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밝혀지는 진실 (1)
“백작위? 언니 결혼하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는 코델리아와 달리 제라니아는 조용히 질문했다.
“펠리오르 백작령을 얘기하는 거지?”
“응.”
아이작 바이첸이 가지고 있는 영지는 크게 네 군데였다. 데브론 공작령과 아이슈파인 후작령, 반디 후작령과 펠리오르 백작령이었다.
“아버지가 프레드릭에게 물려준 건 아직 데브론 공작령뿐이지. 돌아가시면 프레드릭이 나머지를 전부 이어받을 테고.”
반디 후작령의 경우 제라니아가 왕실에 시집갈 때 그의 앞으로 넘겨, 현재 아이작의 수중에 남아 있는 건 아이슈파인 후작령과 펠리오르 백작령뿐이었다.
“아이슈파인 후작령을 내주실 리는 없지. 프레드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세력은 필요할 테니까.”
아무리 사이가 좋다 하나, 권력이란 사람의 눈을 간혹 멀게 한다. 아이작은 사람의 선의를 믿었으나 방만하지는 않았다.
왕국의 남쪽 경계에 자리한 아이슈파인 후작령은 데브론과 유리트 산스크리아 공국을 잇는 중간지이자, 국경을 지키는 요새가 자리했다. 후작령이라 하나 그 가치가 결코 데브론에 뒤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릭한테는 협상이고 뭐고 안 먹힐 테니까.”
그제야 맥락을 알아들었는지 코델리아가 짧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짚었다.
“설마, 백작이 되겠다는 거야?”
“맞아.”
뭐가 문제냐는 듯 손등에 턱을 괴는 칼리아에게 코델리아는 재차 의문을 표했다.
“결혼하지 않고? 언니 정말 괜찮겠어?”
많은 재산을 가진 여인이 남자들의 표적이 되는 일은 흔했다. 그렇기에, 남편이 죽고 그 재산을 물려받은 과부는 대개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재혼을 한다.
제라니아는 나직이 물었다.
“아버지한테는 이야기했어?”
“했지.”
“뭐라고 하셔?”
“놀라시더라.”
“하긴,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남자 형제가 없이, 외동으로 자란 여인이 광대한 영토를 승계받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이첸 공작가는 이미 확실한 후계자가 있었다.
피상속인인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고 아들을 포함해 이미 형제가 셋이나 있는 상황에서, 여성이 토지를 받아 작위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행보인지 셋은 잘 알고 있었다. 코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긴 해?”
두 자매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니아가 가운데 놓인 원형 통에서 설탕 한 스푼을 떠 찻잔에 넣고 휘휘 저었다. 칼리아는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정말이지, 단것이 필요했다.
“뭐…. 솔직히 관습법에 가까우니까. 법전마다 적혀 있는 게 다 다르기도 하고.”
사실 그랬기에 여성이 왕이 되는 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언제나 우선순위가 남자 형제에게 있을 뿐이었다.
제라니아의 뒤를 이어 칼리아가 말을 받았다.
“애초에 딸이 정말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면, 외손에게 상속된다는 구절이 모순이 되니까.”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코델리아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한가득했다. 복잡한 걸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칼리아는 본론만 설명했다.
“아버지가 이대로 돌아가시면 영지는 전부 프레드릭의 것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고.”
보통은 여인이 결혼할 때, 여인의 집안에서 지참금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영토는 그 지참금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 즉, 결혼을 하거나 피상속인의 죽음을 거쳐야만 토지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인에게 재산권이 인정되는 건 그토록 어려웠다.
“나는 백작이 되겠어.”
선언은 간결했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눈을 되록되록 굴리던 코델리아가 제 둘째 언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제라니아는 평소와 같았다.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여는 모습까지. 그 모든 동작이 마치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아름다운 소녀 보니타》 이야기를 기억해?”
생뚱맞은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유명하잖아. 평민 여자랑 왕자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
“《고양이 공주님》은? 《플라티나의 드레스》, 《신기한 피리》 이야기는?”
고양이가 되었다 시종에게 구해진 공주님, 요정에게 선물받은 드레스를 입고 왕국 제일의 미인이 되어 왕자님에게 청혼받은 소녀, 동물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피리를 주운 착한 남자아이가 결국 공주님과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까지.
그들이 한 번쯤은 접해봤던 동화들이 제라니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둘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신기하지 않아? 대부분의 동화에서, 나오는 여성이 결혼을 하지 않는 결말은 없다시피 하다는 게. 남성은 꽤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는데도.”
이런 이야기를 두 사람 앞에서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는 제라니아의 손은 테이블 아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게 늘 의문이었어.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야.”
초연한 미소가 제라니아의 입가에 떠올랐다. 칼리아를 직시하는 투명한 녹색 눈이 이미 지나가 버린 여름의 녹음을 떠올리게 했다.
“언니. 언니가 정말 그 길을 가겠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 언니를 도와줄게.”
굳게 다짐하듯 말하는 음성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문득 떠오른 사실에 제라니아는 곤란한 낯빛이 되었다.
“미안해.”
“뭐가?”
“원래였다면, 언니가 반디 후작령을 가져갔어야 맞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칼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동생을 바라보는 분홍빛 눈동자가 따스하게 빛났다.
“눈치채지 못했니? 아버지는 원래부터 네게 그 땅을 주고 싶어 했어.”
아마 다들 알고 있었으리라. 그 증거로 두 동생은 별반 놀란 기색이 없었다.
