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신의 이름으로 (2)
“왜 그런 표정이야. 애초에 여기에 오자고 한 건 너였을 텐데.”
“그거야, 이런 결론이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요.”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 않았어?”
“그쪽에서 제안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선배가 직접 나설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왜냐고 묻자, 벤자민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선배는…. 자기 능력을 좋아하지 않잖아요. 적어도 그 능력을 사용해서 이득을 얻는 건 꺼리잖아요.”
에이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한 걸음을 성큼 내딛은 벤자민이 에이르와 두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분명 어두운데도, 서로의 표정을 분간할 수 있었다.
“일이 좀 더 쉽게 풀릴 수는 있겠죠. 선배가 얻을 이익보다는 제가 얻을 이익이 더 크겠지만요. 제가 아무리 모자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요.”
벤자민은 하얀 장갑 아래로 붉었던 손을 떠올렸다. 깨끗하고 곱기만 한 겉과 달리, 거칠게 문지른 것처럼 피부가 문드러진 손이 그 주인을 닮았다 생각하면서.
“아까도 말했지만, 이미 한 결정을 번복하자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이유 정도는 묻고 싶어요.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우리는 지금 한배를 탄 사이니까.”
애써 장난스럽게 말하는 벤자민의 입매가 살며시 떨렸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이르가 입술을 움직였다.
“어느 쪽이든 달라질 건 없어. 아니, 차라리 나는 이 자리에 서는 게 훨씬 안전해.”
예상치 못한 말에 벤자민은 눈을 깜빡였다. 에이르는 덤덤히 덧붙였다.
“내가 너와 함께 고발을 한다 한들, 너는 억압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 되고, 나는 내 의무에도 불구하고 중립적이지 못하게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벌였다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
“……설마.”
“왜 설마라고 생각하지? 비슷한 경우를 계속 봐왔는데. 신전을 봐. 엔데의 7할이 여성인데, 데리트로 올라오면 수가 반반이 되고 헤딘이 되는 여성의 비율은 그 절반 이하로 떨어지지. 평가의 잣대가 달라.”
“…….”
“나는 냉정한 판단을 한 거야.”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기만 하는 벤자민의 얼굴을 에이르는 유심히 쳐다보았다. 마치 그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듯이.
“벤자민 산드리아.”
“네.”
“너는 특별한 인간이지. 평민의 신분으로 이피나스에 임명된 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벤자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잖아요? 지난 백 년간 이피나스가 된 여성은 선배가 유일하다고 들었는데.”
“그래. 하지만 무엇을 해도 탕아의 일탈 정도로 이해받는 너와, 나는 명백히 달라.”
저와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벤자민은 그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평소에는 실실거리며 웃는 주제에 맹목적인 믿음을 내보이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벤자민이 생각하는 것만큼 깨끗한 인간이 아니었다. 야심이 있기 때문에 더 몸을 수그리고 기회를 엿보는 것일 뿐이다.
이 신전의 정점에 서기 위해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해야만 했으니까. 작은 허물이 몸집을 부풀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열 살의 나이에 신관이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아주 오랫동안 인내해왔다. 여기서 무너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을 구하고자 했음에도 한편으로는 망설였다. 이 일로 인해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가늠하는 자신이 있었다. 덮어서는 안 되는 사건을 두고도 저울질을 하게 되는 제 모습이 혐오스럽기도 했다.
강아지를 떠오르게 하는 눈으로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벤자민을 마주하며 에이르는 헛웃음을 뱉었다.
이토록 태평하기만 한 녀석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위로 갈 거야. 언젠가는 아비스의 자리에 앉을 거고. 하지만….”
씁쓸한 미소가 에이르의 입가에 떠올랐다. 줄곧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을 아주 조금,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분명, 나보다 네가 먼저 아비스가 되겠지.”
에이르의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불빛이 충분하지 않은 만큼 해가 저물면 도시는 쉽게 어두워진다. 저 멀리 보이는 대신전이 오늘따라 유독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에이르는 풀어졌던 표정을 다시 조용히 정돈했다.
