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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45화 (146/171)

제145화. 밝혀지는 진실 (2)

밤새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음침하던 먹구름이 사라진 자리로 태양이 환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흙바닥 군데군데 고여 있는 물웅덩이 위로 맑게 갠 하늘과 그 옆을 지나가는 제라니아의 모습이 비쳤다.

“왕비님, 조심하세요!”

비가 온 뒤라 제라니아는 발목까지만 내려오는 남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밑단이 물에 젖으면 곤란하니까. 가죽 신발이 흙바닥에 닿을 때마다 제라니아의 뒤를 바지런히 쫓아가던 시녀들이 나직이 침음했다.

왕비님은 그들이 모셨던 상전 중 가장 특이한 분이었다. 물웅덩이 범벅인 땅이 뭐가 좋다고 굳이 이 길을 걸어가시는 걸까.

귀족으로 태어나 깨끗하고 청결한 것만을 접해온 이들은 제라니아의 행동이 못내 당황스러웠다.

저 멀리 숲이 보이는 풀밭에 발을 디딘 순간,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에 제라니아는 힐끗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늘 위를 빙빙 돌던 매가 아주 천천히, 저 멀리 보이는 샤를로테의 팔 위로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옆을 돌아본 샤를로테와 눈을 마주치자, 샤를로테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제라니아가 가까이 다가가자 얌전히 날개를 접고 있던 매가 부리를 벌려 울음소리를 냈다.

얼핏 듣기에는 위협적으로 들리는 소리에, 뒤를 따라오던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왕비님!”

샤를로테가 걱정 말라는 듯 갈색 날개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눈만 끔뻑대는 매를 따라 제라니아 역시 눈을 깜빡거렸다.

“이 녀석이 왕비님을 알아보는 모양입니다.”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하는 샤를로테에게 제라니아는 불쑥 말했다.

“만져봐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비명을 지르며 만류하는 시녀들에게 제라니아가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하얀 배를 만지자 보들보들한 감촉이 손에 착 달라붙었다.

“맞다, 사냥 대회에서 우승한 거 축하해요.”

매사냥은 귀족들의 유희 중 하나로, 친교의 목적으로 우승 상품을 걸고 간간이 사냥 대회를 여는 귀족들도 꽤 있었다.

겸손하던 발언과 달리 샤를로테의 매사냥 기술은 무척 뛰어났다. 참가하는 대회는 많지 않았으나, 나갈 때마다 족족 명성을 떨쳤다. 여자가 무슨 매를 다루겠냐며 이죽이던 이들도 결과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감사합니다.”

미사여구 없는 깔끔한 대답이 돌아왔다.

샤를로테는 늘 그랬다.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아, 그 속내를 읽기 어려웠다. 제법 친해졌다 생각한 지금도 이럴 때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의문이 든다.

보통 이렇게 짧은 답은 상대의 기분이 상했다는 징조겠지만, 샤를로테가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안다.

“기쁘지 않으세요? 모두가 경을 인정하고 있는데.”

왕실 기사단이 된 이후로 샤를로테는 빠르게 두각을 드러냈다. 여자는 약하다는 편견을 첫날 훈련에서 보기 좋게 박살 낸 그는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기사단에 적응했다.

제가 권유한 일이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명령처럼 보일까 봐 서신을 보낼 때도 일부러 왕실의 직인을 쓰지 않았다.

그저 아까웠을 뿐이었다. 그 뛰어난 재능과 성실한 태도, 믿음직한 성격이.

“무척 기쁩니다.”

“혹시 몰라서 묻는 건데, 제가 경께 대답을 강요하고 있다면….”

샤를로테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보다 한참 작은 왕비를 내려다보던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릴 때는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다지 감정이 풍부한 인간이 아니었다. 기쁘기는 하나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사실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평소보다 표정이 딱딱하신 것 같아서요.”

샤를로테의 몸이 미세하게 흠칫 튀었다. 얌전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왕비는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

윌터가 클라단에 내려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처신을 못하는 건 아니나 가끔 감정적으로 굴 때가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먹이를 매에게 몇 번 물려준 뒤, 샤를로테는 다시 매를 날려 보냈다.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가는 매를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중얼거렸다.

“신기하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매를 다루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꽤 골치를 썩으셨을 것 같은데. 윌터 경도 매는 키우지 않는다 들었어요.”

루이스에 대한 화제는 의식적으로 회피했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굳이 꺼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말씀하신 대로, 매는 길들이기 어려운 동물입니다. 성격도 강하고 자립심도 대단하죠. 하지만 그만큼, 길들이고 나면 보람이 있습니다.”

샤를로테의 손이 보호구를 달고 있는 다른 쪽 손등 위를 툭툭 두드렸다.

