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협상 (3)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제라니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잊겠나. 모일 때마다 전쟁이 따로 없었는데.
“평민과 귀족이 섞여서 난장판이었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특히 레이나와 제가 얼마나 날을 세웠는지 아실 겁니다.”
귀족들의 눈치를 주로 보던 평민들 중에서도 에스더는 고개가 빳빳한 편이었다.
상인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곁에서 상단을 키우고, 적당한 귀족 남편과 결혼해 사교계로 진출했다. 저돌적인 성격만큼이나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복장이군요.’
‘어휴, 고상하셔라. 그게 대체 언제 적에 유행하던 복장인가요?’
그런 에스더가 살롱의 사람들과 충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레이나 오르테가와는 성격의 합이 유독 맞지 않았다.
제법 긴 투옥 생활을 겪으면서 수척해진 얼굴을 화장으로 가리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가리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던 레이나는 살갗을 제법 많이 드러내는 에스더의 옷차림을 보자마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에스더라고 시비를 곱게 넘기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둘은 자주 설전을 벌이고는 했다.
‘그런 게 유행이라니, 다들 수치를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런가요? 내실이 부족할수록 겉을 화려하게 꾸민다는 얘기가 있던데~. 아, 백작 부인께 얘기하는 건 절대 아니고요.’
‘본디 품위는 외양에서부터 드러나는 법이지요.’
‘그런 갑갑한 옷차림을 할 바에야, 차라리 계속 천박한 상태로 있는 게 낫겠는걸요?’
가시 돋친 혓바닥을 열심히 놀리던 두 사람은 바로 옆에 제라니아가 다가온 것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왕비님의 앞에서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싱긋 웃었다.
‘다들, 게임 좋아하나요?’
생뚱맞은 소리에 레이나와 에스더는 물론, 다른 여인들까지도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제라니아는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기는 사람이 한 가지씩 질문하는 걸로 하죠.’
“그래 놓고 왕비님이 다 이기셨잖아요.”
아직도 떠올리면 제법 웃겼다. 처음에는 상전이라 이기는 것에 눈치가 보였는데, 나중에는 주사위처럼 운에 의존하는 게임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해도 왕비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오기가 생겼을 정도였다.
왕비는 말한 대로 게임에서 이길 때마다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관심 분야, 취미는 무엇이고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와 같은 소소한 것들이었다.
카드, 보드게임, 주사위 등의 게임을 겪으면서 에스더는 레이나가 식후에 꼭 차를 한 잔씩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레이나는 에스더가 꽃을 무척 좋아해 정원에 유독 신경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카데미 교사로 일하고 있는 스물두 살의 세라와 백작 부인인 마흔네 살의 엘리자베스는 서로가 비슷한 독서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고, 한나는 아일라와 소통하기 위해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상대방에 대해 알게 될수록 서로가 세우고 있던 벽은 허물어졌고, 크게 부딪히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느릿하지만 분명한 변화를 거치는 동안, 제라니아는 결코 그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다투지 말라거나, 좋게 지내라는 압박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계기만을 던져주었을 뿐이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걸까, 당신은.
“왕비님은 저희에게 결코 명령하지 않는 분이시죠.”
외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왕비로서 위엄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할지도 모른다. 여인들 역시도 처음에는 괴상한 상전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상하죠.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런 건지, 왕비님의 그런 태도에 어느덧 익숙해졌어요.”
왕비는 좋게 말하면 독특했고, 나쁘게 말하면 이상했다. 특히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점이 그랬다.
늘 자신들을 존중하는 다정다감한 태도와 세심한 배려도 그렇지만, 무슨 일이 생기든 권위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그게 어떤 의미로는 더욱 무서웠다. 그런 것 없이도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게.
“왕비님께서 그런 분이시기에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게 무엇이든.”
에스더의 말에 여인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약속한 듯 가슴에 왼손을 올리는 그들을 보며 제라니아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기사들이 주군한테 제 충성을 내보일 때나 볼 수 있는, 경애를 상징하는 동작을 취하며 세라가 입을 열었다.
“왕비님.”
“네.”
“저는 교장이 되고 싶어요.”
뜬금없는 고백에 제라니아는 어떤 대답을 건넬지 잠시 고민했다. 여인들 몇이 해보라고 격려를 건네는 것에 세라는 밝게 웃었다.
“밖에서 이런 소리를 하면 웃음거리만 되겠죠. 평민 여자가 교장이라니, 꿈도 크다고. 하지만, 여기 있으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라니아와 시선을 마주치자, 세라는 움찔 몸을 떨었다. 반사적으로 내려가려는 고개를 꿋꿋이 올리고 버텼다.
