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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42화 (143/171)

제142화. 기회 (2)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침대의 머리판에 등을 기댄 프란츠가 제 앞에 앉아 있는 제라니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간만에 일찍 업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잠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적당히 이야기나 나누려고 했는데 제라니아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오늘 바깥에 나갔다 오겠다고 하더니, 뭔가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풀어져 있는 갈색의 긴 머리카락이 제라니아의 목을 따라 흐느적거렸다. 곧게 뻗은 새하얀 목덜미에 걸려 있는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걷어냈다.

“프란츠.”

불쑥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프란츠의 움직임이 멈췄다. 제라니아가 슬쩍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자, 두툼한 팔이 제라니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거 진짜 뜬금없는 질문이라는 거 아는데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봐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는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전에, 나한테 왕이 되라고 했던 거 기억해요?”

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억합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요?”

“갑자기 그걸 묻는 이유가 있습니까?”

제라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여자인데도 그런 말을 하는 게 신기했었거든요.”

“감당할 능력이 있다면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계승권은 어쩌고요.”

“일단 후계자를 만든 뒤, 권력 기반을 제대로 쌓아두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바이첸 공작가는 당신을 지지할 테니.”

“프레드릭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오세요?”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을 등질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첸 공작가의 네 남매는 정말 사이가 좋았다. 이복 남매들과 사이가 좋을려야 좋을 수가 없었던 프란츠의 눈에는 그게 퍽 신기했다. 이권 다툼이 치열한 귀족 사회에서 그들 같은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오늘 어쩌다 보니 아이라랑 같이 나가게 됐거든요.”

“아이라가 뭐라 한 모양이군요.”

날카롭게 핵심을 짚는 남편에게 제라니아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왕이 되겠대요.”

가벼운 음성과 달리 무거운 내용을 품은 말이 톡 굴러떨어졌다.

“어떻게…. 생각해요?”

평소와 달리 머뭇거리다, 살짝 늘어지는 목소리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네?”

“그 아이에게 왕의 자질이 있어 보입니까.”

대답이 아닌 질문이 돌아온 것에 제라니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도 곧장 답했다.

“아직 세 살인걸요. 벌써 그런 가능성을 점치기는 좀….”

“그렇겠죠.”

아직 어린 만큼, 좀 더 나이가 찬 다음에도 같은 꿈을 꾸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생각이 커서도 변함이 없다면 그것대로 문제겠지만.”

“왜요?”

“가시밭길일 테니까요.”

딱 잘라 말하는 프란츠의 눈빛이 새파랗게 침잠했다. 아교로 붙인 듯 달라붙어 있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왕권 다툼에서 가장 우위를 점한 게 뭔지 알지 않습니까.”

“…계승권이죠.”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승법상 왕위는 남자 자손에게 우선된다. 여성이 즉위한 선례가 없지는 않으나, 그 여성에게 남자 형제가 아예 없었거나 계승권을 가진 여성이 남편을 맞이했는데 왕이 된 남편이 일찍 죽어 왕위에 오른 경우 정도였다.

“난세라면 가장 유능한 이를 선택한다 하면 반발을 다소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난세가 아니죠.”

제라니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국외 정세를 보았을 때, 향후 10년간은 큰 문제가 터지지는 않을 것이다. 국내라고 딱히 혼란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전이라 할 만한 소요는 없었으니까.

“제니스가 없다면 이야기는 조금 더 간단해졌을지도 모릅니다만….”

금빛 고수머리에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 어린 시절의 국왕과 꼭 닮은 얼굴. 멍하지만 순하고, 동생을 챙기는 제법 의젓한 모습이 눈에 띄는 아이였다.

“제니스는 얌전한 아이입니다. 저 성격에 패악질을 부리고 다니지는 않겠지요. 누구라도 그 애를 정당한 내 다음 후계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자기보다 높은 계승권을 가진 이가 사라지면 해결될 일이나 그 가능성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라니아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도 아닐 테니.

“국왕 폐하.”

익숙한 경칭이 들리고, 제라니아가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그의 손등 위로 여인이 제 손을 겹쳤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그냥, 기회를 주세요.”

다들 자주 이야기한다. 아이라가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제라니아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고, 아이라의 미래 역시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분명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고집도 세고, 한 번 의문이 생긴 건 끈질기게 파고드는 면모도 있으니까. 자신보다 가진 것이 많으니 그 꿈 역시 훨씬 장대해지겠지.

“도전할 수 있게요. 가시밭길이라도 괜찮아요. 아이라가 포기할 수 있는 권리를 주세요.”

선택권조차 없는 인생은 얼마나 가혹한가. 제라니아는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좌절할 수조차 없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제라니아는 쓰게 웃었다. 둘 다 사랑하는 아이들이었다.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 커서 다투게 될지도 모른다니,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자신이라고 언제나 가족과 사이가 좋았던가. 프레드릭과의 사이를 생각하면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친애하는 가족이며 곤란하기 짝이 없는 정적. 앞으로도 분명 계속 부딪치겠지.

“…그 애는 당신을 많이 닮았지요.”

붙잡힌 손을 뒤집은 프란츠가 제라니아와 손가락을 얽고 단단히 깍지를 꼈다. 노을처럼 붉고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가진, 활발한 여자아이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냥 포기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겁 없이 제 어깨 위로 올라서던 것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 또한 재미있지 않겠는가.

