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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40화 (141/171)

제140화. 사소하고 중요한 것들 (4)

“상관없어요.”

“…….”

“당신의 사랑이 그렇더라도 상관없다고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담백했다.

“당신의 감정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나와 당신이 다르듯이,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 건 당연하니까.”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정말 다르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것만이 다가 아니니까.

“그만큼이나, 당신이 날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잘 아니까요.”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는 게 사랑의 시작이라면, 관계를 세우는 건 신뢰였다. 몇 년의 세월을 프란츠와 함께하며 겹겹이 쌓인 믿음은 두터웠다.

“6년 전에도 얘기했잖아요. 그냥, 우리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요.”

당신의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말해주길 바랐다. 용기를 내어 제가 내민 손을 잡아주길 원했다.

“일단 들어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줄 수 있으면 듣고 안 된다면 거절할게요.”

지금 잡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기다리면 되니까.

“…혼자 끌어안지만 말았으면 좋겠어요.”

살며시 고개를 든 프란츠와 눈을 마주했다. 창문 너머에서부터 짙게 번지는 노을이 둘의 얼굴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안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너덜너덜해진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푸른 시선이 아득히 멀어졌다.

“사랑한다고요.”

재차 말하자 멍했던 눈동자가 천천히 빛을 되찾았다. 깜빡, 깜빡. 눈꺼풀이 움직이는 모양이 느릿하게 시야에 박혔다.

“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것처럼 쉬어 있었다.

“나도 몰라요. 그냥 깨달았어요.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좀 많이 늦었죠. 미안해요.”

제라니아는 자꾸만 들뜨려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했다.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이 나 말고도 소중한 것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싫어요. 사실 에반젤린 공녀랑 춤추던 거, 조금 기분이 그랬어요.”

솔직하게 털어놓자 프란츠는 눈을 크게 떴다. 머뭇거리던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건…. 공녀가 그러더군요. 장난 좀 쳐보지 않겠냐고.”

‘왕비님이 이쪽을 보고 계시네요.’ 대화를 나누던 중 에반젤린이 조용히 속닥거렸다. 그 말을 듣고 제라니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지만,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이 보였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응시하자 여자는 방금 전까지는 분명 보고 있었다며 항변했다.

‘설마 오해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어떡하지, 저 왕비님께 미움받는 거 아니에요? 물론 일을 벌일 때 이미 각오하긴 했는데.’

‘자의식 과잉입니다.’

도통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상한 사람 보듯 그를 쳐다보던 에반젤린이 손을 내밀었다.

‘의심 가면 한번 시험해 볼래요? 왕비님 반응이 어떨지.’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평소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제안을 수락한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차피 춤을 추고 난 뒤, 곧바로 공표하려고 했으니까요.”

“이렌스랑 공녀가 결혼하는 거요? 그러고 보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제라니아는 놀라는 동시에 황당한 낯을 했다.

“대체 왜 말을 안 하고….”

“이야기할 틈을 주기는 했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무는 제라니아를 보고 프란츠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곧 심각해졌다.

“미안합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문제가 꼬일 줄은.”

“아니, 뭐…. 괜찮아요.”

오해였다는 걸 알고 나니 놀랄 만큼 마음이 개운해졌다. 질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다.

“나도 미안해요. 근데 정말 전에도 말했듯이, 크리스한테는 고민 상담을 한 것뿐이니까요.”

“설마….”

“그, 좀 많이 심란했거든요….”

창피함에 말을 잇지 못하고 제라니아는 눈을 되록되록 굴렸다. 손부채질을 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앞으로는 그런 일 다시는 없을 겁니다.”

다행히도 프란츠는 눈치 빠르게 알아듣고 더는 묻지 않았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당신이 너무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부드러운 음성이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설령 당신이 나를 싫어하게 된다고 해도, 떠나지 않아요. 내가 당신 곁에 있고 싶으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하여간 이런 건 철저하지. 프란츠의 그런 성실한 면이 좋았다. 말로는 국가보다 자신이 더 소중하다 하지만, 그는 국정 운영에 누구보다 진지했다.