“이만하면 궁금증은 다 풀렸을 테니, 이제 슬슬 움직일까.”
그때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벤자민이 움직인 것은.
몸을 성큼 움직인 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조심스럽게 제 손을 붙잡는 손길에 에이르는 살짝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벤자민이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선배, 오래 살아요. 저보다 훨씬 오래.”
에이르의 눈빛이 일순 멀어졌다. 황당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벤자민은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거 아세요?”
내가 아비스가 되는 건 상상이 되지 않지만.
“선배는 반드시, 반드시 아비스가 될 거예요. 나는 알아요. 선배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아비스의 자리에 앉아 신관들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존경을 받는 에이르의 모습은 쉽게 상상이 되었다.
벤자민은 조용히 에이르의 손등에 제 이마를 대었다. 흘러나가는 생각과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는 늘, 에이르에게 자신을 믿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선배는 절 자꾸 무시하시는데, 저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거든요? 가령, 선배가 이피나스가 된 뒤로 헤딘에 임명되는 여성 신관의 수가 급증했다든가.”
“……나는 공정하게 평가했을 뿐이야.”
부정은 하지 않는다.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건조한 음성에 벤자민은 나직이 웃고 말았다.
“그렇겠죠. 선배는 늘 그랬으니까요.”
처음 봤을 때부터 동경했다. 고결하게 반짝이는 당신을.
자신이 신전에 들어온 건 열여섯 살 남짓. 에이르는 고작 열 살의 나이에 신관복을 입었다. 그런데도 헤딘과 이피나스에 임명되는 나이는 자신이 훨씬 빨랐다.
제 눈엔 더없이 완벽하기만 했는데, 에이르는 이피나스 자리를 얻기 위해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아직은 자격이 부족하다는 말과 함께.
그보다 훨씬 자격이 부족하고 어린 자신이 비록 반발을 샀을지언정 단 한 번에 이피나스의 의복을 입게 되었을 때, 벤자민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건 부조리하다고.
그라고 이런 현실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는데, 에이르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리고, 그들을 독려했다.
신전의 모두가 당신을 선망하는 건, 당신이 그럴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동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너는 날 과대평가하고 있어. 나는 그렇게 강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아.”
무뚝뚝한 목소리가 뒤통수에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자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에이르의 얼굴이 보였다.
“인간인데 약한 면 정도는 있겠죠. 저는 그것도 선배답다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까지 날 믿는 거지?”
“이피나스 에이르, 당신이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요.”
고고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미 없는 성격이 아니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출신으로 인해 온갖 박대를 겪으며, 신전에 아무런 기대조차 두지 않았던 자신과는 달랐다.
벤자민은 안타까웠다. 이미 모든 게 다 정해졌다는 걸 알면서도 그와 위치를 바꾸고 싶었다.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영웅이란 이런 거라고.
비겁하게 현실을 외면하는 자신보다, 도망가지 않고 차별과 힘껏 맞서 싸우는 당신 같은 사람이 훨씬 더 위대하다는 걸.
“선배가 《세 명의 신관》 이야기를 질문한 적이 있었죠.”
벤자민은 능청스레 말을 꺼냈다.
“저는 아마 세 번째 신관이 되겠죠. 입만 살아서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거든요. 제가 살던 장소는 그랬으니까요.”
빈민가에는 가난이 흘러넘쳤다. 의욕을 가지지 않으면 하루에 한 끼를 제대로 먹기도 쉽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했다.
능력을 각성한 건 열두 살 남짓의 나이였다. 그 후 4년 동안, 이 능력을 이용해 남을 갈취하며 아등바등 목숨을 연명해왔다. 스승을 만나 구제받기 전까지는 그게 나쁘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제게는 당연했으니까. 다른 방식을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우스웠다. 이런 자신이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건, 하나의 비유일 뿐이야.”
제 손을 마주 쥐는 손길에 벤자민은 놀랐다. 말로는 손을 잡으라고 했지만, 실제로 에이르가 그의 손을 잡았던 적은 없었다. 어색함을 감추려 농담을 건네기엔 에이르의 분위기가 더없이 진지했다.
