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기회 (1)
“뭐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자문자답하는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등불이 그의 걸음걸이를 따라 흔들거렸다. 어두운 통로를 앞서가던 청년의 옆으로 졸졸 흘러가는 검은 물결 위로 등불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카암의 지하에는 거대한 하수도가 자리했는데, 왕국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수도 곳곳으로 뻗어 있는 하수도는 도시의 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축축한 공기에 섞여 은은하게 코끝을 찌르는 악취를 견디려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청결하게 관리되는 신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만큼, 일행 대다수는 불결한 환경에 면역이 없었다.
“빈센트, 폴라. 아직도 소식이 없어?”
앞장서 걸어가던 신관, 웨슬리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바로 뒤를 따라오던 망토 차림의 두 사람이 제각기 반응했다.
“닥쳐, 웨슬리. 집중이 안 된다고.”
걸걸하게 욕설을 퍼붓는 폴라와 달리 빈센트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했다. 웨슬리가 작게 투덜거렸다.
“아니, 이 빌어먹을 공간을 벌써 며칠째 탐색하고 있는데! 단서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게 말이 되냐고.”
“범위가 범위니 어쩔 수 없지요. 겨우 이 인원으로 도시 전체를 뒤져야 하는데, 쉬울 거라 생각했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신전에서 파견된 이들은 대여섯 명씩 몇 개의 조로 나뉘어 도시를 탐색했다. 보통 아침나절에는 하수도를 헤매고, 저녁부터는 야경꾼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조용한 거리를 돌아다녔다.
결계사이며 마력을 탐지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신관인 폴라와 어떤 이의 능력이든 증폭시키는 게 가능한 빈센트는 이 조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마법은 절대적이지 않아. 그림자에 몸을 숨길 수는 있어도 이동 거리나, 그림자 안에 수용할 수 있는 부피에는 한계가 있어.”
범인은 정말 신출귀몰했고, 나타나는 장소들은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장소가 이 도시에 얼마나 많던가. 당장 외곽으로 갈수록 혈관처럼 퍼져 있는 골목길이 즐비했다.
“그러니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하는 방법이 따로 있어야 맞겠죠.”
사람들이 사라진 장소라 추정된 곳들을 이 잡듯이 뒤졌을 때, 크고 작은 골목에서 그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확인했다.
바로, 하수도로 통하는 맨홀이 꼭 하나씩은 있었다는 것.
“범인은 분명 하수도를 통해 움직이고 있을 거라니까. 그 수가 한둘이냐, 여럿이냐가 문제지.”
제보를 받은 대로라면 실종자는 대체로 밤에 사라졌다. 야경꾼들이 들고 있는 등불의 빛이 닿지 않는 장소에서.
“아니, 그건 알겠는데. 이 넓은 수도의 하수도를 어느 세월에 전부 뒤져보냐고! 이러다 몸에 오물 냄새가 배어서 사라지질 않겠어.”
“그래서 마력의 흔적을 더듬고 있잖아. 다른 녀석들도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거고.”
웨슬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하수구 안에 울려 퍼졌다. 심드렁히 대답하는 폴라의 뒤에서 걷던 그레이스와 일리야가 하나씩 말을 얹었다.
“웨슬리, 당신 목소리에 범인이 도망가겠어요.”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조금만 더 기운 냅시다.”
신전 밖인지라 모두는 호칭을 생략하고 이름으로만 상대를 불렀다.
“이렇게 찾아봐도 성과가 없다는 건…. 혹시, 우리가 헛다리를 짚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맨 뒤에서 조용히 그들을 따라가던 레테가 입을 열었다. 순박한 얼굴을 한 청년이 걱정스레 덧붙였다.
“그, 너무 한 가지에만 꽂혀서 단서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다른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게.”
“하긴 며칠이나 이러고 있는데….”
파견을 나온 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어갔다. 그러나 아직도 이렇다 할 성과를 보고하지 못하는 것에 그들 모두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야, 내 감이 말하고 있는데, 조금만 더 가면 단서가 나올 거라고.”
“그 말 벌써 다섯 번은 넘게 한 거 알지? 폴라.”