“날려 보낸다 해도,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내가 있을 장소는 여기다, 싶은 거지요.”

길들인 후로도 계속해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매가 언제 본능을 되찾아 그의 손을 벗어나게 될지는 모르니까.

“돌아갈 장소라….”

매에 대해 이야기하는 샤를로테는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매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왜 매를 좋아하는 걸까.

“자유롭다는 건, 그만큼 혼자라는 감각을 이겨내야 하지요. 고독을 선택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생각합니다.”

문득 제라니아는 샤를로테의 속성이 매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강하고 담대하지만 돌아갈 장소를 찾아 부유하는 새.

지금 이 대화가 정말로 온전히 매에 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매가 도망가면 어떡해요?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들 수도 있잖아요.”

조심스럽게 건넨 질문에 샤를로테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그려진 미소가 제법 선득했다.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미 오래도록 쌓인 관성에 비하면, 한순간의 충동이란 더없이 미미한 법이니까요.”

아주 오랜 시간 쌓여온 것들이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매의 발목을 움켜쥐겠지.

돌아오지 않을 수 없도록.

* * *

망토를 뒤집어쓴 무리가 커다란 수레를 끌고, 대신전 산드리아를 방문했다. 수레에는 무언가 놓여 있었지만, 까만 천으로 덮여 있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피비린내를 하수구에서나 날 것 같은 악취가 덮어 가렸다. 무리에게서 나는 악취에 그들을 맞이한 신관은 코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야 했다.

신성한 대신전에 이런 괴악한 무리가 찾아오다니!

더럽기 짝이 없는 이들을 바라보는 신관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경멸이 서렸다.

그렇기에,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내놓은 왕실의 증표를 보자마자 그는 눈을 의심했다. 떨리는 손으로 증표를 받아 확인했다.

몇 번을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런 꾀죄죄한 몰골을 한 이들이 정말, 왕실에서 보낸 자들이란 말인가?

“당장 치유 신관을 불러주시오. 환자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피나스 벤자민을 만나고 싶소. 지금 당장.”

긴말 않고 용건을 말하는 무리의 대장을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던 신관은 곧 물러갔다.

잠시 후, 벤자민 산드리아가 신관들 한 무리를 이끌고 그들이 서 있는 곳에 나타났다. 그가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티레인이 눈짓하자, 일행 중 하나가 수레의 천을 벗겨냈다. 그 아래에 누워 있던 시신들을 보자마자 신관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개중에는 그들의 얼굴을 알아본 자들도 있었다.

“그레이스 님!”

“세상에, 저건 일리야 님이 아닙니까.”

“웨슬리!”

설명보다 더 확실한 상황이었다. 티레인은 제 등에 업혀 있던 남자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앞쪽 상의가 찢겨 피범벅이 되어 있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간 신관들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무릎을 구부려, 색색 숨을 몰아쉬는 남자를 이리저리 살피던 벤자민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조용히 질문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하수도 안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꼼꼼히 확인했지만, 살아 있는 건 저 남자 하나뿐이었습니다. 저 남자가 아직 의식이 있을 때, 신분을 확인했습니다. 신전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더군요.”

“당신들이 죽인 게 아니고?!”

시신들을 살피던 신관 중 하나가 격분해 소리쳤다. 티레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이 아니고서야 저런 상처를 낼 수 있을 리가요.”

난도질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기술 없이 무식하게 힘으로 그어 내린 듯한 상처들이 참으로 무시무시했다.

제롬 녀석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반짝 떠올랐지만, 티레인은 넉살 좋게 웃으며 침묵을 선택했다. 다행히도 신관들 역시 납득한 모양이었다.

들것을 가져온 이들이 레테를 그 위에 데려다 눕혔다. 가만히 턱을 매만지던 벤자민이 그들에게 명했다.

“그를 침묵의 방으로 데려가거라.”

“예? 침묵의 방이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신관들에게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니엘.”

“네.”

스물네다섯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자신의 수제자를 바라보는 벤자민의 눈빛이 엄숙했다.

“네가 그 앞을 지켜라.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벤자민의 지시 아래 신관들은 하나둘씩 시신을 공중으로 띄워 움직였다. 시신들은 망자의 안식처로, 살아 있는 이는 침묵의 방으로.

사람들과 함께 멀어지는 다니엘을 뒤로한 채, 벤자민은 티레인과 일행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마터면 장례도 치러주지 못할 뻔했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 말하긴 뭐하지만,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가봐야 해서요.”

티레인이 부드럽게 거절하자, 잠시 조용해졌던 벤자민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어쩌다 왕실의 증표를 가지고 계신 분들께서 하수도에 계셨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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