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협상 (1)
“와, 소리가 전혀 안 들리는군요.”
귀를 기울이던 벤자민이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열심히 소리도 질러봤지만 잠잠한 걸 보아하니, 방음 하나는 철저하게 되는 모양이다.
소소하게 궁금했던 의문 하나가 풀렸다. 이래서 6년 전, 이 공간을 발견하지 못했던 거군.
“진짜 이걸 어쩌면 좋답니까. 제 손목엔 제어구가 채워져 있지, 선배는 무력과는 인연이 없지. 적들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 이거 참.”
감옥 맞은편 바닥에 기대어 앉아 있던 에이르가 조용히 말했다.
“수가 없는 거 아니잖아.”
“이런, 눈치챘습니까?”
능청스레 답한 벤자민이 무릎을 꿇은 채로 신발 안쪽에 끼워두었던 얇고 긴 막대 하나를 꺼냈다. 어둠 속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고로, 에이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게 뭐지?”
“프리텐이요.”
철컥철컥, 열쇠 구멍을 쑤시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대충 감을 잡았는지 반색을 한 벤자민이 에이르를 향해 고갯짓했다. 가까이 다가온 에이르가 나직이 속삭였다.
“프리텐이라고? 그건 또 언제 가지고 나온 거야.”
프리텐은 얼핏 보기엔 평범한 금속처럼 보이지만, 마력을 가하면 단단하던 겉이 물러져 다른 모양으로 변하는 게 가능하다. 그 힘의 크기에 따라 물러지는 정도 역시 달라졌다.
때문에 마력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 힘을 제어하는 훈련에서 주로 쓰였다.
신전에서 마법을 다루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만져봤을 금속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마력이 차단된 상태고, 그래서 선배의 도움이 필요해요. 음, 대충 이런 모양일 텐데.”
벤자민의 손짓을 따라 에이르는 섬세하게 힘을 사용해, 막대를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바꾸었다. 그걸 제어구의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자 찰카닥, 소리와 함께 제어구가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벤자민은 자유로워진 손목을 매만졌다. 어둠 속에서도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그는 부러 크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손목이야.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하진 못할망정, 이렇게 괴롭히다니.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이란 참 문제로군요.”
“이걸 어떻게….”
“간단한 잡기술일 뿐이랍니다. 아,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어둠에 눈이 익자 눈을 찡긋거리는 벤자민의 얼굴이 무척 잘 보였다. 에이르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자,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벤자민이 마력을 되찾았으니 빠져나가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와이엇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나가서 어떻게 할 건데요?”
돌아오는 반박에 에이르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와 닿아 있는 손바닥을 적셨다.
“당연히, 이 사람들을 구하고 진실을 밝힐 거다.”
벤자민은 나직이 첨언했다.
“하지만, 선배. 신전에 이 이야기를 한다고 과연 우리를 믿을까요?”
“증인이 이렇게 많아. 아무리 그라도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해.”
“그렇지만 여기는 대신전이죠. 암묵적인 합의 아래 사건 하나 묻는 것쯤은 어렵지 않아요. 선배도 잘 아실 텐데요.”
주변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훌쩍거리는 울음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그 모든 절망 속에서, 에이르는 살며시 인상을 썼다.
“그래서, 그게 무서워서 이대로 사건을 포기하자고?”
“아니요. 단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그가 이 신전의 최고 권력자인 이상, 이 문제는 명백하게 우리가 불리해요. 와이엇이 말하는 걸 보면, 고위 신관들 중에 한패가 더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한쪽 무릎을 세워 앉은 벤자민이 팔을 그 위로 턱 걸쳤다. 그의 손끝에 들려 있는 제어구가 공중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피나스 딜런에게만 쪽지를 보낸 이유도 그래서잖아요?”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딜런은 이런 문제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제게 호통을 치던 딜런의 얼굴을 연상하던 벤자민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그 양반이 미쳤다고 이런 짓에 가담했겠어요. 신의 이름에 먹칠하는 인간은 자기 손으로 직접 처단하고도 남을 텐데요.”
심지어 능력 특성도 번개였다. 그한테 혼날 때마다 이러다 벼락을 맞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무엇보다 이건 대신전이 생긴 이래, 역대 최악의 치부가 될 거고요. 신전 내에서 합의하에 진실을 밝힌다는 건, 제 생각엔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요.”
덤덤히 제 의견을 밝히는 벤자민에게 에이르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데?”
“우리끼리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좀 더 판을 키우는 게 어떨까 싶어요. 무척 요란해서, 절대로 묻을 수 없게. 마침 상황도 그러기 딱 좋고.”
신관들이 처참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으니 며칠은 내리 시끄러울 것이다. 설마 그 사람은 이것까지 예상하고 그렇게 요란 법석을 떨었던 건가.
생각에 잠긴 벤자민의 얼굴에서 답을 읽어낸 에이르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너 설마,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자는 말을 하는 거야?”
“맞아요.”
예를 들면, 왕실이라든가.
“왕실에 이 일을 고발하겠다고? 그쪽에서 대가 없이 우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
기가 막혀 속닥거리는 에이르에게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 그만한 대가를 내놓아야 하겠죠. 지금의 국왕은 신전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선배도 알고 있잖아요. 그게 답이라는 걸요.”