“그럼 너희는 딱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긴 하냐? 이피나스께서 시키신 일이야. 단서가 없으면 일단 무식하게 달려들기라도 해야 변명할 말이 생기지. 그분이 퍽도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시겠네.”
가볍게 빈정거리며 폴라는 손을 머리 부근에 대고 휘휘 흔들었다. 사람 좋게 웃으면서 제법 신랄한 구석이 있는 신전의 수호자를 떠올리고 모두는 침음을 흘렸다.
“그건 그렇지만…. 레테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다른 방식을 고민할 필요는 있다고 봐요. 지금 이 순간에도 희생자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는걸요.”
꼭 모아 잡은 그레이스의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물에 특화된 마법사인 만큼 여인은 잔잔하고 고요한 품성을 지녔으며, 약자에게 상냥했다. 일행 중 가장 높은 전투력을 지니기도 했다.
빛의 속성을 지닌 일리야는 어둠, 즉 그림자와는 상극이었고, 웨슬리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투시안을 지녔으며 레테는 바람을 다루는 만큼 청각이 예민했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쉽게 잡힐 놈이었으면 이제야 꼬리를 내보이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능력을 증폭시키기 위해 폴라의 어깨를 한 손으로 꼭 붙들고 있던 빈센트가 조용히 말했다. 웨슬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폴라, 일단 네 말을 믿겠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그 순간, 앞을 바라보고 있던 웨슬리의 동공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걸음을 멈추는 남자를 따라 일행의 걸음걸이 역시 멈췄다. 그가 아주 낮게 속삭였다.
“잠깐만.”
저 앞에 누가 있어.
웨슬리의 손에 들려 있던 등불이 순식간에 꺼지고, 새까만 암흑이 찾아왔다. 소리 죽여 앞으로 뛰어가는 남자를 따라 모두 좁디좁은 터널을 가로질렀다.
웨슬리의 시야에 꽂혔던 누군가가 헐레벌떡 앞으로 날아가듯 달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인간의 속도가 아닌 것을 보아 신체 강화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빛!”
웨슬리가 고함을 치자 일리야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의 주변으로부터 터널이 낮처럼 환해지기 시작했다. 밀려가는 물결처럼 저 앞까지 빠르게 뻗어나간 빛이 막 골목을 돌아서는 인영을 포착했다.
술래잡기의 시작이었다.
* * *
“정말 더 따라올 거니?”
제라니아는 걱정스럽게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이라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조용히 외부 시찰을 나가려고 했더니만, 눈앞의 꼬마 숙녀에게 딱 걸렸다.
‘어머니, 어디 가? 나도 갈래!’
데려가지 않으면 소동을 피울 기세라, 제라니아는 어쩔 수 없이 떼쟁이 왕녀님의 고집을 받아들였다. 아이라가 낮잠 잘 시간에 나왔어야 하는데.
“갈 거야!”
호기심 많은 눈망울이 제라니아를 가득 담았다. 마차에서 나온 제라니아가 아이라를 안아 들어 땅에 내려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꼭 붙잡고 신신당부했다.
“놓으면 안 돼. 지금부터 갈 곳은 사람이 아주 많아서, 어머니가 아이라를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아이라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앙카를 포함해, 평상복을 입은 기사들 몇몇이 제라니아와 아이라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걷자, 곧 왁자지껄한 소리가 고막을 한가득 채웠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시장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일으키는 흙먼지가 사방에 날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만 잡고 다니다간 정말로 아이를 잃어버릴 수 있어, 제라니아는 기사들 중 한 명에게 아이라를 안아 들게 했다. 꺄르르 웃으며 기사의 목을 끌어안는 아이의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누군가는 호객을 하고, 누군가는 좌판 앞에서 흥정을 하고, 광장 쪽에는 이야기꾼들이 모여 무언가를 열심히 떠들기도 했으며 소나 말의 울음소리가 소란에 박차를 가했다.
빈말로도 위생적인 환경은 아니었고, 제법 정신없는 풍경인데도 아이라는 그저 신기한지 눈을 말똥거리며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제라니아는 적당히 물건을 사며 이것저것을 물었고, 상인들은 통이 큰 손님에게 아낌없이 이야기를 뿌렸다. 길드에 들러 흘러가는 소문들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는데, 대부분이 나랏일과는 상관없을 만한 자잘하고 사소한 것들이었다.
