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밝혀지는 진실 (3)
질문이 함의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럴 것을 예상했기에 티레인은 능숙하게 말을 받았다.
“임무를 수행하던 차였습니다.”
무슨 임무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눈치가 있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티레인을 살피던 벤자민이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다.
“저희를 믿지 않으시는군요.”
정답이었다.
티레인은 신전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기를 찾아온 것은, 제 선에서 해결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판단이 컸다.
그들이 쫓았던 남자의 시신은 다른 장소에 따로 숨겨두었다. 제 손으로 증거를 날려먹는 미련한 짓을 할 리가 있겠나.
“이토록 요란하게 나타나신 것도 그래서입니까?”
저런 꼴로 커다란 수레를 끌고 대신전에 들어왔다는 것부터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을 게 분명했다. 숨기려고 한다 한들 분명 말이 나오리라.
침착하게 대꾸하는 벤자민을 보며 티레인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제법인데?
“신관님, 한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하십시오.”
“왜 그를 침묵의 방으로 데려갔습니까?”
티레인은 발이 넓었고, 그만큼이나 아는 게 많았다. 신전이 말하는 침묵의 방이 어떤 장소인지 안다. 신관들이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평범하게 본다면 이해가 가지 않을 결정이었다.
“필요해서입니다.”
짤막한 대답에 티레인의 입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으하하, 아저씨처럼 웃던 그가 벤자민의 어깨를 요란하게 두드렸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스스럼없는 태도에 이맛살을 구기는 신관들과 달리 벤자민은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던 중, 티레인의 다른 쪽 손이 슥 움직였다. 제 손아귀에 은밀히 들어온 작은 종잇조각을 느낀 벤자민이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건 왜.”
“왕비님이 당신은 믿을 수 있다 하셨지요.”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대답을 내놓았다.
예전에 벌어진 사건의 조사 당시, 벤자민은 대신전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요청에 응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원래 논의했던 규모보다 대략 두 배의 인원을 보내게 된 것 역시 그의 힘이 컸었다.
방금 전의 대답을 듣고 확신했다. 눈앞의 남자가 제법 쓸 만한 패라는 것을.
“그게 필요할 일이 있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티레인은 그 말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껄렁이는 발걸음으로 제 일행에게 다가서는 그의 눈빛이 자못 비장했다.
벤자민은 침묵의 방으로 들어섰다.
창문 하나 없이 새하얀 방 안에 마련된 침대 위에 남자가 누워 있었다. 가지런한 이불이 남자의 가슴께를 덮고 있었다.
당분간 안정이 필요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입니다.
치유를 담당한 신관이 남긴 말이 벤자민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레테의 이마를 짚었다. 푸른 기운이 반듯한 이마로 흘러들어 갔다.
남자의 눈이 천천히 뜨이고,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벤자민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보고 있는 게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남자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이피나스.”
아직 거동이 불편한지 그가 기침을 뱉어냈다. 벤자민은 차분히 말했다.
“누워 있어도 되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침대에 기대어 앉으며 레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를 제외하고 아무런 가구가 없는 새하얀 방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저…. 여기는?”
“침묵의 방이지요.”
순하게 생긴 청년의 어깨를 커다란 손이 와락 붙들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세차게 흔들리는 말간 눈동자를 마주한 벤자민이 특유의 미소를 내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무슨….”
침묵의 방은 모든 것을 차단한다. 소음은 물론, 마력까지도. 누구도 이 방 안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이 방에 결계를 새긴, 신전의 수호자가 허락하지 않는 자들은.
웃음을 띠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왜, 그들을 죽였습니까?”
* * *
“국왕 폐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보고를 올리던 와중, 벨루인 폴리에트가 의아한 듯 질문했다. 프란츠는 펼쳐놓은 종이들을 손등으로 훑으며 냉큼 대꾸했다.
“어떻게 하면 이 귀찮은 찰거머리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나.”
영주들이 보낸 탄원서가 책상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대놓고 영주들을 떼쟁이 어린애들로 취급하는 국왕의 태도에 벨루인은 빙그레 웃었다.
“내전을 벌이실 겁니까?”
다 쓸어버리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뜻이었다. 제라니아도 비슷한 대답을 한 적이 있기에 프란츠는 잠자코 운명에 순응하기로 했다.
“……할 수 없군.”
요 몇 년간 왕권 강화를 위해 평민들을 위한 정책을 주로 밀었던 만큼, 귀족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찔렀다.
도시로 인구가 몰리고 있어 위생 문제나 주거지의 부족 등 여러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도 골치였다.
타국과 조약을 맺은 만큼 그 진행 상황도 유심히 살펴야 했다.
인력은 부족하고 할 일은 넘쳐흘렀다. 이러다 조만간 잠을 자면서도 손을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되지는 않을까. 생뚱맞은 생각을 떠올리던 프란츠는 자신이 제법 피곤한 상태라는 사실을 겨우 인지했다.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프란츠의 앞에 비스킷이 담긴 접시가 내밀어졌다. 힐끔 시선을 들자 무심한 얼굴을 한 이렌스가 서 있었다.
“피곤하신 것 같았는데, 아닙니까?”