“너는 우리 중 가장 아버지를 닮았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버지는 너를 가장 예뻐했지. 그렇게 사고를 치는데도 다 덮어주던 걸 봐.”
장난스럽게 말하는 칼리아의 얼굴이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햇빛처럼 화사했다.
“왕세자 전하, 지금의 국왕 폐하와의 결혼은 핑계였을 뿐이지. 알잖아. 명분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분이라는 거. 그런 분이니 오래도록 중립을 유지한 거지. 프레드릭과 네가 대립하는 걸 알면서도, 어느 쪽의 편을 들지 못하던 것도 그래서고.”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칼리아의 동작을 따라, 그가 입고 있던 푸른색 드레스가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두 쌍의 시선이 동시에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들고 있는 포크로 열심히 타르트를 바스러뜨리고 있던 코델리아가 갑작스러운 시선에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휴, 난 됐어. 칼리아 언니 같은 가시밭길을 걸어갈 각오는 없는 것 같아. 솔직히 지금은 그저 글 쓰는 게 좋고, 언니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 뭐, 여차하면 언니들이 내 뒷배가 되어줄 텐데 뭐가 걱정이겠어?”
복잡한 건 딱 질색이라는 듯 코델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포크를 탁 내려놓으며 선언했다.
“내 몫 신경 쓰지 말고, 영지 같은 거 마음껏 가져가. 프레드릭, 그 인간이 뭐라 할진 모르겠지만.”
툴툴거리는 막내의 모습에 칼리아와 제라니아는 그저 웃고 말았다. 코델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제라니아를 가득 담았다.
“그런데 있잖아, 언니. 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뭘?”
“왜 결혼한 거야?”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서늘한 바람이 세 사람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나뭇잎끼리 서로 부딪쳐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간 기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제라니아가 직접적으로 결혼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왕세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도 자세한 이야기는 삼가려 했다.
그래서 두 사람 역시 더는 묻지 않았다. 얄팍한 호기심을 충족하려 말하기 싫어하는 사실을 구태여 꺼내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진지한 눈빛이 제 언니에게 묻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왜 결혼을 한 거냐고.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거냐고.
걱정이 담긴 어조가 제라니아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는 직감했다.
이야기를 할 때가 왔다는 걸.
제라니아는 조용히 두 사람에게 계약과 더불어 프란츠와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물론 아주 내밀한 이야기만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건 프란츠와 자신, 둘 사이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다.
차를 마시며 묵묵히 듣기만 하는 칼리아와 달리 코델리아는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침묵이 길어지기 전, 가벼운 목소리가 그 허리를 동강 냈다.
“코디.”
제라니아가 부드럽게 애칭을 불렀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코델리아에게 말했다.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
“…….”
“늘 말하잖아. 내가 결혼을 비판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너까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나는 나고 너는 너니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해진다면 나랑 언니는 무척 기쁠 거야. 그렇지, 언니?”
칼리아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코델리아도 이제 스물여섯 살이다. 나이 차가 제법 있어, 그들이 언제나 옆에 끼고 걱정하던 시절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지금도 코델리아를 설득하고자 한 게 아니라, 언제까지고 예민한 이야기를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물론 결혼하기 전에도 충분히 즐거웠어.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것 역시 행복해. 어느 쪽도 내 인생인걸. 사실 낭만적인 사랑을 동경한 적은 없지만….”
제라니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곧 내뱉었다.
“그런 삶을 동경하는 것에 가치가 없다 생각하지도 않아.”
무언가를 추구하고자 있는 힘껏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은 아름답다.
성격이 성급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코델리아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인생에 충실했다. 글을 쓰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행복한 사랑을 꿈꾸고.
자신과 다르다고, 그 모든 노력을 매도해야 하는 걸까.
“언니도, 나도. 그리고 너도. 우리는 그냥, 각자 삶의 방식이 있는 거지. 다를 뿐이지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해.”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느른한 침묵이 흘러갔다. 코델리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언니는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거야?”
원하지 않은 삶에 자신을 끼워 넣은 셈이 아닌가. 아무리 본인의 선택이라지만, 정말 후회하지 않는 걸까.
제라니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나지막이 답했다.
“프란츠를 사랑하기 전에도 후회하지는 않았어. 그럴 필요가 없거든. 나는 꿈이 있었고,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니까. 나는 그에 값을 지불한 것뿐이야.”
봄바람처럼 나긋나긋한 음성과 달리 그 내용은 더없이 냉정했다.
“물론 여기서 만족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불공평한 일도 세상에 널렸다. 자신은 운이 좋았을 뿐이고, 대부분의 남자는 자신의 아내를 소유물로 취급한다. 그게 당연한 시대였다.
그게 당연하지 않은 시대로 도약하기 위해, 제라니아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나를 ‘제라니아 바이첸’이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한, 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어.”
칼리아는 그런 현실에 저항하고자 하고, 자신은 미래로 나아갈 발판을 만들고자 타협을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코델리아, 너는 과연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
“알았어!”
코델리아의 고개가 칼리아를 향해 돌아갔다. 갑자기 제 손을 덥석 잡아오는 코델리아에 칼리아는 뭐 하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언니, 절대 포기하지 마. 나랑 제라니아 언니가 옆에 있잖아.”
언젠가 이 모든 게 변할 날이 오리라. 아니,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수면 위로 올라오기까지는 한참 남았겠지만.
“누가 치근덕거리면 바로 얘기해. 무릎을 포크로 찍어줄 테니까.”
이미 포크로 난도질을 한 바스러진 타르트의 잔해와 진지한 표정을 한 동생을 번갈아 보던 두 사람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