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신의 이름으로 (3)
그렇게 생각하니, 그때 이피나스 딜런이 그 자리에 나타났던 이유가 달리 해석되었다. 단순히 그 청년 신관이 자신을 찾아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다.
대신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원칙주의자가 저울을 기울였다 이건가. 여러모로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가 내려오지만 않았어도, 확실하게 입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부드러운 말투로 아쉬움을 감추며 대답하는 와이엇에게 에이르는 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리 아시면 곤란하지요. 피차 공정해야 할 자리 아니겠습니까.”
내가 여기 오지 않을 걸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습니까? 그렇게 묻는 듯한 에이르의 시선에 와이엇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에이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겠지. 어떻게든 자신이 오지 못하게 막고자 갖은 수를 썼으니까. 음식에 독을 타는 건 기본이고, 한밤중에 제 처소를 습격하던 이들도 있지 않았던가.
잠을 옅게 자는 편인 데다 대기시켜둔 이들이 빨리 달려온 덕에 무사했지만, 그 대가로 자객의 칼에 왼팔을 내주어야 했다. 다행히도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아직 팔을 움직이기가 힘이 들었다.
당장 오늘도, 제 뒤를 집요하게 따라붙던 몇몇의 감시자를 겨우 떨쳐내고 여기까지 왔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출발했는데도 늦게 도착한 건 그래서였다.
건물을 지키는 경비들 중에서도 한패가 있었던 건지 하마터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뻔했지만, 입구 근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딜런 덕에 무사히 안으로 들어왔다.
재판장인 이든과 에이르의 참석을 미리 논의하고 수를 써준 것 역시 딜런이었다.
딜런은 원칙주의자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에이르 산드리아를 신뢰했다. 신전에서 한평생 그만큼 원칙에 충실했던 인물은 없었으므로.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했습니다. 나는 신의 사도일까요, 아니면 괴물일까요?’
‘내 힘을 가장 두려워하는 게 누구일 것 같습니까. 범죄자? 감추고 싶은 비밀을 가진 사람? 아니요. 아마 나일 겁니다. 진실은 그만큼이나 무겁고 잔혹하니까.
고작 남의 약점 따위나 잡기 위해 사용하기엔 너무도 무서운 능력이지요. 왜 이런 말을 하냐니…. 당신이라면 이해할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이피나스 딜런.’
에이르가 사적인 이득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딜런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가 단테와 같이 오래도록 머물렀던 중립지대에서 걸어 나와 에이르를 도운 것은 그러한 믿음의 발로였다.
무리해서 움직인 탓인지 상처 부위가 다시 욱신거렸지만, 에이르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왼팔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
여성치고는 제법 크고 마디가 불거진 곱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와이엇의 눈앞에 놓였다.
“손을 주시지요.”
그를 멀뚱히 보고 있던 와이엇이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지 모르겠군. 이런 일에 나서는 건 자네답지 않은데.”
또 무슨 변명이냐 싶은 순간 그가 은근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벤자민 산드리아가 사라지기 전날, 모습을 오랫동안 보이지 않은 것과 연관이 있나?”
그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곳곳에서 술렁거렸다.
“에이르 님도 그날 행방이 묘연하셨던가?”
“벤자민 님이 사라진 날에….”
“하긴, 아나샤께서 이런 일에 관여하신 적은 거의 없었긴 하지. 왜 이번 일에만?”
“설마, 두 분이 정말로….”
작은 의혹이 빠르게 부풀려지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집히려 했다. 인자하게 미소 짓는 노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논점을 흐리려는 시도에 에이르는 휘말리지 않았다. 차분하게 맞받아치는 목소리에는 좌중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천천히 가라앉는 아우성을 배경으로, 와이엇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별건 아닐세. 그저, 자네와 벤자민 산드리아는 꽤나 친밀한 사이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서 말이지.”
“친교의 의미에 일방이 포함되었던가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겠나.”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와이엇은 손을 내밀 기색이 없어 보였고, 모두가 그걸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분위기에 에이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예상대로 만만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제 손을 잡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시간을 끌면서, 제가 가진 진정성을 의심하게 판을 흔들어둘 셈인 듯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한다 한들,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무용하다.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가 노리는 건 바로 그것일 터.
자신이 평생 동안 대신전에 헌신했다고는 하나, 그건 눈앞의 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온화하고 선량한 인상을 가진, 대신전의 기적이라 불리는 자.
