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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52화 (153/171)
  • 제152화. 협상 (4)

    “벤자민, 이 자식! 이런 사고를 치다니.”

    딜런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이를 갈았다. 왜 안 나타나나 했더니 아주 작정하고 사고를 쳤다.

    벤자민이 보낸 탄원서는 대신전을 크게 뒤집어 놓았다. 외부에도 퍼져서 길을 걷기 시작한 지 5분 이내에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

    제일 문제는 대신전 내에도 벤자민을 지지하는 신관들이 상당하다는 점이었다. 여섯 명의 대신관들 중 유일하게 평민이라 그런 건지, 그는 예전부터 평민 출신 신관들에게서 열렬한 지지를 받아왔다.

    신관의 7할은 수습 신관인 엔데이며 엔데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게 평민층이라는 걸 생각하면, 대신전이 들썩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꿎은 탁자에 화풀이를 하는 건 그만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단테가 그를 점잖게 만류했다. 딜런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짜증스럽게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탄원서를 본 순간 이피나스들은 빠르게 회의를 소집했고, 일단 아비스 와이엇을 격리하기로 했다. 탄원서의 내용이 너무도 빨리 퍼진 탓에 시끄러워진 내부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와이엇은 ‘모든 것은 신께서 아실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순순히 제게 내려진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 경건한 말씨와 표정은 신의 사자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재판이 끝나면 어떻게든 결론이 나겠지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떤 결말이든 한쪽은 끝난 거나 다름없으니, 미리 마음의 준비나 해두는 게 좋겠지요.”

    딜런은 손을 내저었다. 언짢은 감정이 빈정거리는 말투에 고스란히 실려 나왔다. 심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딜런의 시선이 비어 있는 제 옆자리를 거쳐, 대각선에 앉아 있는 에이르에게 닿았다.

    그는 궁금했다. 벤자민이 벌인 일에 이피나스 에이르 역시 관여되어 있는지. 묻고 싶어도 요 며칠간은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바빠 단둘이 있을 기회조차 없었다.

    언제나와 같이 초연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단단한 금색 눈동자는 아름답지만, 어쩐지 인간이 아닌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해 똑바로 직시하기가 어려웠다.

    저보다 열다섯은 족히 어린 여인에게서 이런 기백을 느끼는 건 그가 아나샤이기 때문일까. 분명 처음 신전에 들어왔을 때는 나름 천진난만한 면모도 있었던 것 같은데.

    딜런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묻고 싶은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무엇을 말인가?”

    “정말, 아비스께서 그런 일을 벌이셨다고 보는 건가?”

    말이 떨어지는 순간, 침묵이 땅거미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도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테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설령 아비스께서 그런 짓을 벌였다 한들, 그의 행동은 지극히 무모했습니다. 제대로 절차를 밟아 심문을 거쳐 해결해도 될 일이 아니었습니까. 굳이 왕실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고 봅니다.”

    세드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딜런은 잠자코 턱을 쓰다듬기만 했다. 에이르는 미동 없이 단테에게 시선을 주었다.

    딜런이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 탄원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텐가.

    생략된 질문이 모두의 어깨를 짓눌렀다. 적막을 깨치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한들, 그것이 이 정도로 큰 문제가 될 일일까요?”

    세 쌍의 눈동자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보았다. 한평생 부드러운 미소만 지었을 것 같은 다정한 얼굴을 한 세드릭이 가만히 덧붙였다.

    “아비스께서 가진 힘은 막대하지요. 한 번에 수백 명의 사람을 치유할 수 있었던 자는 역사 속에서도 드무니까요. 그렇기에 우리 세대가 축복받았다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와이엇은 평생을 신전에, 선의를 위해 헌신해온 이였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마법 능력을 이용해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던 그의 일생은 신관의 모범이라 부를 만했다.

    전란을 거쳐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치유했다.

    와이엇이 아비스가 되고 난 뒤 신전의 이름으로 펼친 자선 사업의 규모가 확 커졌다는 것 역시 유명한 이야기였다. 특히,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한 고아원들이 주가 되었다.

    “큰 힘에는 대가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지요. 이번 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까지 질책받을 일일까요.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렇게 넘어갈 만한 규모의 사건이 아니지 않나. 죽은 자의 수가 강가의 모래만큼 많을 거라고 하던데.”

    “고귀한 희생이니, 분명 구원을 받았을 겁니다. 비천하게 태어난 이들이 다수라 하니, 하찮게 스러지는 것보다야 더 나은 삶이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말문이 막힌 딜런 대신 단테가 난감한 듯 덧붙였다.

    “일리는 있습니다만…. 민심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 순간에도 실종자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대신전으로 몰려들어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저잣거리에서는 신전을 풍자하는 노래들이 음유시인들의 입을 빌려 돌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속단할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단테는 소매를 들어 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신호였다. 그때 세드릭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면 궁금하군요. 이피나스 에이르께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세드릭의 음성에는 채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녹아 있었다. 딜런과 단테 역시 에이르에게 시선을 두었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에이르는, 그제야 입을 열어 딱 한 마디를 남겼다.

    “모든 건,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 * *

    재판이 열리는 날, 대신전 내부에 자리한 재판장은 역대 최고라 해도 좋을 만큼 사람들로 붐볐다.

    신전은 혹시 모를 혼란을 막기 위해 신관이 아닌 자의 신전 부지 출입을 금지했다. 대신전의 정문 너머로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구경을 나온 건 평민들만이 아니었는지라, 신관들 역시도 재판장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창문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얼굴들이 어떻게든 안을 살피고자 눈을 부라렸다.

