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밝혀지는 진실 (4)
레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더 말하는 건 제게 불리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를 파견에 넣어줄 만한 인물이 분명 뒤에 있을 것이다. 제법 지위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레테를 바라보는 벤자민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몰래 처리하기엔 너무 늦었고, 공개적으로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해도 입을 막으려고 할 게 뻔했다. 그 전에 청년에게서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까? 일이 커지면 배후에 있을 이들이 낌새를 채고 도망치려 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궁리하는 벤자민의 등 뒤로 살며시 문이 열렸다. 그걸 본 순간, 레테는 벤자민을 뿌리치고 문이 있는 쪽으로 뛰어가려 했다.
“어허, 어딜.”
돌덩이처럼 무거운 손은 레테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레테의 얼굴에 설핏 스치는 당황을 벤자민은 놓치지 않았다. 결계가 얼마나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마법인지 낱낱이 설명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어느새 문이 닫히고, 바로 지척에서 멈춘 단정한 발걸음 소리를 따라 벤자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인지는 발소리를 듣자마자 알았다.
그 걸음 소리만큼이나 신관복을 단정하게 입은 에이르가 가볍게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이피나스 벤자민.”
“오셨어요, 선배. 아니, 소식은 어떻게 알고….”
“네 제자가 부르더군. 와봐야 할 것 같다고.”
다니엘, 이 자식. 벤자민은 멋쩍게 웃었다. 다니엘이 한쪽 눈가를 손가락으로 당기며 혀를 내미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으니 설명할 필요 없고. 그 녀석이나 붙잡고 있어봐.”
“예?”
새하얀 비단 장갑이 에이르의 손길을 따라 곱게 벗겨지고, 손이 드러났다.
벤자민은 놀랐다. 에이르가 장갑을 벗는 걸 보는 건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막연히 고울 거라 생각했던 손이 생각과는 달라서.
거칠게 문댄 것처럼 붉게 번들거리는 손은 마치 깃털을 다 뽑아낸 닭을 연상케 했다.
“진심이십니까?”
에이르가 성큼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레테는 발버둥을 쳤지만 벤자민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깨에 손끝이 닿는 순간, 레테의 기억이 폭우처럼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어둡고 축축한 공간이 보였다.
‘그러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왼쪽 하수도의 끝은 대신전의 지하로 이어진다. 어떻게 모르겠나.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곳인데.
가장 전투력이 높은 그레이스를 죽인 뒤 곧바로 일리야의 목에 칼을 꽂았다. 빛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사방이 깜깜해졌다. 그의 품에서 튀어나온 검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일행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첨예한 긴장이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하는 이들의 움직임을 포착하자마자 그는 손을 움직였다.
검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어둠 속에서 사람을 도륙내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차가운 날붙이가 살을 베어내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결계사인 폴라가 어떻게든 검들을 막으며 도망치려던 순간,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인 무언가가 그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앞이 보이는 것처럼 정확한 솜씨로.
‘그냥 그 말을 들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유감스럽군요.’
진실에 근접하지 못하게 막아라. 여의치 않을 경우, 죽여서라도.
그게 그에게 내려진 명령이었다.
혼자 무사히 돌아가면 안 되니 적당히 몸에 상처를 입혔다. 제가 직접 독을 먹여 죽인 시체를 질질 끌어 하수도 물에 빠뜨리려는 순간,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방금 전 빠르게 여럿을 죽이기 위해 마력을 상당수 소요한 상태였다. 사람의 숫자에 따라 도망치는 놈을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마침 상처를 입고 어떻게 빠져나왔는지에 대한 변명거리가 애매하던 차였으니, 이용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그는 그 자리에 드러누워 사람들을 기다렸다.
이후로도 여러 가지 기억들이 여과 없이 머릿속에 흘러들었다. 냉혹한 살인마와 순진한 신관을 오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가던 남자의 모습을.
마법을 개화하자마자 그 뛰어난 능력 때문에 도구로 길러졌던 남자의 삶은 상당히 처참했다.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고, 긴 흑발을 가진 여성의 몸에 칼을 꽂는 모습도 보았다.
수없는 기억들 속에서 에이르는 찾아냈다. 이 청년을 이렇게 키운 배후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본 순간, 에이르의 눈가가 가만히 떨렸다.
청년의 몸에 손을 짚은 상태로, 에이르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반응이 없었다. 뭐 문제라도 생겼나? 혹시 내가 잘못 짚은 건 아니겠지? 벤자민이 슬슬 눈치를 볼 찰나였다.
“이…. 개자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욕을 거칠게 내뱉은 그가 레테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찰싹 내리치는 손길과 함께 붉은 손자국이 그의 뺨에 선명하게 찍혔다.
벤자민은 너무 놀라 말을 잃었다.
“선배!”
레테의 멱살을 양손으로 꽉 붙잡은 에이르가 그를 노려보았다. 흉흉한 기세에 벤자민은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에이르가 이토록 격앙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분노에 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 미친놈. 어떻게, 어떻게 이런 미친 짓을!”
레테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무는 것이 그를 결백하게 만들 것처럼. 방금 전까지 생기가 있었던 녹색 눈동자는 감정이 씻겨나간 것처럼 텅 비어 있었고, 벤자민은 그에 자못 소름이 돋았다.
“이피나스 벤자민.”
“네.”
다시금 냉정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박력이 깃들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벤자민에게 에이르는 지시했다.
“꽉 잡고 있어.”
에이르가 우악스럽게 레테의 상의를 찢듯이 들추었다. 여인의 손이 금빛으로 빛나더니, 아무것도 없던 등에 서서히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핏빛의 둥그런 원과 그 안을 복잡하게 채운 글자들.
