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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39화 (140/171)

제139화. 사소하고 중요한 것들 (3)

“환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폐하.”

오빠인 에드윈의 옆에서,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올리비아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애써 웃는다는 느낌이 물씬한 앳된 얼굴이 처연미를 풍겼다. 여인은 어떠한 의도도 없어 보였고, 그게 도리어 수군거림을 키웠다.

속에 무엇이 들었든, 외양만큼 잘 먹히는 건 없었다. 연약해 보이는 사람은 보호 본능을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웃음기는 없었으나 아주 차갑지도 않은, 형식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편안한 일정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예, 카암에는 정말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더군요. 즐거운 시간이었답니다.”

수도를 구경하러 나가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 프란츠는 흔쾌히 수락하고 안내할 사람을 붙여주었다.

본디 국왕 부처가 손님을 직접 데리고 나가는 게 보통이겠지만, 공식적인 방문자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겠는가?

왕비는 아예 문전 박대를 하려는지, 그날 일정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따로 외출을 했다. 그게 정말로 일정이 있었으며, 프란츠가 일부러 제라니아에게 소식을 전혀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그들이 알 리 없었다.

“다음에 또다시 방문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근심을 떨쳐낸 듯 배시시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에 악의는 없었다. 웅성거림이 살짝 커졌다.

저렇게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란 덕일까.

“인연이 된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프란츠는 애매모호하게 답했다. 제 옆에 버젓이 제라니아가 서 있는데도, 제게만 말을 거는 것이 거슬렸으나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제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필요하다 여긴다면 제 아내는 분명 스스로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부부가 되고 나서, 사랑에 빠지고 나서도 가장 주의했던 점은 서로가 그어놓은 선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었다.

프란츠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다. 사랑을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지는 않는다. 적당히 웃고 좋은 말을 건네면 되었던 사람들과 제라니아는 달랐다. 그런 요령을 부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모든 걸 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했다. 최악의 결과를 맞은 부모에 관한 기억은 여전히 그의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악몽이었다.

그때의 화제를 다시 꺼낸 적은 없었다. 제라니아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리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이미 늦은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삐죽 솟아나는 걸 억지로 짓눌렀다.

초조해할 필요는 없었다. 기다리는 건 익숙했으니까.

그는 슬쩍 제라니아를 살폈으나, 별달리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듯 살짝 멍한 눈빛을 하고 있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제라니아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저렇게 한눈을 파는 건 드문 일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인연이 빨리 오길 바라야겠네요.”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말입니다.”

유들유들하게 대꾸하는 에드윈의 시선이 프란츠의 곁에 멀뚱히 서 있는 제라니아를 살폈다. 프란츠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제라니아의 어깨를 감쌌다.

“지금도 충분히 좋은 인연인걸요.”

선선히 대답하는 제라니아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덕담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맺은 조약 이상으로 무언가를 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한마디였다.

에드윈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곡 추시겠습니까?”

가볍게 눈웃음을 치던 에드윈이 제라니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제라니아는 옆에 서 있는 프란츠를 향해 제 손바닥을 내보였다. 예절을 생각하면 다소 과감한 행동을 프란츠는 선뜻 받아주었다. 아내의 손을 꼭 붙잡은 그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얼마든지.”

살짝 굳어 있는 에드윈과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올리비아를 내버려둔 채, 둘은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홀의 중심에는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침 한 곡이 끝난 참이라, 다시금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악사들의 반주에 두 사람은 몸을 맡겼다.

사람들을 따라 오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작게 한 바퀴를 돌던 중, 프란츠가 낮게 속삭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고민이 있어 보이는데. 덧붙여진 말에 제라니아는 웃고 말았다.

“티가 나나요?”

“조금.”

“사실 사고를 좀 쳐볼까 하는데, 그래도 될지 고민 중이었어요.”

녹색 눈동자가 일을 꾸미는 악동처럼 반짝거렸다. 그 눈이 무척 예쁘다고 생각하며 프란츠는 선뜻 대꾸했다.

“하십시오.”

“정말요?”

후회할 텐데요. 의미심장한 음성에도 프란츠는 대답을 무르지 않았다. 제라니아가 사고를 쳐봐야 뭘 얼마나 치겠는가. 그런 생각이 없잖아 있기도 했다.

곡이 끝나자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에 몰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제라니아는 저를 놓으려는 프란츠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의아한 듯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제라니아는 요청했다.

“고개 좀 숙여줄래요?”

얼떨결에 남자가 고개를 내린 순간이었다.

“프란츠.”

놀라지 마요. 작게 속삭이는 음성이 깃털처럼 귓가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의 입술에 부드럽게 와 닿는 온기와 같이.

홀 한가운데서 대놓고 입을 맞추는 그들의 모습에 소란이 일순 멎었다. 둥그렇게 둘러선 사람들과 그 중심에 서서 입맞춤을 하는 남녀. 명화에나 나올 만한 장면이었다.

쨍그랑, 프레드릭이 들고 있던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한편, 제라니아는 고민했다. 음, 역시 이건 좀 아니었나?

