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43화 (144/171)

제143화. 기회 (3)

“이거, 무슨 냄새지?”

어두운 하수도를 더듬거리며 걷던 티레인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를 따르던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등불을 들고 앞장서 걸어가던 줄리아가 코를 킁킁거렸다.

“…비린내 같은데요?”

물비린내와 악취 사이로 풍기는 희미한 쇠의 향기. 그게 무엇인지 짐작하자마자 티레인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달리다시피 경보하는 남자를 따라 일행 역시 걸음을 재촉했다.

모퉁이를 돌자 냄새가 확 강해졌다. 티레인은 재빨리 손등으로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일행을 멈춰 세운 그가 줄리아의 손에서 등불을 넘겨받아 앞으로 다가갔다. 불빛이 옆으로 둥글게 퍼지며 참혹한 광경이 드러났다.

피가 낭자한 바닥과 난도질되어 있는 시신들, 상처의 깊이를 봐서는 절명했을 듯했다.

축축한 악취와 뒤섞인 혈향이 이 처참한 상황을 한층 더 극적으로 보이게 했다.

일행 중 가장 심약한 페터가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티레인이 시체들에 다가가는 걸 본 마르셀이 다급하게 외쳤다.

“대장님, 위험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헐렁하게 손짓한 그가 쭈그리고 앉아 진지하게 시신들을 살폈다. 그나마 상처가 적은 여성의 눈을 조용히 감겨주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침반은.”

“어…. 여기서 뱅글뱅글 돌고 있습니다.”

완전히 붉게 변한 나침반의 바늘을 확인한 율리우스가 착실히 대답했다. 멀찍이 서 있는 이들에게 티레인이 호통을 쳤다.

“뭐 해! 어서 사람들을 살펴!”

“네, 네!”

그들은 죽은 시신들 사이에 쓰러져 있는 나침반의 목표를 찾아냈다. 상당히 난도질이 된 채 너덜너덜한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의 시퍼렇게 떠 있는 안색과 검어진 입술을 살핀 티레인이 단언했다.

“독에 먼저 당했군.”

덫을 놓았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던 티레인은 이마를 짚었다.

‘앗, 거기 서!’

해가 밝아올 무렵, 작은 여관에서는 소동이 일었다.

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이들이 길게 뻗은 그림자에 발이 묶여 옴짝달싹을 못 하는 사이, 남자는 허둥지둥 밖으로 도망을 감행했다. 병사들이 차고 있던 단검을 하나 집어 들고 제 몸을 묶은 밧줄을 잘라낸 뒤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맨홀 뚜껑이 제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그 모든 상황을 보고받은 순간, 티레인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도망쳤나.’

유괴범의 수법을 분석했을 때, 티레인은 범인이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 번에 사라지는 사람은 한둘 정도이고, 꼭 한밤중에 인적이 없는 거리를 지나가다 모습을 감춘다.

사람도 장소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했다. 혼자 벌이는 일이라기엔 제법 규모가 있었고, 대규모 단체라기엔 미적지근한.

율리우스는 그림자를 다루는 마법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한밤중을 활동 시간대로 잡은 이유는 역시 그래서겠지.

아무튼, 범인에 대한 아무런 단서 없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인간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건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티레인은 범인을 잡기 위해 덫을 파기로 했다. 바로, 사람을 납치해 가는 그림자가 나타날 만한 공간을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것이었다.

티레인은 악우이자 동료인 책사에게 요청을 보냈고, 이렌스는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여 그간 미뤄두었던 사안 중 하나인 낙후된 상수도 시설 보수를 꺼내 들었다.

수도 외곽의 어느 구역에 한 달 정도 걸리는 공사가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큰길을 제외한 주변 샛길이 전부 통제되었다. 근처를 돌아다니던 야경꾼들에게 돈을 주어 특정 시간에는 이쪽으로 오지 않도록 안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소마다 맨홀이 있었던 것을 보아, 하수도를 통해 이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길을 통제하는 게 시민들에게도 훨씬 안전했다.

남은 건 미끼 정도였는데, 일행 중 유일한 여성 기사인 줄리아가 미끼를 자처했다. 팔다리에 보기 좋게 근육이 붙어 있는 몸은 일반인 여성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으나, 망토로 가리면 그럭저럭 감출 만했다.

‘원래 만만해 보일수록 더 방심하고 기어 나오는 법이에요.’

진중한 기사의 표정을 거두고 가녀린 귀족 여성의 얼굴을 한 줄리아가 싱긋 웃었다. 팔씨름으로 줄리아에게 처참히 패배한 적이 있었던 티레인은 격려하듯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마법에 닿으면 반응하는 브로치를 매달고 줄리아는 며칠 내리 한밤중에 같은 길을 걸어 다녔다. 2주가 넘게 같은 짓을 반복하려니 좀이 쑤셨지만, 보상은 적절한 시기에 그들을 찾아왔다.

‘안녕하신가, 악독한 유괴범 씨?’

붙잡은 남자를 적당히 구슬려 보았으나 그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참 실랑이하던 이들은, 일단 밤이 늦었으니 그를 데리고 머물고 있던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남자는 도주했다.

그새를 못 참고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나. 보고를 받은 티레인이 느긋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슬슬 움직이지. 추적 마법은?’

나침반을 확인한 율리우스가 그것을 티레인에게 내밀었다.

‘제대로 작동 중입니다.’

여관으로 가기 전, 남자를 잠시 기절시킨 다음 그 몸에 추적 마법을 심었다. 워낙 미량의 마력을 소요하는지라 마법에 걸린 이조차도 감지가 쉽지 않은 게 특징이었다.

심문해서 입을 열 상대가 아니라면 어쩌겠나. 스스로 안내하도록 만들 수밖에.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졌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정황을 봤을 때 이번 범인은 땅으로 꺼진 것 같았다.