낙인.
“제어구를 채워서는 안 돼. 낙인은 몸에 마력이 흐르지 않는 순간, 그자의 목숨을 앗아간다.”
과거를 읽어내는 자. 아나샤라 칭송받지만, 정작 에이르가 그 능력을 공개적으로 사용한 적은 평생에 걸쳐 손에 꼽게 적었다. 열 살에 신전에 들어와, 능력을 다루는 법을 익힌 열세 살 이후로는 말이다.
그럼에도 신전의 신관들은 모두가 에이르를 두려워하고, 경외했다. 여인에게서 신을 대변하는 심판자를 보았다. 여인의 말 한마디에 많은 것이 좌우되었고, 가벼운 투정조차 신의 계시로 여겨졌다.
제가 가진 발언의 무게를 깨달았을 때, 에이르는 능력을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로 인해 파생될 결과를 감당하기가 겁이 났다. 장갑을 끼는 것으로 제 의사를 피력했다. 언제나 중립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당장 밧줄 가져와서 이 녀석 묶어놔. 절대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입도 틀어막도록 해.”
서늘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눈앞의 청년을 쏘아보았다.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너한테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자진할 생각은 버려라.”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에이르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벤자민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너는 날 따라와.”
레테를 묶어두고 다니엘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두 사람은 빠르게 복도를 걸어갔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통로로 걸어가며 에이르는 속삭였다.
“이 모든 일은, 아주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 * *
옛날 옛적에, 신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실한 신자였어요. 온 마음을 다해 신을 섬기고 신께 평생을 헌신했지요. 개인의 욕망이나 영달은 뒤로한 채, 오로지 신의 뜻을 추구하며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쳤지요.
하지만, 막상 죽음이 다가온 순간 신관은 자신이 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이미 닳아버린 수명을 되돌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절망하던 순간, 고대에서부터 전해지던 마법서 하나를 찾아냈지요.
『치유 마법은 생명력에 기반하는 만큼, 능력을 사용하면 그만큼 수명이 줄어든다. 다만, 다른 이에게서 생명력을 보충한다면 이를 늦출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생명력이 본래의 몸과 상성이 좋기는 어렵다. 백 명이 넘는 이의 힘을 흡수해야 겨우 한 사람분의 생명력을 채울 수 있으리라.』
아, 그것은 마치 세크렛의 속삭임과도 같았답니다. 신관은 치솟는 삶을 향한 욕구를 이길 수 없었지요. 탑을 쌓기는 힘들더라도, 공든 탑이 무너지기는 쉽듯 타락은 한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신관은 그 순간, 인간의 탈을 벗고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욕망을 먹고 사는 괴물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지요.
“마법들 중, 치유 속성만큼 등가 교환의 원리에 부합되는 마법은 없지.”
에이르는 조용히 말했다. 급한 와중에도 곧은 자세로 걷는 건 한결같았다.
“치유 마법은 본인의 생명력을 마력으로 전환해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 그런 만큼, 치유 마법을 특기로 가진 신관들은 오래 살지 못했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이라도, 보통 쉰을 넘기지 못하니까.”
벤자민이 의아하다는 듯 반박했다.
“하지만…. 아비스께서 뛰어난 분이긴 하잖습니까. 25년 전, 역병이 창궐하던 때도 그렇게 힘을 사용하셨지만 살아 있…. 잠깐만.”
말을 멈춘 벤자민을 대신해 에이르가 덧붙였다.
“그래, 아비스 와이엇은 아직까지도 살아 있지.”
말끝이 스산하게 울렸다.
“왜일까. 의문을 가진 이들이 없진 않았어. 나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였지. 단지 나는 입을 쉽게 열 수 없었고, 그들은 나보다 용감했고 또한 무모했을 뿐이야.”
그들 중 아직도 대신전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었던가. 단순히 이권 싸움의 희생양이라 보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분명 있었음에도 외면했다.
“모두들 다른 이유를 떠올리기보단, 기적이라 생각하고 싶었겠지.”
에이르는 냉기가 가득 서린 어두운 계단에 발을 디뎠다. 망설임 없이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에이르의 뒤를 따라 벤자민은 걸음을 재촉했다.
음울하기 짝이 없는 어둠은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기억을 상기시켰다.
“예전에, 아비스께서 이 아래로 내려가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잘못 본 거라 생각했다. 지하 감옥에는 아무도 없었고, 마력의 흔적 역시 없었으니까.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여기에 정말 무엇이 있었던 건가.
계단을 다 내려오자 지하 감옥의 입구가 보였다. 을씨년스러운 감옥의 모습은 6년 전의 그날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른쪽으로 끝도 없이 뻗은 복도와 양옆으로 자리한 네모난 감옥들이 보였다.
“기적은 너무나도 찬란해서, 사람의 눈을 멀게 해.”
에이르가 벽에 걸려 있는 등에 손을 대자, 마력을 빨아들인 마력석이 하얗게 빛을 냈다. 빛이 닿은 자리에서부터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뒤로 따라오는 그림자를 외면하고 싶어지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오른쪽엔 시선조차 두지 않고, 에이르는 벽을 더듬었다. 감옥의 냉기보다 더 서늘한 목소리가 허공을 수놓았다.
“그 결과가 이거지. 이 신전은, 결벽을 추구하는 이들의 망념이 모여 만들어진 집합체나 다름없어.”
에이르의 행동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던 벤자민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하지만 세상에 하나쯤은, 온전히 깨끗한 곳이 있다 믿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그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
에이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차분한 눈빛을 한 벤자민의 얼굴 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에이르의 손가락이 벽돌 하나를 누른 것과 동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