“인간을 어떻게 세 가지 유형으로만 나눌 수 있겠어. 사람에게는 그 모든 면이 존재해. 네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면, 너는 첫 번째 신관도 두 번째 신관도 될 수 있어.”
“하하, 절 위로해 주시는 건가요?”
“그래.”
담백한 인정에 벤자민의 입매가 허물어졌다. 그는 목까지 차오른 감정들을 애써 내리누르고 태연하게 말했다.
“선배도 알다시피, 저는 빈민가 출신이죠. 그곳은 정의보다 힘의 논리가 우선인 곳이에요. 신전에 오고, 드디어 그 지옥을 벗어났다 싶었는데…. 아니더라고요.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뭐.”
인맥과 파벌 위주로 돌아가며, 대신전에 들어오더라도 그 내부의 경쟁 역시 치열하다. 폭력이 오가지 않을 뿐 약육강식이라는 점에서는 제가 원래 살던 곳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나마 제 인생이 평탄했던 이유는 줄을 잘 잡았기 때문이다. 스승은 제게 선의가 가진 힘을 가르쳐준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과거를 알면서, 어째서 이런 무거운 자리에 자신을 세운 건지. 아마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때부터 선배는 절 싫어했고요.”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경멸하듯 바라보던 에이르의 서늘한 시선을 떠올리고 벤자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당시의 자신은 난폭하고 언행이 거칠었으니 그럴 법하긴 했지만.
뭐라 반박하려는 에이르를 저지한 벤자민이 제 속내를 토해냈다.
“그래도, 동경할 수는 있는 거잖아요.”
이렇게 추하고 비겁한 나라도, 무언가를 바랄 수 있다면.
“깨끗하고 당당하고, 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그만한 결과를 받기를 바랄 수는 있는 거잖아요. 악이 패배하고 선이 승리하는, 현실에 그 정도 기적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세상에 선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지금은 죽고 없는 그의 스승이라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건 에이르였다.
그래서 벤자민은 에이르를 믿었다. 겁쟁이인 자신이 움켜쥐려 시도하지도 못하고 포기한 것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저도 알아요. 이게 최선이라는 걸.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벤자민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언제보다도 진심을 담아서.
“선배, 기적을 만들어 주세요. 기꺼이 그 뒤를 따를 테니까.”
* * *
“제가, 당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에이르의 말이 끝나자 좌중이 다시금 술렁였다.
와이엇은 눈초리를 접어 웃었다. 주름진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당혹감을 숨겼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
“말 그대로입니다. 대신전의 명예가 달린 일이 아닙니까. 마땅히 제 힘이 필요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공손하지만 뼈 있는 대답에 와이엇은 속으로 침음했다.
이피나스 에이르가 재판에 참여하려고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었다. 굳이 저를 죽여 입을 막으려던 자가 있는 곳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이유야 뻔했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거나, 제 심장에 칼을 꽂기 위해서겠지. 전자는 감옥에서의 반응을 볼 때 가망이 없다시피 하니 후자일 것이다.
그가 재판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모로 손을 썼다. 대신전에는 제 손발이 되어줄 이가 많았다. 그들은 재판의 절차와 증인 명단을 미리 빼돌리거나, 저 대신 아나샤의 개입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것을 도왔다.
그 결실을 맺은 것처럼, 바로 어제 참석 명단을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에이르 산드리아의 이름은 없었다. 감시도 확실하게 붙여놨었다.
분명 그랬는데, 기어코 여기까지 왔는가.
와이엇은 힐끔 가운데에 위치한 상석을 올려다보았다. 재판관을 상징하는, 까만 천을 늘어뜨린 모자를 쓴 이와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은 마치 성화에 나오는 신의 사자를 연상시켰다.
와이엇은 확신했다. 딜런 산드리아군. 그가 에이르 산드리아와 손을 잡았구나.
“설마 자네가 참석할 줄은 몰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