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38화 (139/171)
  • 제138화. 사소하고 중요한 것들 (2)

    ‘나와 결혼해요.’

    느닷없는 첫 마디에 프란츠는 무감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에반젤린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위장 결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양이가 쥐를 생각하듯, 제법 흥미로운 기색을 내비치는 프란츠를 에반젤린은 덤덤히 마주했다.

    ‘나는 어떻게든 리하르타넨을 벗어나고 싶거든요. 그러려면 계기가 필요해요.’

    ‘그걸 위해 결혼을 이용하겠다, 이건가.’

    정식적인 결혼 요청이라면 사람 하나쯤은 붙어 왔어야 정상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건, 적어도 제 일행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오래 있지는 않을 거예요. 결혼하고 한 1~2년 지난 뒤에 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거죠.’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이는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설핏 드리웠다. 프란츠는 그것을 모른 척하며 한 마디를 던졌다.

    ‘대가는?’

    ‘공작이 처음 결혼을 제의했을 때, 서신에서 지참금으로 내걸었던 영지가 있지 않나요? 율레므 영지. 그걸 드릴게요.’

    리하르타넨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율레므 백작령. 부유한 땅은 아니나 왕국의 국경선 근처에 있어, 정치적으로는 꽤나 요충지에 속했다. 신하들이 유독 말이 많았던 원인이기도 했다.

    ‘그런 거라면, 다른 귀족들에게 제의해도 될 텐데.’

    ‘리하르타넨에 있는 귀족들은 곤란해요. 친애하는 메디나 공작 각하께서는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하시거든요.’

    이를 으득 악무는 에반젤린을 보니 프란츠는 영문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꼭 선대의 이야기를 할 때의 자신과 비슷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 여기서부터 진짜 중요해서요.’

    에반젤린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가장 중요한 것부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일단 나는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아요. 그에 관련된 행위 역시도 마찬가지예요. 이 부분은 확실히 협의해줘야 해요. 공작 각하한테 휘둘리지 않고, 제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어야 하고요.’

    어쩐지 낯설지 않은 말들이 에반젤린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왜 그렇지, 싶었다가 곧 답을 찾았다.

    - 배경이야 있으면 나쁠 건 없습니다. 다만, 주변 환경이나 누군가에게 휘둘려서는 곤란합니다.

    아.

    제라니아한테 계약 결혼을 제의할 때 제가 꼭 저랬었다.

    ‘아까도 물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그거야, 국왕 폐하께서는 저한테 관심 없으시잖아요.’

    당당하게 말하는 에반젤린의 얼굴에 낯부끄러운 기색 따위는 없었다. 그는 매우 진지했고, 그만큼이나 진심이었다.

    ‘어떤 고아하신 분들의 화법에 따르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르는 저 같은 여자한테서 아이를 봐서 계승권을 꼬이게 하실 생각도 없으실 것 같고요.’

    그의 말은 조목조목 일리가 있었으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 논리대로라면, 공작이 내게 혼담을 넣은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데. 적당히 휘두를 만한 사람을 고르는 게 그 남자로서도 편했을 테고.’

    ‘그거야…. 절 시집보내려는 시도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라서요.’

    ‘……?’

    ‘겨우 쉬쉬하긴 했지만.’

    씻기고 광을 내자 본연의 미모가 드러난 딸을 가지고, 울프 메디나는 소위 말하는 결혼 장사를 하려고 했다. 에반젤린은 격하게 반항했으나 그에게는 거부할 힘이 없었다.

    처음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을 때, 열여덟이었던 에반젤린과 달리 상대는 이제 일흔을 넘어가는 노인이었다. 공작을 오래 섬겼던 충성스러운 신하.

    ‘제 가족이란 자들이 저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뭐지.’

    ‘저주받은 여자.’

    처음으로 시집을 갔던 노인은 첫날밤을 보내기도 전에 심장 발작으로 시체가 되었다. 같이 식사를 했던 에반젤린에게 의심의 화살이 쏟아졌지만, 확정적인 증거랄 게 나오지는 않았다.

    두 번째로 결정된 남편감은 마흔이 넘어가는 중년의 남자였다. 적당히 보수적인 성격에 제법 큰 규모의 무역 상단을 가진 부유한 백작. 그 역시 결혼식을 올리기 일주일 전, 사냥을 갔다가 말이 발작해 낙마해 사망했다.