생각을 길게 하면 할수록 망설임만 길어지기에 과감히 시도하긴 했는데,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애정 행각을 하려니 제법 낯이 팔리긴 했다. 얼굴이 워낙 가까운 탓에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모습이 잘 보였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언제쯤 떨어져야 하지? 긴장해서 그런지 들고 있는 발뒤꿈치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나름대로 생각을 해본 결과, 제라니아는 프란츠의 걱정이 제 담백한 태도에서 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프란츠와 같은 마음이냐고 물으면 그건 잘 모르겠다. 그의 감정은 정말로 과격한 구석이 있었고, 그에 무작정 휩쓸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정인 게 아니냐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절절히 느껴지는 불신에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말로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그러니 확신을 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프란츠를 보니, 제라니아는 잘 돌아가던 머리가 오늘따라 충동에 진 건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슬슬 떨어지자.

입술이 떨어지고 발꿈치가 다시 땅에 닿았다. 연주되고 있던 음악 소리가 뚝 끊겨 있는 걸 알아챈 것도 그때였다. 꺼져가는 불씨가 살아나듯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그 공간을 채웠다.

‘사랑하는 사람한테만 하는 행동이 뭐냐고? 언니는 이미 결혼했으면서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뭐…. 당연히 입맞춤 아냐? 친구끼리 입을 맞추진 않잖아, 안 그래?’

코델리아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게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모르겠다. 이미 일은 저질렀고, 분명 허락도 받았다. 계약 내용을 모르고 도장을 찍은 격이긴 하지만 허락은 허락이지.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랬다.

뻔뻔한 얼굴로 프란츠를 올려다보던 제라니아는 저를 덮치는 얼굴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급한 손길이 허리를 감싸 당기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닿았다.

음악 소리가 점차 귓가에서 멀어졌다.

제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도 집요하게 달라붙던 입맞춤이 끝나자, 제라니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조용히 눈만 깜빡거렸다. 웅성거리는 주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니, 나는 그렇다 치고 도대체 프란츠는 무슨 생각으로….

시선을 들어 프란츠의 표정을 확인하려는 순간, 얼굴을 숨기려는 듯 재빨리 제 어깨에 고개를 묻는 그의 행동에 제라니아는 조금 당황했다.

“저기….”

어깨에 닿은 얼굴이 묘하게 따끈따끈했다. 힐끗 바라본 그의 귓불이 무척 붉었다.

“…잠시만, 이러고 있겠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프란츠가 작게 웅얼거렸다. 이유는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제가 먼저 손을 내밀 때, 프란츠는 유독 표정을 잘 숨기지 못했으니까.

자기도 창피한 꼴이라는 건 아는지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정말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렇게 될 줄 다 알면서.

“그러게, 사고 친다고 했잖아요.”

제라니아는 변명처럼 중얼거리며 그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둘에게로 향하는 시선에 여유롭게 웃어주는 건 제라니아의 몫이었다.

놀란 얼굴을 한 에드윈 왕자와 올리비아 왕녀를 보았을 때는, 조금 속이 시원했던 것도 같았다.

환송회가 끝난 뒤, 제라니아는 사뿐히 걸어 국왕의 처소로 앞장서 들어갔다. 둘이 있을 때, 보통은 왕비의 처소에서 같이 잠들곤 했다. 프란츠가 먼저 찾아오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장소에 딱히 의의를 둔 적은 없지만, 의미가 있기는 했다.

제가 있는 방보다 좀 더 넓고 화려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황량해 보이는 침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제라니아가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얼굴의 붉은 기는 금방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약간 넋이 좀 나가 있었다.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프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점잖은 부부에 속했고,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일은 드물었다. 기껏해야 손 좀 잡거나 어깨를 감싸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도장을 좀 찍어볼까 해서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음성에 프란츠는 살짝 동요했다. 제라니아의 손짓을 따라 침대에 앉은 프란츠가 제 앞에 서 있는 제라니아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서 있고, 제라니아가 앉아 있던 그때와는 정반대로.

“프란츠, 센크라에 갔을 때 나누었던 대화 기억해요?”

‘강은 어딘가로 흘러가지만, 호수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요.’

“나는 강이 더 좋다고 했었고, 당신은 호수가 더 좋다고 했었죠.”

프란츠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은 제라니아가 그와 눈을 맞췄다.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에 노을이 섞여 들어 오묘한 빛을 띠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프란츠. 그건 불가능해요.”

제라니아는 힘주어 말했다. 놀라는 그의 얼굴을 끌어안고 제 가슴께에 이마를 기대게 했다.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괜찮다고, 그렇게 안심시키듯.

“괴로웠죠.”

나 때문에.

“당신이 그랬었잖아요. 내가 두렵다고.”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천천히 말을 골라내며 제라니아는 천천히 프란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결이 고운 금발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스르륵 흩어졌다.

“사실 당신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살짝 움찔거리는 남자의 머리를 하얀 손이 꽈악 붙들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듯 단단한 손길에 프란츠는 얌전히 몸을 맡겼다.

“당신한테 물어볼 상황이 아니어서, 따로 알아봤거든요.”

‘죄송합니다, 왕비님. 온갖 약을 다 써보았지만, 두통의 원인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정서적인 불안이 가장 큰 요인이라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의인 힐데는 진정제로 쓰이는 약물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고 덧붙였다.

제게 왜 숨겼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차마 힐데 앞에서 두통의 원인이 저였을 거라고 말하지 못한 채, 제라니아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묻지는 않을게요. 이유가 짐작 가지 않는 건 아니라서.”

끌어안긴 남자의 입술에서 앓는 듯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질리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는 건데요? 뭐가 문제라서.”

“…의처증에 가깝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그렇긴 해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가 또 무슨 생각을 하기 전에 재빨리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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