제가 하는 말이라고 무조건 동의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냉정한 당신이 좋았고, 그래서 믿을 수 있었다.

의심 위에는 사랑이 꽃피지 못하는 것처럼, 믿음 없이는 누군가를 마음 편히 사랑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고, 나를 이렇게 바꾼 건 바로 당신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당신이 변했으면 좋겠어요.”

둘 사이에서, 요구하는 건 언제나 제 몫이었다. 프란츠는 지나치게 욕심이 없었다. 제라니아는 그게 단순히 선천적인 이유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리베라 후작이 들려주었던 어린 시절의 프란츠를 알았다. 어릴 적, 죽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아이를 생각하면 상상조차 가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느려도 괜찮아요. 천천히 와도 돼요. 나는 언제까지고, 당신을 기다릴 수 있어요.”

그의 말대로 결함이 있어도 괜찮고, 남들보다 둔해도 상관없었다. 사람의 가치는 그런 걸로 정해지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미움받는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은가.

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

“그게,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랑이에요. 나는 그렇게 당신을 사랑해요.”

여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프란츠는 멍하게 생각했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의 당신은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하고.

그 표정은 이후로도 프란츠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오래 걸릴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평생, 불가능할지도 모르고.”

황혼이 그의 눈가를 문질렀다. 목이 타는 감각에도 시야는 온전했다. 웃으려고 했지만 얼굴의 근육이 경직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씻기듯 사라진 두통이 가슴으로 옮아간 걸까. 명치가 눌린 듯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면 뭐 어때요. 같이 나이 드는 거지.”

짐짓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제라니아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괜찮아요. 나이 들어도 당신은 귀여울 테니까요. 오늘처럼요.”

누가 할 소릴 누가 하는 건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제라니아를 와락 끌어안은 그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흘렸다.

축축한 웃음소리가 스며 나왔다.

* * *

“어서 오십시오, 국왕 폐하.”

평소와 같이 침착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는 주군의 얼굴을 이렌스는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구분해냈다.

“무사히 정신이 돌아오셨군요.”

이렌스가 히죽 웃었다. 연회장에서 열심히 시달리던 중, 입맞춤 소동으로 인해 제게로 향하던 관심이 크게 덜어진 것에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역시 왕비님은 모실 만한 상전이었다. 휘둘리는 국왕 폐하라니, 이런 구경을 도대체 언제 또 해보겠나. 제롬과 티레인 역시 그 의견에 백 번 공감했다. 특히 티레인은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이 될 것 같다며 한탄했다.

재미있는 일에는 일심동체가 되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정말이지 한결같은 사람들이었다.

“됐고. 보고.”

“예, 켈튼 백작한테 연락받았습니다. 여지를 두긴 했는데 미끼를 문 것 같다더군요.”

능글맞게 웃던 이렌스의 얼굴이 곧 차분해졌다. 에드윈 왕자에게 붙인 청년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다.

“이렇게 쉽게 걸릴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아쉽다는 듯 그가 입맛을 다셨다. 일이 잘 풀리면 물론 좋기야 하지만, 사람은 가끔 변수를 즐기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프란츠의 손가락이 책상을 느긋하게 두드렸다.

“디나이안은 귀족의 세가 강한 나라지. 고여가는 물은 썩기 마련이고.”

디나이안 왕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는 이미 입수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폭동이 진압되는 속도가 예상보다 한참 느리다는 점이었다.

그 규모가 그렇게 작지 않은데도, 왕실이 생각보다 잠잠한 이유는 아마도 분명.

“병사를 파견할 여력이 없어서겠지.”

디나이안의 국왕은 가정적인 호인이었으나 보수적이고 독선적인 면모가 있기로도 유명했다. 자금을 실용적으로 운용하는 이도 아니었으며 측근에게 휘둘리는 면모도 다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고가 멀쩡할 리 없었다.

국가 운영에는 어쨌거나 돈이 필요하다. 그 돈을 충당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딸을 팔아 장사하는 것이리라.

크레이츠 왕국은 프란츠 대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군사력도 충분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왕녀는 그쪽에서 내놓을 수 있는 제법 귀한 매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그래서 프란츠는, 그들에게 살짝 희망을 심어주기로 했다.

