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협상 (2)
천천히 글을 읽어 내리는 벤자민과 달리 에이르는 단박에 표정이 변했다.
“이건….”
비록 면세 혜택을 거두었다 하나, 이는 신전이 거두어들이는 수익에 해당할 뿐 신전이 자리한 부지의 토지세와 같은 항목은 여전히 면제되고 있었다.
종이에는 부지에 관한 토지세를 추가하는 것과 더불어, 신전에서 잉여로 남는 비용의 출처를 확실히 할 것, 마법을 타고난 이가 신전에 속하는 것을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바꿀 것, 신전이 가진 재판 관할권의 제한 등이 적혀 있었다.
이 모든 항목이 가리키는 목표는 단 하나였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예전에 들었던 말을 중얼거리는 에이르에게 제라니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이게 그 대답입니까?”
에이르의 손가락이 정교분리에 초점을 둔 것이 분명한 항목들을 손가락으로 슥 훑어 내렸다.
우직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던 벤자민은 모르겠지만, 신전에서 구를 만큼 굴렀던 에이르는 이 조약서의 무게를 바로 깨달았다.
어려운 일이다. 신전법에 손을 대야 하는 만큼 신전 내부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고, 지나치게 급진적이지는 않으나 반발을 불러오기에는 충분했다.
“아비스 와이엇에게 죄를 물은 다음, 왕실에서 내놓을 협의안입니다. 세부 사항은 상의를 해야겠지만, 항목이 변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해요.”
자비롭고 인자하기로 유명하던 대신전의 수장이 스무 해가 넘도록 타인의 목숨을 갈취해 왔다는 이면이 드러나면 한바탕 여론이 들썩이리라.
신전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될 것이고, 이미지 쇄신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겠지.
영웅은 난세에 등장한다 했던가. 대대적인 개혁을 추구하기에는 더없이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신전이 가진 권력을 약화시키고, 토착화된 신전과의 연결을 끊어낼 때가 온 것이다.
“여러분에게 바라는 건 한 가지입니다. 이 조약이 수용될 수 있도록 내부를 설득해줄 것. 담보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물을 받았으면 하는데요. 계약의 효력이 다할 때 돌려드리겠습니다.”
정식 신관인 데리트에 임명되고부터, 신관들은 모두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성물을 하나씩 부여받게 된다. 그들의 자리를 상징하는, 이피나스의 증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왕비의 얼굴은 더없이 온화했다.
벤자민은 힐끔 에이르의 눈치를 보았다. 이런 일에 머리를 쓰는 건 제 몫이 아니었다. 얌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는 벤자민을 속내를 모를 눈으로 바라보던 에이르가 굳건히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도록 하죠.”
제라니아는 싱긋 웃었다.
“그럼 이제, 판을 짜보도록 할까요.”
* * *
파견을 나갔던 신관들이 시신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대신전을 뒤덮었다. 정숙을 요구하는 대신전의 홀에서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피나스 벤자민과 에이르는 아직도 소식이 없나.”
걱정스레 묻는 세드릭을 향해 딜런은 코웃음을 쳤다.
“흥. 이피나스 에이르는 몰라도, 이피나스 벤자민은 또 어딘가에서 노닥거리고나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정말 벤자민에게 박하군.”
“규율이란 본디 윗사람부터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입니다. 이피나스 세드릭이야말로, 그에게 너무 무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허허, 제 할 일은 다 하지 않습니까. 그만한 인재라면 그 정도 일탈쯤은 관대하게 이해할 수 있지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와이엇의 입이 열렸다.
“아까운 이들이 죽고 말았군.”
잔잔하지만, 침통한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일동은 숙연해졌다. 와이엇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유일하게 돌아온 생존자가 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예. 침묵의 방에 들여놓았다지요. 신관들이 앞을 지키고 있어, 안을 살피지는 못했습니다.”
“이피나스 벤자민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니…. 패기는 칭찬할 만하더군요.”
단테는 허허 웃으며 턱에 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불퉁한 표정을 지은 채로 딜런은 제가 씹어 넘긴 쪽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아비스 와이엇은 위험한 자입니다. 그는 신전이 추구하는 관념을 저버렸고, 지켜져야 할 가치를 파괴했습니다. 침묵의 방과 지하 감옥에 그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만나서 하도록 하지요. 이 쪽지를 받은 즉시, 믿을 만한 신관들을 소집해 지하 감옥으로 내려와 주십시오. - 에이르 산드리아.
추신. 벤자민 산드리아는 제 옆에 있습니다.』
지하 감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에이르 산드리아는 헛소리를 하는 인간이 아니다. 와이엇을 마주친 걸 생각하면 필히 뭔가 이상이 생겼을 터. 신관들을 풀어 그를 찾자고 해야 하는가.
딜런은 쪽지를 배달했던 청년의 얼굴을 기억했다. 다니엘 산드리아. 벤자민이 주워 온 결계 마법사.
그는 지금 충직한 개처럼 침묵의 방을 지키고 있다. 실랑이를 벌이면서도 절대 사람을 들이지 않는 모습에서 완고한 고집이 엿보였다.
“신관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일단 각자의 할 일을 하라 일러두기는 했습니다만…. 말이 퍼지는 걸 아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대신전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통제하도록 하십시오. 일이 이 이상 커져서는 안 됩니다.”
똑똑.
한창 논의가 오가던 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관들의 고개가 문을 향해 돌아가는 순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금빛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고고한 여인의 시선이 좌중을 슥 훑었다.