그와 자신 사이에 놓인 스물여덟 해의 간극. 경력도 나이도 자신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만큼 지지하는 세력 역시 아직까지도 막강했다.
배심원 측에 앉아 있는 신관의 절반쯤은 그에게로 팔이 굽어 있으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이 엎어지는 끔찍한 진실을 대면하기보다, 그것이 거짓일 거라 부정하는 게 훨씬 쉬운 일이니까.
“그렇습니까?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벤자민 산드리아보다는 아비스와 더 가까운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동의할 텐데요.”
대범한 발언에 사람들 몇몇이 숨을 삼켰다. 와이엇의 한쪽 눈썹이 실룩거렸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건가.
“허허.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었다니 고맙네만, 오해의 여지가 될 만한 발언은 삼가는 게 어떤가.”
“어느 쪽이든 크게 의미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처음에 밝혔던 대로 저는 ‘아나샤’로서 이 자리에 섰으니까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인가?”
“제 말에 거짓이 있다면 신벌이 내리겠지요.”
말씨는 조곤조곤했지만, 팽팽하게 맞서는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어떻게든 흐름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 오가는 말이 하나둘씩 쌓여갔다.
고착되어 늘어지는 대화를 끊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한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대화를 하던 두 사람은 물론, 사람들 전부가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생긋 웃고 있는 젊은 왕비를 지그시 응시하던 재판장이 허가의 손짓을 했다. 들썩이려는 소리의 파도가 가라앉은 뒤, 제라니아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 재판을 시작하기 전 재판장께서 읊었던 맹세를 기억합니까?”
[아나샤와 플라, 메즈를 통틀어 오로지 진실을 추구하며, 어떤 결과든 그것은 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나샤는 과거, 플라는 현재, 메즈는 미래를 의미했다. 지나온 과거를 읽어내는 자를 아나샤, 다가올 미래를 예언하는 자를 메즈라 칭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재판은 진실을 가려내며 그 결과에는 모두의 합의가 깔려 있다.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언하는 동시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에 불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절차였다.
“우리는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또한 아나샤는 신의 심판자라 불리며, 신전의 긍지를 상징하는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동의하듯 묻자 신관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수군거림이 일었다. 옆의 동료와 속닥거리는 사람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의 눈에 차오른 긍지를 읽어낸 제라니아는 차분히 말했다.
“신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웅성거리는 신관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제라니아는 때를 기다렸다. 신전은 신을 섬기는 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장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곧 그들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적당한 순간에 제라니아의 목소리가 좌중을 치고 들어왔다.
“그렇다면, 모든 건 신께서 판별하시지 않을까요? 만약 아나샤가 거짓을 말한다면 그의 말대로 신벌이 내리겠지요. 하지만 진실이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이미 충분히 자격을 갖췄노라고. 그런 의미를 담아 이야기하는 녹색 눈동자가 총명하게 반짝였다.
제라니아의 말이 끝나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맞습니다!”
“신께서는 이 자리에 계실 것입니다!”
“신이시여!”
신관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요란하게 아우성이 터졌다.
냉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신관도, 주변의 반응에 황당한 낯을 한 신관도 있었지만 감격에 젖어 두 손을 모으는 이들이나 흥분해서 얼굴이 붉어진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광기와도 같은 신심이 물결처럼 재판장의 내부를 뒤덮었다. 그 분위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떨떠름한 얼굴을 한 귀족들을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에이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돌변한 분위기를 목도한 와이엇의 미간에 주름이 늘어났다. 순백의 신관복을 입은 채, 덩그러니 서 있는 그의 앞으로 에이르가 성큼 다가왔다.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듯 뒤로 주춤 물러서려던 와이엇의 걸음을 멈추게 한 건 아우성을 뚫고, 귓가에 나직이 닿은 속삭임이었다.
“신께서 보고 계십니다.”
엄숙한 울림에 한때는 맑았을, 그러나 지금은 탁하게 흐려져 있는 초록색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고작 그 한마디에 꽁꽁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굳어버린 노인의 얼굴에 수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되지 못하는. 그저 하찮고 작은 한 인간이 거기에 있었다.
삶에 눈이 멀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선택한 주제에, 끝내 신의 이름을 온전히 외면하지 못하는 나약한 악이 아주 천천히 죄가 덕지덕지 묻은 손을 내밀었다.