어둠에 적응하니, 어느 정도 얼굴 윤곽은 구분이 되었다. 벤자민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힐끗 시선을 두었다. 체념한 듯한 사람도, 울고 있는 사람도, 분한 듯 씨근덕거리는 사람도 보였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청각이 예민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속살거리는 목소리나 흐느끼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숨소리 등이 한데 엉켜들어 어떠한 감정을 형성했다.
안개처럼 사방에 내리깔린 두려움이 목을 옥죄는 듯했다.
“‘두려워도 앞으로 나아가라. 그 한계가 올 때까지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것만큼 축복인 게 없나니. 선하려 하기보다, 네 마음속에 있는 악을 인내하라. 악이 너를 집어삼키게 두지 말지어다.’”
경전의 한 구절을 읊는 벤자민의 음성이 자못 엄숙했다. 수제자인 다니엘이 들었다면 ‘왜 갑자기 안 어울리게 신관인 척하세요?’ 라며 뒷걸음질을 쳤을 것이다.
“우리는 신을 섬기는 자잖아요. 신께서는 가난한 이를 도우라 하셨고, 곤경에 처한 이를 내버려 두지 말라 하셨으니까요. 당장의 이익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요.”
어두운 와중에도 벤자민은 에이르의 얼굴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선명하게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를 올곧게 응시하며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혼자서는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해서요.”
“…….”
“선배, 도와줘요.”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더없이 잔잔했다. 그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던 에이르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넌 정말 웃긴 놈이야. 네가 특출 난 건, 오로지 그 능력뿐인 거 알고는 있지?”
거침없는 독설에도 벤자민은 뒷머리를 긁적이기만 했다. 에이르는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신은 너를 선택한 건가 싶을 때가 있어.”
이것저것 재기보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타인을 연민할 수 있기 때문에. 거창한 의무감은 없더라도 자신의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이라서.
“선배의 능력이야말로 특별하잖아요.”
“글쎄. 과연 그럴까.”
쓸쓸한 미소가 에이르의 입가에 떠올랐다. 뭐라고 묻기도 전에 에이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으라는 듯 내밀어진 손을 벤자민은 사양하지 않았다.
에이르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쭈욱 기지개를 켰다. 금속 막대를 쥐고 씩 웃는 벤자민의 얼굴에 장난기가 스며들었다.
“감옥에서 나가는 건 괜찮은데, 그 뒤가 문제네요.”
눈에 안 띄고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벤자민에게 에이르는 말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다 방법이 있으니까.
“그래서, 신전의 지하에서부터 하수도로 나가는 통로를 따라 밖으로 나오신 거군요.”
제라니아의 말에 에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수도에 대한 건 레테와 더불어 자신을 붙잡았던 남자에게서 읽어낸 정보 중 하나였다.
사람들을 그냥 그곳에 둘 수는 없어, 다 같이 이동하느라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무사히 탈출했다. 하수도는 수도 전역으로 뻗어 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티레인이 내밀었던 쪽지에 적힌 장소로 향했다. 커다란 저택에 도착하자, 무장한 병사들과 더불어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남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사람들을 그곳에 수용한 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왕궁의 담을 넘었다. 국왕 부처가 미리 처소 근처를 순찰하는 병사의 수를 줄여둔 덕분에 수월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새삼 제라니아는 자신의 앞에 거물들이 앉아 있다는 걸 실감했다. 대신관이라 불리는 자리는 아무나 앉는 게 아니라더니.
‘아니, 그 애송이. 상처가 그렇게 깊은 주제에 절 바라보는 눈빛이 엄청나게 또렷하더군요. 여기서 촉이 왔죠. 뭔가 나한테 수작을 걸고 있구나!’
투덜거리는 티레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당장 죽은 사람들만 보더라도, 7년 전 아렌타에서 있었던 몰살 사건의 현장과 흡사하더란 말입니다. 증거는 없지만 감이라는 게 있습니다. 덕분에 아직 목이 잘 붙어 있기도 하고요.’
티레인은 왕국에서도 몇 안 된다는 마법 면역 체질을 타고난 이였다.
물리적인 마법은 몰라도, 정신에 작용하는 마법은 그게 무엇이든 일체 통하지 않았다. 프란츠가 그를 외부로 돌리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마법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면, 바로 우리를 몰살하고 도망치려 할 거라는 직감이 들더군요. 그래서 우선 신전으로 데려갔습니다. 일단 신원을 알아둔 뒤, 신전에 맡겨두고 나중에 따로 병사를 보내는 게 훨씬 안전하니까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다 잡은 고기를 두고 인내심을 발휘하는 일은 무척 고되었지만, 티레인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벤자민이라고 했던가. 그 남자 역시 상대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이 있다면 분명 찾아올 겁니다. 자기도 죽을 뻔한 척하며 굳이 일행을 몰살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대신전 근처의 하수도에서 시신들이 발견되었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요.’
티레인은 제라니아가 말했던, ‘책임감은 있지만 충성이 과하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했던 평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조건을 먼저 제시하죠.”
제라니아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이를 그들 앞으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