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밝혀지는 진실 (5)
벽돌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벽이 옆으로 소리 없이 움직였다.
사람 몇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그 안쪽에 만들어져 있는 똑같은 구조의 감옥을 본 순간 벤자민은 탄성을 토했다.
“세상에…….”
조용한 바깥과 달리 감옥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아이에서부터 어른, 노인. 나이도 성별도 모두 다양했다.
투옥되어 있던 사람들은 벽이 열리자마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감옥 안쪽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수십 쌍의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다.
벤자민은 앞장서 감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도 용기 있게 창살을 붙잡고 있는 한 여인에게 다가가자, 수척한 얼굴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구하러 온 거니까요.”
경계를 늦추려는 듯 사람 좋게 웃으면서도 벤자민은 착잡한 마음을 아주 숨기지는 못했다.
“마력으로 움직이는 장치가 아니라서, 계속 발견되지 않았던 거지.”
입구에 선 에이르가 덤덤히 말했다. 감옥에 달려 있는 자물쇠를 확인하던 벤자민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일단 이 사람들부터 밖으로 데리고 가야겠네요. 나머지 일은 그다음에…. 선배!”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이르는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두터운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아 뒤로 끌어당기는 것을 보자마자 벤자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기사의 복장을 한 이들이 벽의 입구에 서 있었다. 자신을 붙잡은 상대의 팔을 움켜쥔 채 발버둥을 치던 에이르의 입이 틀어막혔다.
그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벤자민은 그의 호칭을 중얼거렸다.
“……아비스.”
“두 사람 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인자하게 웃는 와이엇과 달리 벤자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군.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실종된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어쩌다 하필, 신전의 지하 감옥에서 발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침착하게 대답하는 벤자민을 보며 와이엇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설마 자네들이 여기를 발견할 줄은 몰랐네.”
순순히 범행을 시인하는 것에 벤자민은 가만히 이를 사리물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이 일제히 숨을 죽인 가운데, 비아냥을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 들켰으니 자포자기를 하신 건 당연히 아닌 것 같고, 여기서 우리 입을 틀어막겠다 이겁니까?”
“글쎄, 자네와 에이르는 귀중한 인재가 아닌가. 여기에서 그 목숨을 다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있지 않겠나?”
돌려 말하고 있지만 요컨대 자신들과 손을 잡자는 뜻이었다. 여전히 붙잡혀 있는 에이르에 힐끔 눈길을 준 벤자민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협박을 참 고상하게도 하시는군요.”
망령된 늙은이가 머리 하난 빠르게도 굴리는군.
“저희가 입을 다문다고, 이 일이 온전히 덮어질 거라 생각하십니까?”
“허허, 왜 안 될 거라 생각하나?”
호언장담하는 목소리에 벤자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믿는 구석 없이 저런 소리를 할 양반이 아니었다.
“악!”
손가락을 깨물린 성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입을 막은 손이 떨어져 나간 틈을 타 에이르는 힘껏 소리쳤다.
“벤자민, 헛소리에 넘어가지…. 윽!”
제 복부에 가해지는 충격에 에이르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신음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던 벤자민은 에이르의 목에 칼이 겨눠지는 것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대략 서 있는 기사는 대여섯 명, 신관은 셋쯤 된다. 솔직하게 벤자민은 저들을 모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에이르가 인질로 잡혀 있지 않았더라면 고민할 것도 없었겠지.
그리고 저 노인네 역시도 그것을 예상했을 터다. 하지만 자신이 굴복하면 분명히 둘 다 죽는다.
손을 잡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그렇지만 상대가 배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 청년처럼 낙인을 찍어 자신을 통제하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사들이 벤자민에게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무릎을 꿇려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되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일절 없었다.
제 앞으로 다가온 와이엇을 올려다보며 그는 초연하게 말했다.
“…이피나스 에이르를 놓아줘요.”
“으으읍!”
나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에이르가 신음으로 항의했으나, 벤자민은 조용히 덧붙였다.
“경고하건대, 저 사람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여러분 전부 무사하지는 못할 겁니다.”
서느런 경고가 감옥 안을 훑었다. 가만히 자신을 노려보는 벤자민의 머리 위로 와이엇이 손을 뻗었다.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지.”
“…….”
“자네가 가진 마력은 얼마나 강대할까.”
벤자민은 대신전의 역대 수호자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한 능력을 타고난 남자였다. 야심이 없고 태평한 성격이었으나, 그런 성정마저도 수호자의 자격에 걸맞았다.
전대 수호자가 그를 후계로 지목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절대 악용되어서는 안 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제 힘을 빨아들이겠다고요.”
“자네의 능력은 결계니까. 방어에 치중한 능력인 만큼 힘을 흡수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
탐욕이 깃든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빛났다. 벤자민은 속으로 조소했다.
“죽기 전에 한 가지만 묻죠. 대체 몇이나 죽인 겁니까?”
“자네는 음식을 먹을 때, 몇 번 먹었는지 세어가며 먹나?”