제 아내와 마찬가지로 생기롭게 빛나는 예쁜 눈동자. 그 눈에 어떤 미래가 담길지 지켜보는 건,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짧지만 확실한 대답이었다. 먼 훗날에 다가올 미래를 약속하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 *

붙잡을 만하면 도망가고, 놓칠까 싶으면 앞에 보이고.

도망가는 상대는 무척 잽쌌고, 하수구의 모든 구조를 훤히 아는 것처럼 기민하게 움직였다. 철벅철벅, 물기 있는 바닥을 달려가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체력이 다 떨어지기 전에 승부를 보기 위해, 그레이스는 마법을 사용했다. 하수구의 검은 물이 일렁이며 앞장서 뛰어가는 목표를 덮쳐들었다. 가볍게 그것을 피하자마자, 도망가던 이는 이상함을 느꼈다.

“으악!”

앞으로 뛰어가려던 그는 보이지 않는 결계에 부딪혀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 순간 웨슬리와 빈센트가 달려들어 넘어진 그를 붙들었다.

“잡았다, 이 자식!”

하하, 승리의 미소를 흘리며 웨슬리는 그의 몸을 밧줄로 꽁꽁 묶었다.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지고 투박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빈센트는 옆에서 그의 옷을 들춰 보았다. 낙인이 그려져 있는 등을 보니 드디어 제대로 된 단서를 찾은 것 같았다.

남자의 발치에서 그들을 향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검은 그림자를 보자마자, 빈센트는 그의 명치에 주먹을 휘둘렀다. 컥, 숨을 뱉어내는 남자의 그림자가 확 수그러들었다.

“마법사야?”

다른 일행들 역시 그들 곁으로 합류했다. 폴라의 질문에 빈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어이, 너. 무슨 일로 하수구를 돌아다니고 있었나?”

일리야의 질문에도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레이스는 나직이 말했다.

“한패가 있나요?”

순순히 말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턱 끝에 나이프를 가져간 빈센트가 피부를 가볍게 그었다. 붉은 핏물이 송송 배어 나왔다.

“묻겠다.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피하는 남자의 목에 칼이 닿았다. 말하지 않으면 베어버릴 기세로 움직이는 빈센트를 폴라가 붙잡았다.

“야, 너. 빈센트! 성격 죽이라고 했지.”

“쓰레기들에게 건넬 자비는 없습니다.”

“낙인이 있잖아. 말에 제한이 걸려 있을 가능성이 있어.”

웨슬리가 레테와 함께 남자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쉽게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그들은 회의에 들어갔다.

“설득할 순 없을까요?”

“설득? 협박이겠죠.”

“적당히 몸을 지져주면 괜찮지 않을까?”

“그건 고문이잖아요! 신의 종이 할 짓이 아닙니다.”

작게 소곤거리는 이들의 뒤에 따분하다는 얼굴로 서 있던 웨슬리가 장난스레 말했다.

“에이르 님의 능력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정보를 읽어내면 만사 해결! 아니야.”

“불경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분의 능력은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쓰이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레이스가 정색하고 말을 받아쳤다. 굳어지려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말을 못 해도 움직일 수는 있을 테죠. 일단 안내를 시키는 게 낫겠어요. 그도 아니면….”

“우욱, 우웩!”

구역질을 하는 소리에 모두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앞으로 쓰러졌다. 웨슬리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일으켰다.

“어이, 왜 그래?”

거품을 물고 있는 남자의 입술은 검붉은 색이었고, 안색은 시퍼렇게 떠 있었다. 호흡은 이미 멎어 있었다.

동요하는 일행들 중 레테가 침착하게 남자의 입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입 안을 뒤적거려 보던 그가 손을 빼내자, 손끝에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독이에요.”

“…어서 손 이리 내요.”

그레이스가 재빨리 다가가 레테의 손가락을 살폈다. 검어진 손끝을 재빨리 깨끗한 천으로 닦아내는 여인의 얼굴이 진지했다.

“설마, 입 안에 독을 물고 있었나?”

일행은 이미 죽어버린 남자를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일리야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이군요. 단서가….”

“아직 끝난 건 아니지.”

빈센트가 폴라를 돌아보았다. 폴라는 손을 뻗어 남자의 몸에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뽑아냈다. 머리카락에 담긴 마력의 기운을 확인한 폴라가 앞을 바라보았다.

“좋아, 흔적이 남아 있어!”

환기가 잘되지 않는 인적 드문 구역이라 그런지, 희미하게나마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왔을 마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력의 자취가 흩어지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레테가 남자의 시체를 둘러매는 것과 동시에, 기민하게 마력을 느끼고 뛰어가는 폴라의 뒤를 모두가 쫓았다. 일리야가 만들어낸 밝은 빛들이 그들의 주변을 환히 비춰주었다.

하수도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점 미묘해지는 일리야의 표정을 본 그레이스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일리야.”

“아니, 우리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도 일리야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덧, 달려가던 그들의 앞에 두 갈래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마력이 무척 옅어진 만큼,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구분하는 게 쉽지 않았다. 지상이랑 가까워진 탓인지 악취가 한결 덜했다. 폴라는 칫, 혀를 찼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양쪽으로 흩어져서 살펴보는 게….”

푹.

그 순간, 이변이 찾아왔다.

살덩이가 찔리는 소리에 모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가슴에 단도가 박힌 그레이스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비명과 함께 빛이 훅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죽음은 비명 소리를 먹어치우며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들을 제 구역으로 이끌어갔다.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크게 베는 소리와 함께, 이윽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생명의 기운이 꺼져가던 찰나,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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