    재판이 벌어지는 장소로 들어오면, 넓은 공간의 양옆으로 계단을 닮은 방청석이 마련되어 있다.

    왼쪽에는 신관들이, 오른쪽에는 귀족들이 자리했다. 국왕 부처와 아이들 역시 오른쪽의 상석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벤자민은 오른쪽 아래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들에도 그는 태연하게 신관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시간이 되자, 세 명의 재판장들이 안으로 들어와 가운데에 마련된 상석에 착석했다. 중앙에 앉은 이가 재판의 개막을 선언했다.

    처음 불려나온 사람은 벤자민이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된 남자.

    “……파견을 보낸 신관들이 시신으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생존한 건 단 한 사람뿐이었지요. 파견을 보내기 전, 죽어 돌아온 이들 중 한 명이 자기 자신에게 〈일레의 저주〉를 걸었습니다. 이는 당시 같이 저주를 걸었던 이들이 증명해줄 것입니다.”

    “왜 그런 저주를 걸었습니까?”

    “신변이 위험해질 수 있는 임무라고 판단했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했습니다. 저는 그에게서 저주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그를 추궁했습니다.”

    자세하게 상황을 구술하는 그의 모습은 신관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음유시인을 연상케 했다. 능청스럽던 평소와 달리 벤자민은 진지했고,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하여,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사람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신전에만 이 문제를 맡길 수 없다 판단했고, 탄원서를 작성해 신전과 왕실로 보냈습니다. 이상입니다.”

    벤자민이 들어가고, 본격적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갇혀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증인으로 나섰다.

    “그림자에 삼켜지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감옥이었습니다.”

    “하루에 두 번, 끼니를 받을 때가 아니면 사람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점심을 받을 때마다 병사들과 함께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올 때마다 최소 한 명씩은 죽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저, 저자가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리자마자 아이가 바짝 말라붙었습니다!”

    “와이엇 산드리아. 사실입니까?”

    그 모든 질문에 응하는 와이엇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신전 내부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까?”

    “예, 탄원서를 보았을 때야 알았습니다. 못내 유감스럽습니다.”

    뻔뻔한 그의 작태에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쥐어지는 주먹을 애써 등 뒤로 감춰야만 했다.

    그러던 중,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돌아왔다.

    “와이엇 산드리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까?”

    상대를 본격적으로 추궁할 수 있게 되자, 벤자민의 곁에 서 있던 이가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날 지하 감옥에 있었다던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왜 거기 있었습니까?”

    “감옥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와서, 확인차 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허탕을 쳤나 싶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벤자민 산드리아가 거기로 갔다는 걸 알고, 입을 막으러 간 게 아니란 말입니까?”

    날 선 질문에 방청객으로 앉아 있던 신관 중 하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거기,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거 아닙니까? 모른다고 하지 않소! 벌써부터 범인 취급은 이릅니다!”

    “절차에 따라 질문하는 것뿐입니다! 설마, 죄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감싸려는 겁니까?”

    “죄인일지 아닐지는 까봐야 아는 거지. 제대로 된 증거 없이, 어쭙잖게 사람을 모함하는 건 오히려 그쪽 아니요?”

    “뭐라?! 지금 말 다 했습니까?”

    고성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재판장의 분위기는 난장판이 되어갔다. 기세를 탄 듯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와이엇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갔다.

    그라고 아무런 준비 없이 재판을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증인을 제외한 증거는 없을 터. 알리바이 역시 미리 말을 맞춰놓은 상태였다.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면 충분히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와이엇은 초조한 듯이 입술을 짓씹는 벤자민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애송이 주제에 제법이었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아무리 재판을 매개로 하고 공정함을 내세울지라도 대신전은 그의 영역.

    재판이 끝나면 알게 되겠지. 아무리 깨끗한 진실이라도, 잘 다듬어진 권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걸.

    신께서 이 충실한 종을 아주 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지.

    반면 제라니아는 느긋하게 재판의 흐름을 관조했다. 바람잡이가 있을 것은 예상했던 바다. 오히려 지금은 시끄러워질수록 좋았다. 왜냐하면-.

    “그만!”

    그만큼 나중의 상황이 더욱 극적으로 보일 테니.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재판장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를 쳤다. 시장 한복판인가 싶을 정도로 시끄러웠던 주변이 아주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문이 있는 쪽에 시선을 두었다.

    “재판장의 권한으로, 이쯤에서 객원을 한 분 모시겠습니다. 들어오십시오!”

    객원이라고? 누구지?

    의문을 가득 담은 사람들의 눈동자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거대한 정문을 향해 움직였다. 활짝 열린 문에서부터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푸른 줄무늬가 그어진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여인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햇빛을 받으면 반짝일 것 같은 금빛 머리칼과 차분하고 고요한 눈동자, 냉정하고 초연한 표정까지.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아나샤!”

    “이피나스 에이르다!”

    그 한마디에 둑이 터진 것처럼, 다시금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재판장이 세 번을 고함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된 군중 속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나샤의 이름을 걸고, 이 자리에서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더없이 무거운 맹세를 읊은 에이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새하얀 장갑이 벗겨지고, 마법으로 치유된 새하얗고 고운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그 손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사람들에게 충분히 손을 보인 뒤 에이르는 와이엇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뚜벅, 뚜벅. 내딛는 걸음 소리가 모두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딱 한 걸음만을 남기고, 에이르는 멈춰 섰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그는 더없이 정중하게 말했다.

    “존경하는 아비스.”

    욕심에 취해 도의를 저버린 망령이여.

    “제가, 당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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