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신의 이름으로 (1)
“가장 무난하게 가려면, 역시 재판이겠죠.”
테이블 위에 올려진 등불이 화르르 타오르며 어둠을 쫓아냈다. 중얼거리듯 말하는 제라니아의 곁에서 프란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신관께서 말하는 정도로는, 병사를 보내기엔 명분이 다소 부족합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야 그걸 토대로 와이엇을 체포하고 조사를 시작하면 그만이다.
상대는 무려 대신전의 수장이다. 한평생 신전에 헌신적인 인물이었던 만큼 인망 역시 두터웠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간 신전에서 받아먹은 게 많은 귀족들 다수가 들고 일어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런 그림은 왕실이 신전을 겁박하는 느낌을 주기 쉬웠다.
“하지만 공개 재판은 다르지요. 재판장은 대신전 내에 있고, 그곳은 왕실조차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에요. ‘공정하게’ 재판을 열어 시시비비를 가린다면, 다들 결과에 불만이 있을지언정 승복하지 않을 수 없어요.”
다만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는 서둘러서 정해야 했다. 여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신관들이 주검으로 돌아온 탓에, 대신전에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첩자에게 들은 바로는 제법 시끄러웠다고 들었다. 그 분위기를 수습하고 외부로 말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만도 진땀을 뺐겠지.
하지만 그도 오늘 하루뿐, 내일은 다를 것이다. 그러니 선수를 쳐야만 했다.
“최대한 판을 크게 벌여야 해요. 아무리 근거 없는 소문도 듣다 보면 혹시,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사람이거든요. 재판 전까지 어떻게든 와이엇 산드리아에게 의혹을 심고, 문제를 고발한 두 분의 이미지를 끌어올릴 생각이에요.”
그렇다고 기간을 질질 끌면 그 역시 흐지부지되기 마련이었다. 일주일에서 열흘, 그 사이에 승부를 봐야 했다. 다행히도 재판 시기 정도는 이쪽에서 정할 수 있었다.
제라니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렇게 말하지만, 상당히 불리한 게임이에요. 와이엇 산드리아는 대신전에서 평생을 보낸 남자고, 스무 해가 넘도록 아비스의 자리에 있었죠.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상당할 겁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제라니아는 곰곰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이기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상당히 귀찮은 작업이 될 듯했다.
“한패로 보이는 인물을 붙잡기는 했습니다. 뚜렷한 증거도 있고요. 그를 설득해 재판장에 세우는 건 어떻겠습니까.”
벤자민의 제안에 제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기간 안에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재판 당일에 말을 바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비슷한 경우를 겪어봤던 만큼, 제라니아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벤자민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하지만, 혹시 와이엇 산드리아가 그를 증인으로 초청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남자가 이 모든 일이 와이엇과 관련이 없다고 증언을 한다면야 재판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와이엇이 나서서 직접 남자를 지목했다는 사실부터가 의혹을 사기 딱 좋았다.
“그 정도로 철두철미한 사람이 의혹을 남길 짓을 자행할 리가 없지요. 차라리 상대를 죽여 입을 막으려고 할지언정.”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침묵의 방에 있는 한, 누구도 그를 해칠 수 없어요.”
본인의 영역인 만큼 벤자민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방은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곳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곳이니까요.”
딜런에게 편지하기도 했거니와, 다니엘에게 맡기고 왔으니 어떻게든 버티고 있으리라.
“재판 기간 동안에는 안전할 거예요. 여론이 잠잠해지면 그때서야 처리하겠죠.”
우리가 그를 잡아내지 못한다는 전제 하에.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제라니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반드시 이기게 해주겠다 장담하는 제라니아를 벤자민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수가 있습니까?”
“수가 있다기보단…. 상대를 고발할 만한 확고한 증거가 없는 이상, 재판은 철저히 심리전으로 흘러가게 될 겁니다.”
재판의 절차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대질 심문 위주로 흘러가며 서로가 신청한 증인과 절차가 끝나면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는 식이었다.
틀이 헐렁할수록 변수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재판이 대개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압박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는 여론전으로 흘러가는 건 그래서였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그 능구렁이에게 쉽게 통할 방법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상대에게 모순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가야 해요. 그쪽에서도 그 정도는 꿰뚫어 볼 테고요. 지난한 수 싸움이 되겠죠. 무사히 빠져나온 사람들 말고도 다른 증인들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감옥에 갇혀 있던 자들이 증언한다고 한들,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감옥은 창문이 없어 낮밤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와이엇이 감옥에 찾아왔던 시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이상 알리바이를 따지는 것도 무용했다.
상대에게서 빈틈을 끌어내지 못하면 재판은 지게 된다. 하지만 사람은 한 가지 일을 오래할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었다. 재판이 길어질수록 어떻게든 빈틈이 생길 테니, 그걸 파고들면 되리라.
설령 빈틈이 없더라도 만들면 그만이다. 심리전에서 져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일단, 저는 증인을 모아 상대의 알리바이를 차츰차츰 제거하는 식으로 좁혀 들어가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렇게 돌아갈 필요 없습니다.”
나직한 음성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저를 돌아보는 벤자민과 국왕 부처를 응시하며 에이르는 재차 덧붙였다.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와 함께 에이르는 제 손을 천천히 흔들었다. 맥락을 읽어낸 벤자민이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이미 밖으로 나왔잖아요.”
“다시 돌아가면 돼.”
“돌아간다고요?! 안 돼요. 위험합니다. 아비스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데.”
“그래. 어떻게든 내가 재판에 참석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겠지.”
대놓고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너무 눈에 띄니까. 감시는 붙이겠지만. 물론 상대가 제 속내를 전부 알아채리라는 점에서,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에이르는 프란츠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대신전에 사람을 심어 두셨지요?”
