”
“아, 그건 그렇네.”
바구니에서 쿠키를 꺼내 오독 씹으면서도 제라니아는 리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괜찮네. 잘 어울리고.”
산뜻한 대답에 제라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암이 투덜거렸다.
“뭐야, 왜 그런 반응이야?”
“아니, 놀라지 않는구나 싶어서. 다들 엄청 구시렁거리던데 말이야.”
아이작 바이첸이 왕실에 작위 계승용 칙허장을 요청했을 때, 카암의 사교계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미혼인 여성이 작위를 승계받는 일이 없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은 그 외에 다른 계승자가 없는 경우에 해당했다. 적장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작위를 물려받는 일은 드물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고 칼리아에게 오는 구혼의 편지는 배로 늘었다. 남쪽에 자리한 영지들은 대부분 강을 끼고 있는 데다 기후가 좋아 대부분이 부유했다. 펠리오르 백작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혼자들의 머릿속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풍요로운 영지와 미인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칼리아는 그런 생각을 비웃듯 읽지도 않은 편지를 벽난로에 전부 던져 넣기를 반복했다.
“그런 건 능력도 없는 주제에 욕심은 많아서 구질거리는 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칼리아가 그런 놈들보단 훨씬 나을걸.”
리암은 피식 웃으며 생강 쿠키를 집어 들었다.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을 텐데.”
머뭇거리다 털어놓은 한마디에, 리암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가 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재미있는 얘기 들려줄까?”
“뭔데?”
“사실 난 내가 공작에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어.”
하아,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리암의 얼굴이 잔에 가득 담겨 있는 우유 위로 뭉개지듯 떠올랐다.
“아니, 뭐. 아버지가 계속 잔소리를 해서, 내가 공작위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렇잖아? 예를 들어서, 대를 이을 후계자를 낳는 게 공작의 의무라고 하는데…. 미하일을 임신했을 때, 밀드레드가 고생하는 걸 보니까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더란 말이지.”
사랑하는 사람을 고생시키면서까지 의무를 다해야 하는 걸까. 자신이 고생했다면 짜증은 나더라도 납득은 했겠지만, 고생은 제 아내가 다 하는데 그게 자신의 의무를 위해서란다. 너무나도 부조리하지 않은가?
제 아내 한정으로 속이 소갈딱지만큼 좁아지는 남자는 그게 무척 못마땅했다.
리암의 눈이 주변을 슥 훑었다. 가까이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여기서만 말하는 거지만…. 그 논리대로라면, 솔직히 작위는 내가 아니라 밀드레드가 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쌀쌀한 바람이 둘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리암이 두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칼리아의 소식을 들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냥 그렇다는 얘기야.”
듣고 흘려 넘기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리암을 지그시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리암.”
“왜? 네가 그렇게 부를 때가 난 제일 무섭더라.”
괜히 오싹하다며 팔을 쓸어내리는 그에게 제라니아는 싱긋 미소 지었다.
“넌 분명 훌륭한 공작이 될 거야.”
“……갑자기 낯간지러운 소리 해도 나오는 거 없거든?”
리암은 툴툴거리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제라니아가 천을 들어 쿠키를 집었던 제 손을 느릿하게 닦아내며 말했다.
“뛰어난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까지 본다고들 하잖아.”
“그 말엔 나보다 네가 어울려. 너는 그 조그만 머리에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이 들어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피곤하지 않아?”
“피곤하지. 하지만, 가진 게 많으니까 더 노력해야 하더라고.”
“그건 또 뭔 소리야?”
“사람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일에는 무딘 법이야. 나 역시도 그렇고. 그러니까 생각을 멈출 수 없어. 완벽한 사람은 될 수 없어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