“올해 들어 최고로 기막힌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와이엇의 손이 벤자민의 이마를 덮었다. 그대로 힘을 빨아들이려고 시도하는 순간, 바깥에 서 있던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개중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비스, 누군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제압해.”
“……한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와이엇이 재빨리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제 손목을 감싸는 차가운 무언가를 느끼고 벤자민은 침음했다. 기사들은 근처에 있는 감옥에 벤자민을 밀어 넣은 뒤, 에이르를 그 안으로 던졌다.
쇠창살로 된 문이 철컹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와이엇이 말했다.
“운이 좋군. 수명이 하루라도 늘어났으니 말이야.”
기사들이 모두 밖으로 나오자, 벽이 움직여 흐릿한 빛이 들어오던 구멍을 메웠다.
완벽한 어둠이었다.
신관들 여럿이 감옥의 계단을 부리나케 내려왔다. 앞장서서 길을 내려온 다니엘은 감옥 입구에 서 있는 와이엇과 기사들을 발견하고 눈을 깜빡였다.
“어라.”
“아비스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다니엘의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와이엇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수상한 자들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걸 봐서 말이네. 혹시 몰라 쫓아와 봤는데…. 아무도 없네그려.”
희미한 마력석 불빛이 온화한 미소를 그려내는 노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는 자네야말로 어쩐 일인가. 이피나스 딜런.”
“아니, 이 녀석이 급한 일이 있다며 여기에 와야 한다고 하지 뭡니까.”
제게 시선이 몰리는 것에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 스승님 못 보셨습니까? 분명히, 감옥에 가신다고 하셨거든요.”
‘분명히’를 힘주어 발음했다. 썰렁한 바람이 아무도 없는 감옥 안을 한 바퀴 돌았다.
“글쎄다. 내가 왔을 때는 이미 없더구나. 다른 장소로 간 게 아닐까.”
부드러운 미소에 이상하게도 오한이 돋아, 다니엘은 가만히 제 팔을 문질렀다. 감옥 내의 쌀쌀한 공기 탓일까. 방금 전 벤자민과 나누었던 대화와 싸해지는 기분이 한데 엉켜들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지하 감옥으로 간다.’
‘예? 거기는 뭐 하러요.’
‘사람을 구하러.’
‘…뭔지는 모르겠는데, 위험한 일이에요? 그런 거라면 저도 같이 데려가요.’
에이르는 고개를 저었고, 벤자민은 싱긋 웃었다.
‘아니, 네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서.’
‘시킬 일이요?’
‘당장 이피나스 딜런에게 가서, 이 쪽지를 전하거라.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에이르가 내민 쪽지를 받아든 다니엘이 얼떨떨한 얼굴로 질문했다.
‘왜 하필 그분이에요? 엄청 깐깐하고, 스승님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잖아요.’
‘당연하지. 그는 대신전 최고의 원칙주의자다. 막되어 먹은 행동을 곱게 넘겨주는 사람이 아니야.’
냉정한 평가에 벤자민은 너무하다는 듯 한껏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옹호해주고 싶어도 스승의 지난 행적을 아는 다니엘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에이르가 재차 당부했다.
‘그 쪽지를 전한 걸, 아무한테도 들켜서는 안 된다. 무척 위험한 일이야. 네 목숨 역시 위험할 수 있단다.’
쪽지를 전하기만 하면 되었다. 굳이 딜런과 함께 지하 감옥으로 내려온 것은 에이르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때문이었다.
‘산드리아의 신관으로서,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도록 해라.’
다니엘은 불길하다고 외치는 내면의 소리에 충실하기로 했다. 지하 감옥에 무언가 있다. 힘없는 자신 혼자 가기보다는 권력자와 함께 가는 게 덜 위험하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서둘렀다고 생각했지만, 스승과 이피나스 에이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눈앞의 상대가 그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다.
정말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야, 스승님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그나저나 아비스, 방금 급한 전갈이 들어왔소. 회의를 소집해야 할 것 같소만.”
딜런이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와이엇이 입을 열었다.
“올라가지.”
앞장서 올라가는 사람들을 따라 다니엘은 계단을 올랐다. 죽음과 닮은 고요한 침묵이 텅 비어 있는 감옥 안에 감돌았다.
* * *
저녁이 막 지나고, 보랏빛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앉았다.
넓은 방에 놓여 있는 몇 개의 등불이 화르르 타오르며 안을 비췄다. 남녀 한 쌍이 안락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했다. 여자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망토를 뒤집어쓴 두 개의 인영이 바닥에 착지했다.
탁, 두꺼운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책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여자는 가까이 다가온 이들에게 남아 있는 의자를 권했다. 의자에 앉아 후드를 벗자 밤손님들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에이르와 벤자민은 태연하게 자신들을 맞이하는 국왕 부처에게 시선을 두었다. 무심한 얼굴의 국왕과 달리 왕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니, 저건 웃는 게 아니다.
협상가의 얼굴을 한 제라니아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야기를 들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