시장을 한 바퀴 도니 어느새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아이라를 그만큼 안아 들고도 힘든 기색 하나 없는 기사의 체력에 제라니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시장의 군데군데 빈민들이 보였다. 닳아빠진 옷을 입고 퀭한 눈을 한 채 구걸을 하는 이들을 보니, 제라니아는 조만간 이 일대에 다시 사람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난은 밑 빠진 독과도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영원히 근절할 수는 없다는 점이.
장원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평민들의 삶 역시 크게 격동했다. 영주의 횡포에서 벗어나고자, 혹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무작정 도시로 상경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도시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 과정에서 도시에 제대로 정착하는 이는 손에 꼽았다. 대부분은 몇 달 지나지 않아 빈민으로 전락했다. 그들을 구제해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려 해도 쉽지 않았다.
도시의 생태는 길드를 중심으로 한다. 하지만, 길드는 철저히 인맥 위주로 굴러갔으며 자리도 한정되어 있었고, 윗선들에 의해 휘둘렸다.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그런 의미에서 유용했다.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으니까.
단순히 돈을 지원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크레이츠는 분명 이전보다 훨씬 부유해졌지만, 부강한 나라에도 그늘은 있다. 정책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 역시 한계가 있었다.
좋은 나라란 무엇일까. 말로 떠들 때보다 직접 참여하고 있는 지금이 더 막막했다.
“어머니, 무슨 생각 해?”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생각하고 있었어.”
제라니아는 재빨리 심란함을 지우고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아이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시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아이라는 폴짝 뛰어 바닥으로 내려왔다. 총총 제 옆으로 다가와 손을 내미는 아이의 얼굴이 해맑았다.
마차에 오르고 문이 닫히자, 아이라는 불쑥 말했다.
“왜 먹으면 안 돼?”
“응?”
“아까 그거.”
시장에서 팔던 음식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구운 고기에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라에게 제라니아는 부드럽게 안 된다고 대답했다.
왕족이 먹는 음식은 철저히 기미된 것만이 용인된다. 게다가 시장에 나오는 음식들은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다. 자신은 몰라도, 아직 어린아이인 아이라에게 먹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걔네는 잘만 먹었는걸. 왜 걔네는 되고, 나는 안 돼?”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이 음식을 먹는 걸 본 모양이었다. 천진난만한 질문에 제라니아는 말문이 막혔다.
“몸에 좋지 않단다.”
“그럼 안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먹을 게 그것밖에 없는 거지.”
곰곰이 생각하던 아이라가 대답했다.
“내가 먹는 걸 나누어 주면 안 되는 거야?”
웃고 넘기기엔 아이의 표정이 무척 진지했다. 제라니아는 고민했다. 동심을 지켜줘야 하나,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하나.
“글쎄, 어렵지 않을까?”
“왜?”
“왜냐하면, 세상에 그런 아이는 너무 많거든. 아이라의 몫을 나눠 주는 걸로 해결되기 어려울 만큼.”
세 살 어린아이가 알아듣기엔 상당히 심오한 이야기였다. 이쯤이면 되었겠지, 생각했지만 아이라는 막강했다.
“그럼, 내가 더 많이 가지면 돼?”
“응?”
“모두한테 나눠 줄 수 있을 만큼, 내가 가진 게 많아지면 되는 거지?”
어째서 그런 결론이. 아이의 당찬 포부에 제라니아는 진심으로 할 말을 잃었다. 아이는 또 무엇을 떠올렸는지 불만스레 입을 삐죽였다.
“어머니, 왜 아버지는 나보고는 왕이 되라고 안 하는 거야?”
아이라의 머릿속은 이랬다. 아버지는 왕이다. 왕은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니 가진 게 아주아주 많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예전부터 가졌던 치기 어린 경쟁심까지 뾰족 솟아올랐다. 아버지는 너무하다. 젠한테는 그러면서 왜 나한테는 안 그래?
“좋아, 결정했어!”
주먹을 불끈 쥐고, 충격적인 선언을 내뱉는 아이의 목소리가 무척 밝았다.
“나도 왕이 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