“의심할 리가 없겠지. 금광은 진짜니까.”

어떻게든 돈을 긁어모아 투자를 하겠지. 물론 그게 순순히 그들의 손에 들어가느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쉬이 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기를 당길 순 있겠지.”

산적의 탈을 쓴 병사들이 제 할 일을 다할 것이다.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으리라. 그들이 입을 손해는 라이네 왕조의 몰락을 한층 더 가속화할 것이다.

프란츠는 간만에 유쾌해졌다. 그래, 역시 그냥 죽이는 건 너무 시시하다. 반란군에 목이 베여 성곽에 매달리는 게 더 치욕스럽지 않겠나.

“그런 표정 지으시니 꼭 악당 같습니다.”

“누가 할 소릴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역시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을 지적하자, 이렌스는 슬쩍 서류로 제 입가를 가렸다.

“왕비와 달리, 나는 성격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말이지.”

그다지라는 귀여운 단어로 표현될 말인가요, 라고 이실직고하기엔 책사는 눈치가 있었다.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줘야 성이 차거든.”

“예에, 어련하시겠습니까.”

결혼하고 좀 잠잠해지긴 했지만, 특유의 성질머리는 여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왕비님이 아깝다. 이렌스는 속으로 수백 번은 중얼거렸던 생각을 재차 읊조렸다.

“결혼 준비는.”

“로제타한테 전부 일임했습니다. 저도 그렇거니와 공녀님께서도 사교계에 적응하시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말입니다. 메이 부인도 불렀으니 어떻게든 되겠지요.”

한미한 집안이라는 말은 사실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관료로 일한 만큼 그에게는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 사치에 돈을 쓰는 취미가 없는 만큼 그 재산들은 거의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엄청나게 욕을 들어먹긴 했습니다. 공녀님의 나이를 생각하면 뭐, 당연한 일이죠.”

물론 이렌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결혼 자체는 거래의 일종일 뿐, 받을 것만 받아내고 적당히 잘 지내면 그만이었다.

정략결혼임을 구태여 숨기지도 않았다. 이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귀족들은 눈치껏 알아차릴 테니까.

“맞다, 왕비가 그러더군. 루이스 케라온한테서 소식이 끊겼다고.”

‘연락이 가끔 늦어진 적은 있지만, 아무래도 좀 걱정돼서요. 에스파 후작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온 화제였다. 제라니아가 왜 그 이야기를 꺼낸 건지 프란츠는 바로 이해했다.

이변이 생길 때는 늘 징조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렇게까지 특출나진 않지만, 좌시하기에는 제법 찜찜한 것들이.

“알아봐. 아무도 모르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 * *

어두운 밤, 낡은 옷을 걸친 여자가 인적 없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 일대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야경꾼들조차 지나가지 않아 한 치 앞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여자가 좁은 골목 옆을 지나가던 순간이었다.

골목 안에서 무언가가 뻗어 나와 여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삼켜버린 어둠이 구렁이처럼 여자의 온몸을 칭칭 감았다. 여인의 가슴에 달려 있던 브로치의 보석이 반짝거렸다.

그대로 끌려가기 일보 직전, 환하게 빛이 터졌다.

저도 모르게 멈칫한 그림자에게로 여럿이 달려들었다. 재빨리 먹이를 데리고 도망치려던 그림자는 일정 반경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당황했다.

주변에 누군가 결계를 친 게 분명했다.

그림자는 덤벼드는 이들을 꿀떡꿀떡 삼키려고 했으나 난입한 이들은 들고 있던 장비로 그를 마구 두들겨 팼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것처럼 노련한 솜씨였다. 그림자 안에 숨어 있던 이는 순식간에 포박당해 무릎을 꿇었다.

짝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어이구, 이게 무슨 난리람.”

병사들에게 붙들려, 바닥에 턱을 대고 엎드린 자세를 강요받은 이의 앞으로 훌쩍 다가선 티레인이 씨익 웃었다.

“안녕하신가, 악독한 유괴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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