“…….”
“그는 제 사람이 누군지 대충 다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재판 당일에 어떻게든 제가 재판장에 도착하는 것을 제지하려 하겠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믿을 만하고, 그러면서도 저와 상관없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명령을 내려두도록 하지요. 재판은 어떻게 할 겁니까?”
“제가 참여하는 것은 비밀에 부칠 겁니다. 재판이 열리는 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도록.”
물론 제가 참여하려 들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굳이 확신을 줄 필요는 없었다.
재판이 열리는 직전까지 상대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야만 했다. 적당한 저항과 발버둥을 양념처럼 첨가해서.
오래 함께한 만큼, 에이르는 와이엇 산드리아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았다. 그는 오만하다. 자신이 이 상황을 제어하고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겠지.
그걸 뒤엎어줄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도 제라니아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에이르를 바라보았다. 망설임을 아주 거두지는 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괜찮겠어요?”
이런 일에 나서고 싶지 않다 했으면서.
에이르 역시 제라니아와 같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엷게 웃었다. 미소가 깃들자, 딱딱하고 차가운 인상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신전의 일은, 신전이 해결해야 맞으니까요. 제 생각은 그때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상황이 변했을 뿐이지요.”
“…….”
“그리고, 사실 이건 더 이상 신전만의 일이 아닙니다.”
에이르의 손가락이 탁자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서늘하고 매끄러운 표면에 열을 빼앗긴 손끝이 차가워진다.
감옥에서 벤자민과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쭉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어디까지 관여해도 되는지. 그러다가 의문이 들었다.
“제가 가진 능력은 분명 편리하지만, 동시에 저를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보이게도 하지요. 저는 제가 무해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고, 그렇게 방관자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도망치기만 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행동이 저를 인간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 같더군요. 인간이라면 마땅히 희로애락을 느끼고, 당치 않은 일에는 분노하며, 누군가에게 연민을 표하는 것 역시 마땅할진대 말이지요.”
아직 덜 자랐을 적, 바닥에 넘어지려는 신관의 팔을 잡아주었던 적이 있다. 팔을 붙잡은 순간 똑똑히 보았다.
상대의 눈에 가득 들어찼던 경외심이, 공포로 탈바꿈되는 것을.
당시 자신은 충분히 능력을 제어할 수 있었고, 그자의 속내를 읽어낼 생각 역시 없었다. 그렇게 말했지만, 신관의 눈에 어린 공포는 흐릿해질 뿐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깨달았다.
아, 이 능력은 양날의 검이구나.
“그거 아십니까. 사람이 많이 죽었지만, 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많이 죽었습니다.”
참혹할 정도로 아주 많이.
“어느 정도 성장이 마무리된 직후의 생명력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이유에서 말입니다.”
위험한 능력이라면 쓰지 않으면 된다 생각했다. 혹은 사용하더라도 들키지 않는다면,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
장갑을 끼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런 걸 낀다고 해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보이기는 좋았다. 절대적인 능력이 아니라는 걸,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줘야만 했다.
중립을 지키는 건, 곧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아서 여기까지 왔다.
제가 들여다보았던 모든 죽음을 떠올리고, 에이르는 천천히 손바닥을 그러모아 주먹을 쥐었다. 분노로 인해 손등이 바르르 떨렸다.
아나샤로 태어난 것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한 적은 없었다. 능력이 없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역시 들지 않았다. 아나샤였기 때문에 마흔이 다 되었던 남자의 결혼 상대로 팔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가 이 능력을 타고난 것에 의미가 있다면.
“……어떻게 그런 걸 보고도 물러설 수 있을까요.”
와이엇 산드리아. 신이 부여한 능력을 가지고 신의 이름을 더럽힌 그의 결말은, 마땅히 신이 내린 천벌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하지 않겠나.
“저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결연한 음성으로 선언하는 에이르의 눈빛은 이제까지 중 제일 생기가 있었다.
“선배, 잠시만. 이야기 좀 해요.”
망토의 매무새를 고쳐 입은 뒤, 커튼을 살짝 들춰 밤이 내려앉은 창밖을 주시하던 에이르가 옆을 돌아보았다. 문가에 서 있는 벤자민을 힐끗 쳐다본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할 말이 남았어?”
더 늦기 전에 신전으로 출발해야 했다.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에이르는 벤자민이 벌인 일과 연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했으므로.
“잠깐이면 돼요.”
“좋아, 얘기해.”
여기서 10분 정도 더 소요한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으리라.
대신전에 돌아가려면 어차피 벤자민의 협조가 필요했다. 대신전을 감싸고 있는 결계를 흔적 없이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하수도를 다시 이용하자니 아무래도 위험했다.
벤자민은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답답하다는 듯 그가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아니, 뭐. 이미 정해진 일에 제가 왈가왈부하는 것도 웃기긴 하죠. 하지만 정말 괜찮겠어요?”
“괜찮지 않을 건 또 뭐지? 이번 일이 끝나면, 아주 많은 것이 바뀔 거야.”
중얼거리듯 말하는 에이르의 눈동자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너는 진실을 밝혀내고 사람들을 구한 영웅이 될 거고, 나 역시도 아나샤로서 위상을 한층 공고히 하겠지.”
“그걸 위해 내줘야 하는 것도 상당할 거고요.”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어. 와이엇 산드리아는 대신전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자야. 아마 고발장을 내놓더라도, 민심이 쉽게 그를 외면하지는 않을 거다. 어중간하게 굴었다간 네 말대로 우리가 되레 잡아먹힐 거고.”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벤자민을 보며 에이르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