무미건조한 사과가 에이르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소집을 명하셨다지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와이엇의 눈동자가 퍼석하게 굳었다. 저를 향하는 시선들을 모른 척 자리에 앉는 에이르에게 세드릭이 물었다.
“혹시, 이피나스 벤자민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자가 어디 갔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냉랭하게 울리는 음성 역시 평소와 같았다. 비어 있는 자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에이르는 나직이 선언했다.
“회의를 마저 하도록 하죠.”
다음 날, 한 통의 고발장이 수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현 아비스, 와이엇 산드리아가 그간 치러온 악행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글의 마지막에는.
벤자민 산드리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 *
벤자민이 보낸 탄원서에 대신전은 발칵 뒤집혔다. 어떻게든 상황을 축소하고 싶은 그들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봤는지, 벤자민은 제법 치밀하게 굴었다.
그가 보낸 돌돌 말려 있는 종이 뭉치를 펼치자마자 쩌렁쩌렁한 소리가 홀을 가득 울렸다. 종이에 낱낱이 적혀 있는 죄목을 들으며 경악하던 사람들은, 마지막에 언급된 벤자민 산드리아의 이름을 듣고는 기함했다.
입단속을 시켰지만 소문이 날개 달린 듯 퍼져나가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는 비단 신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고발장을 보낸 다음 날,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너도나도 모여 이 대형 사건의 전말에 관해 숙덕거렸다.
“소식 들었어요? 벤자민 산드리아가 신전에 고발장을 보냈다고!”
“상대는 아비스라지요? 무모하다고 해야 하나,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신전에서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지요. 근거 없는 낭설이라면 져야 할 책임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아니에요. 듣자 하니 증거가 분명하게 있다고 하더군요. 희생된 사람들 중에 귀족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말입니다.”
“저런,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천인공노할 자가 아닐 수 없군요!”
소문은 힘껏 날갯짓을 해, 화려한 연회장을 벗어나 시끌벅적한 거리에까지 다다랐다.
“그거 아나? 대신전의 아비스가 사실 사람을 먹고 사는 괴물이라던데!”
“엥, 마수가 아비스를 잡아먹고 그 행세를 한다는 게 아니라?”
“어떤 신관님이 사라진 사람들을 발견했다고 하더이다. 진실을 알리고자 용기 있게 고발장을 보냈다고, 내 아는 신관님이 그리 말하더만.”
“아이고, 혹시 내 딸도 거기 있을까요? 제발 그랬으면 좋으련만….”
들판에 불이 붙은 듯 거세지는 여론에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역시 커져갔다. 왕실은 사태를 파악한 뒤, 재판을 열어 이 문제를 엄중히 다룰 것을 공표했다.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벤자민 산드리아는 왕실에 제 신변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괜히 들쑤시고 다닌다며 벤자민을 향해 악의 어린 의견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영웅으로 취급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신전은 수호자의 부재로 불안해하는 신관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바쁜 한편, 내부의 논의 끝에 왕실이 요구하는 재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 역시 민심을 잠재우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일찍이 인지한 탓이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걸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공식적으로 아니라 증명되는 것만으로도 논란을 다소 잠재울 수 있었다.
고발장의 내용은 상당히 자세하게, 여러 사람의 입으로 옮겨지며 살이 붙었다.
일전에 계획한 대로.
“설마 그 소문의 근원이 여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겠지.”
넓은 방에는 꽤 많은 수의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소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새침하게 웃는 에스더의 옆에서 레이나가 조용히 말했다.
“제대로 꼬아 놨겠지요. 출처가 드러나지 않게.”
“네, 네. 시키는 대로 했다니까. 도대체가, 이런 쪽 머리는 잘 굴러가네, 당신. 익숙해서 그런가?”
적이었음 좀 두려웠을 것 같다며 능청을 떠는 에스더에게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레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6년 전, 일찍이 목이 떨어졌어야 할 목숨이 지금까지 질기게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남편의 목이 떨어질 때, 그는 이미 죄를 물어 투옥 중이었던 고로 목숨을 건졌다.
다시 떠올려도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 발목을 붙들었다 생각했던 사건 덕에 목숨을 건지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니.
“조금 더 부추겨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왕비님?”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하는 한나에게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온 나라의 이목을 끌어야 하니까요.”
“재판일까지는 무리 없이 진행될 거라 생각됩니다. 소문은 말보다 빠르다고 하니까요.”
길게 끌어봐야 이쪽이 손해이므로, 재판 날짜는 열흘 뒤로 잡았다. 촉박한 일정 탓에 이렌스와 제라니아는 밤잠을 줄여가며 판을 짜야만 했다.
벤자민과는 그날 이후로 접촉하지 않았다.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거릴 여지를 줄 필요는 없었다.
구출한 사람들의 안위는 그대로 티레인에게 맡기기로 했다. 왕실의 병사를 보내다가 위치가 발각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재판 시작 사흘 전까지는 준비가 끝났으면 해요.”
“과연, 밟겠다면 확실히 밟아버리겠다 이거시군요.”
여기저기서 웃음이 와르르 터졌다. 진지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제라니아가 손짓하자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그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모두, 고마워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라와 줘서.”
소문을 퍼트리기 위해 제라니아는 살롱에 소속된 여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모여 있는 이들은 각자의 장소에서 제법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카데미 교사에서부터 길드의 장인, 상단의 실세에 사교계의 마당발까지.
이런 식으로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는 건 아니나, 제라니아는 늘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누군가의 힘을 빌릴 때는 언제나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 법이니까.
제라니아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여인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 중 대표로 나선 건 에스더였다.
“왕비님, 기억하시나요. 살롱 초기의 분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