“…어떻게 알았지?”
“제가 독심술을 좀 합니다.”
무미건조한 농담을 건네며 이렌스는 책상에 펼쳐져 있는 서류를 그러모았다. 생각 없이 집어넣는 것 같으면서도 차곡차곡 순서대로 정리되는 서류를 눈으로 훑던 벨루인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오늘은 이쯤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비스킷을 하나 집어 입에 넣은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루인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왕비님의 고견을 듣지 못하는 게 아쉽군요. 요즘 집무실에 자주 찾아오시지 않습니까.”
원래였다면 제라니아도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나, 그는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자리를 비웠다.
왕비가 된 이후 두 번의 출산, 교육 체제 정비, 전국 순회, 귀족들과 친목을 다지는 것까지.
1년 전쯤 되어서야 겨우 생긴 여유를 제라니아는 정치에 쏟아부었다. 쉬는 것보다 머리를 굴리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서.
프란츠는 생각했다. 제 주변에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을까. 물론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국왕 폐하.”
“무슨 일이냐.”
“티레인 경께서 만남을 요청하십니다.”
셋은 동시에 문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프란츠가 들여보내라 답하자, 문을 열고 티레인이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급하게 돌아온 건지 꾀죄죄한 옷차림으로도 자세는 참 당당했다. 이렌스가 감탄사를 흘렸다.
“거지꼴이 따로 없군요.”
정다운 인사에 티레인이 미간을 콰직 구겼다.
“책상에 붙어만 있는 장관님보다는 내가 낫지.”
“질투하십니까? 원하신다면 바꿔드릴 수 있습니다만.”
“으악, 됐어! 네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만 봐도 머리가 아파. 도대체 그 많은 걸 언제 다 읽고 처리하는 거냐?”
“하다 보면 됩니다.”
듣느니만 못한 발언이 돌아왔다.
“폐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티레인에게 가볍게 눈짓을 한 벨루인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둔탁하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렌스는 본론을 꺼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군요.”
“요즘 순찰을 강화했으니까. 조급했겠지.”
프란츠는 가만히 소파를 손짓했다. 냉큼 소파에 앉으며 본인의 어깨를 주무르는 티레인에게 그가 물었다.
“범인은 찾았나.”
“음, 그게….”
주군의 눈이 가늘어지는 걸 본 순간 티레인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예, 물론이죠! 분명히 단서는 찾았으니까요. 하지만 알아챘어도 이거 참….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횡설수설하는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이렌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결론은요.”
“일단 다른 사람한테 맡겼어. 감이고 추론일 뿐이지,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말이야. 예민한 문제이기도 하고.”
생각 정리를 마쳤는지, 차분히 입을 여는 티레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제가 누굴 죽였다는 말씀이십니까?”
깜짝 놀랐는지 레테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몸부림을 치는 청년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벤자민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시치미를 떼겠다 이거군요.”
이럴 거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말을 이어가는 음성에는 고저가 없었다.
“훼방을 놓을 생각이었습니까? 7년 전처럼.”
신전 내부에 적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이 7년 전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때와 마찬가지로 방해가 들어올 게 분명했다.
“혼자 살아남은 척, 모두를 속일 생각이었겠지만…. 나라고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은 건 아니라서 말이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거 압니까? 당신 팔뚝에 아주 작은 상흔이 남아 있다는 걸.”
첩자가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벤자민은 파견을 보내기 전, 믿을 수 있는 몇을 불러 이 사실을 전했다. 그들은 조심하겠다 말하며 기꺼이 제 몸에 저주와 닮은 주술을 걸었다.
“그건 주술의 일종입니다. 이 주술에 걸리면, 자신을 죽인 이에게 특정한 흔적이 남게 되지요.”
심지어 추적까지 가능했다. 주술을 건 대가로 술자에게서 날마다 일정량의 마력을 야금야금 먹어치울 뿐.
죽은 일리야를 떠올리며 벤자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혹시 싶었을 뿐인데, 정말 시신으로 돌아올 줄이야.
벤자민의 시선이 레테의 얼굴을 쭉 훑었다. 방금 전 이 청년에 관한 간단한 보고를 받았다.
열셋에 신전으로 들어와 14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마법 능력을 타고났으며 특기는 바람이라 오감이 상당히 발달했다.
갈색 머리카락, 녹색 눈동자, 온화한 인상에 착실한 성격까지. 신관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무척 좋았다.
“……그런 마법이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벤자민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꽤나 억울해 보였다. 녹색 눈동자가 유별나게 반들거렸다.
“절 의심하시는 건 백번 이해합니다만…. 이런 식으로 몰아가시는 건 좀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허.”
더없이 순진해 보이는 청년의 팔에 새겨진 새의 형태를 띤 작은 흔적을 확인한 순간, 벤자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주술을 걸면서도, 절대 보지 않기를 바랐다.
“분명히 존재하는 마법입니다. 증명해줄 사람들도 있고 말이지요.”
도망칠 곳은 없었다. 문은 닫혀 있고 여기는 자신의 공간이며 마법을 부릴 수도 없다. 심문을 하기에는 딱인 공간이었다. 착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벤자민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 솔직히 말하십시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런 짓을 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