‘좋아, 가자!’

그렇게 나침반을 따라 하수도를 거슬러 올라왔을 뿐인데, 난데없이 시신 더미를 만나게 될 줄이야.

시체들을 조심스레 살피던 중, 누군가의 몸이 움찔거렸다. 마르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한 사람 살아 있습니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갈색 머리칼의 남자를 병사들이 급히 뒤집었다. 채 서른이 되지 않은 젊은 청년이 쿨럭, 숨을 토해냈다. 상체에 칼로 베어낸 듯한 자상이 깊었지만, 이 정도면 치유 마법으로 그럭저럭 지혈하고 붕대를 감으면 될 듯했다.

글렌이 다가와 청년의 몸에 손을 가까이 했다. 따뜻한 빛이 손바닥에서 번져 나오며 상처가 조금씩이나마 아물기 시작했다. 붉은 속살이 드러난 상처에 약을 바르자 그가 작게 신음했다.

“어이, 너. 이름이 뭐지.”

티레인의 질문에 청년이 기운 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레… 테….”

“왜 여기 쓰러져 있나? 다른 죽은 사람들은?”

“…신전.”

그 한 마디에 티레인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그는 병사들을 시켜 죽은 이들의 옷을 뒤졌다. 그중 한 명에게서 신관들이 소지하고 다니는 둥그런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왜 다 죽었나?”

“습격…을, 당해서.”

숨을 쉬기가 곤란한지 청년은 연달아 기침을 했다. 더는 말하기 버거운 듯했다. 간신히 손을 뻗어 티레인의 옷자락을 붙든 레테가 티레인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녹색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부탁, 입니다. 저희, 를 신전으로….”

가느다랗게 변한 티레인의 남색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핥듯이 응시했다. 생각에 잠긴 건지 말이 없어진 티레인에게 글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는 위생상 치료하기에 좋지 않습니다. 일단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티레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머지 시신들도 데려가자.”

“전부 말입니까?”

“이런 곳에서 썩게 놔둘 수는 없지 않나.”

몸에 상처가 심하긴 했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는 있어 다행이었다. 경악한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시신들이 하나둘씩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오, 이거 멋진걸.”

“말 걸지 마세요, 집중 안 되니까!”

상관에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일라이자의 무례를 티레인은 너그러이 넘어가 주었다. 기운찬 건 좋은 거니까.

하수도 밖으로 나오자 환한 햇살이 그들을 반겼다. 악취에 절어 있던 옷의 천들이 숨이 트인 듯 너울거렸다. 이제 살 것 같다며 쭉 기지개를 켜는 티레인에게 율리우스가 조용히 질문했다.

“어디로 갈까요?”

제대로 면도하지 못해 삐죽 수염이 솟은 턱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티레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대신전으로.”

* * *

따사로운 날이었다.

늦가을을 맞아 푸른 하늘과 선선한 바람, 알록달록한 잎사귀에 닿은 햇빛이 잘게 부스러졌다.

오랜만에 들른 공작저는 정말로 여전했다. 특히나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정원의 모습은 절로 계절을 실감하게 했다. 아래를 향해 드리워진 가지에 붙어 있던 낙엽이 새하얀 테이블보 위로 팔랑이며 내려앉았다.

우아한 손이 그 낙엽을 집어 들어 줄기를 빙그르르 돌렸다.

“무슨 생각 해?”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댄 채, 손등에 제 얼굴을 척 올리고 있는 코델리아에게 제라니아는 웃으며 답했다.

“책갈피로 쓰면 좋겠다 싶어서.”

“언니는 은근히 귀찮은 일을 좋아하더라.”

“왜, 제법 낭만적이잖니.”

“낭만은 소설 속에서나 찾는 거지.”

현직 소설 작가의 입에서 나온 현실적인 발언에 제라니아와 칼리아는 웃고 말았다.

연애를 몇 번 해보더니 환상이 와장창 깨진 건지, 날이 갈수록 냉소적인 면모를 보이는 동생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칼리아가 입을 열었다.

“너 그래서 글은 쓰겠어?”

“으악! 말도 마. 요즘 글이 안 풀려서 죽을 맛이야. 요즘 내 심장이 돌이라 그런지 도통 설레지를 않는다고.”

손을 절레절레 내젓던 코델리아가 호두 파이를 크게 베어 물었다.

“언니, 표정이 좋아졌네.”

“응?”

“국왕 폐하랑 잘 지내는구나?”

대답도 전에 멋대로 넘겨짚은 코델리아가 능글맞게 웃었다.

“하긴 연회에서 대놓고 입도 맞추는 사이인데.”

“……그건 좀 잊어줘.”

“에이, 그런 게 낭만이잖아.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더니, 언니를 보니까 실감이 확 나더라. 프레드릭 표정 봤어? 나 진짜 그 얄미운 인간이 그렇게 놀라는 거 처음 봤다니까!”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웃기다며 깔깔 웃기 시작하는 코델리아에게 제라니아가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너 설마, 소설에 그거 가져다 썼니?”

“나만 썼겠어?”

천진한 질문에 제라니아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내가 죄인이지. 뭔가를 알아챈 듯 히죽대는 코델리아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제라니아는 칼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우릴 부른 이유가 뭐야. 언니?”

칼리아가 시간을 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을 때, 제라니아와 코델리아는 망설임 없이 시간을 비웠다. 언제나 그랬듯이.

“얘들아.”

말없이 차로 목을 축이고만 있던 칼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중대 발표를 하려는지 흠흠 목을 가다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호기심 어린 두 쌍의 시선 앞에서, 칼리아는 입을 열었다.

“내가 백작위를 잇는 거,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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