“사실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평민인 제가 왕비님께 이렇게 고개를 들고 말씀을 드릴 수 있다는 게, 저 같은 게 왕비님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요. 그게 너무 기뻐요.”
말을 끝내자마자 후다닥 얼굴을 푹 숙이는 세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잘했다는 듯 엘리자베스가 세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옆에 서 있던 노라가 눈을 휘어 웃었다.
“왕비님, 이 안에서는 복잡한 건 전부 잊으셔도 돼요. 저희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오랜 친우건 정적이건, 평민이건 귀족이건 상관없었다. 제라니아는 그런 장소를 만들고자 했다. 제대로 잘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야 나았다.
“그걸 바라시고 여길 만드셨다 하셨잖아요. 그래 놓고 저희보다 생각이 많으시면 어떻게 해요.”
“저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 앞가림 정도도 못 하지는 않으니까요.”
조용히 대답하는 레이나에게 동조하듯 여인들은 입가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제라니아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네!”
입을 모아 말하는 여인들의 음성이 기운차게 울렸다.
돌아오는 길에는 부슬비가 내렸다.
본궁의 바로 앞에 세워진 마차의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는 제라니아의 머리 위로 커다란 천이 펼쳐졌다.
이 정도 비는 그냥 맞아도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가 아프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제라니아는 얌전히 걸어 궁 안으로 들어섰다.
처소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려던 중, 복도에 모습을 드러낸 이를 발견한 제라니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케라온 공작.”
“왕비님을 뵙습니다.”
육중한 덩치에 상당히 거친 말투, 육십이 훌쩍 넘었는데도 남자는 조금도 노쇠해 보이지 않았다. 맹수가 먹이를 노리듯 날카로운 눈빛에 제라니아의 뒤에 서 있던 시녀들과 병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형식적인 안부를 주고받던 중 알란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나저나, 최근 난리도 아니라 들었습니다. 오는 길이 무척 떠들썩하더군요.”
제라니아는 태연한 얼굴로 응수했다.
“아무쪼록 순탄한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답니다. 클라단에 별일은 없나요?”
“일이야 많지요. 혈기 왕성한 녀석들을 모아뒀더니, 매번 사고가 끊이지 않는답니다.”
알란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겉으로나마 보이는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그러고 보면, 공작과 이렇게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던가.
제라니아는 지나가듯 넌지시 말했다.
“클라단은 산맥이 주된 곳이라, 쓸 만한 길이 적다고 들었습니다. 길을 좀 정리해볼 생각은 여전히 없습니까?”
프란츠가 즉위한 뒤, 제라니아와 이렌스는 합심해 도로를 정리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왕국 내의 도로는 대부분 돌과 자갈을 뿌려놓은 것에 불과해, 장마철이나 겨울철에는 통행이 불편했다.
하지만 이미 아카데미를 짓는 것만도 예산이 상당수 소요된 덕에, 본격적인 공사는 2년 뒤로 미루어졌다. 트라이탄과 클라단은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 공작들과 따로 논의를 거쳤다.
두 공작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아론 휴스타인은 받아들였고, 알란 케라온은 거절했다.
이미 끝난 이야기라지만 아깝기는 했다. 길이 워낙 험해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주거지로는 상당히 불편할 터.
광물이 특산품인 만큼 교역이 활성화되면 지금보다 삶의 질이 더 나아질 텐데.
“지금으로도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가끔 제라니아는 알란에게서 높고도 험준한 벽을 느꼈다. 과연 이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하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예산이 부담되리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분명 영지에 이득이 될 거라 생각해요. 교통이 원활해지면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전보다 훨씬 나아질 테고요.”
물러서지 않는 왕비를 알란이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왜 이리도 신경을 쓰십니까? 영지의 발전은 영주의 관할이지 않습니까. 왕비님께서는 이보다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으실 텐데요.”
“클라단 역시 왕국의 영토니까요. 다 같이 발전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알란이 헛헛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자못 서늘했다.
“왕비님의 자비로운 마음에 감읍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왕비님,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도태될 따름이지요.”
제라니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을 일일이 구제하자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무리 훌륭한 국왕이라도, 국민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제라니아의 대답에 알란은 고개를 저었다.
“왕비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전제가 잘못되었다 생각합니다.”
현실을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희미한 연민이 알란의 눈가를 스쳐 갔다.
“강하기 때문에, 모든 이의 위에 설 자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확신이 깃들어 있는 그의 눈을 보자마자, 제라니아는 직감했다.
눈앞의 상대를 설득하는 건 정말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가능하다 하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
제라니아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털어내며 루이스와 샤를로테를 떠올렸다. 세대가 교체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걸까.
정말 그것밖에는?
막막한 심정을 추스르며 제라니아는 태연한 얼굴을 꾸며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