신의 권능 아래,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이하듯이.
에이르는 그 손을 꽈악 움켜잡았다.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노인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그의 과거를 읽어내는 에이르의 입매가 굳게 다물렸다. 불쾌함을 희석시키며 입을 여는 여인의 목소리가 지독히도 무감정했다.
차분한 음성으로 나열되는 비극을 귀담아듣는 신관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대놓고 경악하는 이도 있었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끔뻑이는 이도 있었으며, 그럴 리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며 소리치는 이도 존재했다.
귀족들은 대체로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들은 제각기 달랐다.
태연한 척 하지만 아마 머리는 바쁘게 굴러가고 있을 것이다. 와이엇과 결탁했던 이들이라면 어떻게 그와 연관되는 걸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할 테고.
그리고, 제라니아는 눈을 부릅뜨고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경매되던 아이들, 셀리나나 핀과 같이 가까운 이들의 죽음, 국왕의 서거와 마법사의 칼날에 명을 달리하던 병사들까지. 그간 보고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공든 탑이 무너진다 했던가. 사람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만큼이나 그 모든 원흉을 만든 이는 차근차근, 그러나 허무하게 무너져 갔다.
후련한 와중에도 입맛이 썼다. 이상하게도.
* * *
화창한 오후의 햇빛 아래, 말이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앞장서 뛰어가는 제라니아의 말 뒤로 몇 필의 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카암의 동쪽에 자리한 넓은 평야에 돋은 풀잎들이 말발굽 아래서 짓이겨졌다. 울타리 너머에서 양과 염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었다.
평소보다 느슨하게 묶은 제라니아의 머리칼이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따라 나부꼈다.
곧,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고삐를 확 잡아당기자 말은 히히힝 울음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뒤를 따라오던 기사들 역시 멈춰 섰다. 비앙카가 탄 말이 조금 더 움직여 왕비의 옆으로 다가갔다.
“왕비님, 그렇게 빨리 가시면 위험합니다.”
“이 정도는 따라잡으실 수 있잖아요?”
“신변에 위해를 가하려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경들이 지켜줄 텐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하나로 곧게 뻗어 있는 길의 양 옆으로는 울창한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물끄러미 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두는 여인에게 비앙카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무엇을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최근 제라니아는 멍하게 있거나,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많았다. 호위기사로서 하루 종일 붙어 있는 만큼 비앙카는 왕비의 변화에 누구보다 예민했다.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지 않는 건, 그럴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충직하게 왕비의 곁을 지키면 되었다. 어쭙잖은 호기심을 부릴 주제가 못 된다.
“새삼 느끼지만, 산맥이 제법 험하다 싶어서요.”
수도의 동쪽에 자리해, 남쪽과 북쪽으로 뻗어가는 이올레 산맥은 수도를 지키는 방어선 중 하나로 지세가 험난하며, 나무가 울창해 방향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바로 앞에 보이는 이 길을 벗어나면 조난당하기 쉬웠다.
“그렇지 않아도, 매년 길을 잃는 자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워낙 넓은 만큼, 잘 훈련된 산지기의 안내를 받지 않고 길을 벗어나는 이는 꼼짝없이 미아가 된다. 조난당한 이의 운명은 두 갈래다. 그대로 굶어 죽거나 산짐승한테 물려 가거나.
“……무언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네요.”
무성하게 돋은 풀들이 바람을 따라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직 낮인데도 어스름한 산의 안쪽은 당장이라도 숨어 있던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처럼 으스스했다.
나무들 사이에서 푸드득 소리와 함께 새 몇 마리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웅장하고 높은 산맥의 모습은 마치 선을 긋는 것 같았다. 이 이상은 넘어갈 수 없다고.
새를 쫓던 시선을 거두며 제라니아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돌아가요.”
“예.”
돌아오는 길은 올 때보다 한층 더 여유로웠다. 성벽 앞에 세워둔 마차를 타고 궁전으로 돌아오자, 마담 세자르가 제라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비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오늘 찾아올 예정인 사람은 없지 않았나요?”
“그것이….”
설명을 들은 뒤 제라니아는 응접실을 향해 뛰듯이 걸어 들어갔다. 문을 열자,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리암!”
그가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눈초리를 장난스럽게 휘어 웃는 얼굴이 흡사 악동처럼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왕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