    그 이후로 에반젤린은 저주받은 여자라 불렸다.

    ‘다들 공작이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지만, 은연중에 자기 가문에 저와의 혼담이 들어올까 두려워하고요.’

    ‘불만이 꽤 있었겠군.’

    고개를 끄덕이는 에반젤린을 지그시 바라보던 프란츠가 결론을 정리했다.

    ‘그냥 놓아줄 생각은 없고, 귀족들의 분위기도 영 흉흉하니, 그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타국으로 보내는 게 낫겠다 싶었겠군.’

    겸사겸사 제게 문제가 생긴다면 더 좋았을 테고.

    디나이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쓴 탓인지, 이런 뒷이야기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첩자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건지, 저쪽이 꽁꽁 숨긴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잘라야겠지만.

    저울질을 끝낸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우선 말하지. 나는 더 이상 결혼할 생각이 없다.’

    위장이건 뭐건 관심 없었다. 영지를 탐내 결혼을 받아들이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그랬겠지. 제라니아와 했던 계약의 내용도 그랬지만, 계약이 없었더라도 같은 대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그럼….’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에반젤린을 뒤로한 채, 프란츠는 시종에게 명령해 누군가를 불러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회색 머리칼의 남자가 의문을 담아 말했다. 일을 하다 왔는지 이렌스는 관복 차림에 서류 한 뭉치를 들고 있었다. 자신을 부른 대가로 가차 없이 국왕에게 결재안을 넘기는 그를 보고 에반젤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간단한 설명을 듣자마자 이렌스는 바로 대답했다.

    ‘그래서, 결혼 자체에 관심이 없는 데다 마침 딱 한미한 자작가의 후계인 저를 거래 대상으로 낙점하셨다고요.’

    공작이나 후작 가문 중 미혼인 남자가 꽤 있기는 했으나, 이 이상 세력이 커지는 건 곤란했다.

    ‘슬슬 승작할 때도 됐지 않나. 지금 작위에선 승진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왕실과의 결합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그들이 혹할 만한 조건을 내걸기는 해야 했다. 상대가 보기에 눈에 차는 권력을 거래에 내걸 수 없다면 남은 건, 확실한 장래성이었다.

    직위가 높지는 않으나 공국에 휘둘리지는 않으며 미래를 약속할 수 있고, 공녀가 말한 모든 조건을 채울 만한 상대.

    미래의 재상 후보를 바라보는 프란츠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한기를 느낀 이렌스가 답지 않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몸이 좀 편하려나 했더니, 휴가도 끝이 나려는 모양이군요.’

    알쏭달쏭한 대화를 주고받다가, 담백한 시선으로 에반젤린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이렌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녀께서 이제 스물이라 들었습니다. 제 나이가 올해 서른넷인데, 정말 온갖 소문을 다 휩쓸어 오겠군요.’

    프란츠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네가 언제부터 남의 눈을 신경 썼다고. 그렇게 묻는 시선을 이렌스는 덤덤하게 맞받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로 욕을 먹기는 좀 귀찮습니다.’

    ‘글쎄. 오히려 한 소리를 듣는다면 그대보다는 공녀가 듣지 않겠나? 여자에 관심이 없던 일벌레를 유혹했다는 헛소리가 돈다든가.’

    터무니없는 예시에 에반젤린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고, 이렌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도 그렇군요. 하여간 남 말 하기 좋아하는 놈들이 천지라 문제입니다.’

    전부 쓸어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쯧, 혀를 차던 이렌스가 가볍게 대꾸했다.

    ‘뭐, 이 조건에 저만 한 인재가 없긴 하군요.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순식간에 대화의 방향이 변했다. 방심하고 있다가 얻어맞은 것처럼 에반젤린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이렌스가 덤덤히 조건을 읊었다.

    ‘아이를 가질 생각도, 공녀님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생각도 없습니다. 정부를 두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미리 이야기는 해주시길 바랍니다.’

    본디 나랏일을 제외하면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제 결혼 이야기조차 무미건조한 투로 이야기하는 얼굴에는 어떠한 감흥도 없었다.

    “다만, 2년은 너무 짧군요. 아이도 없는 상태에서 공녀님이 사라졌다간 차후 리하르타넨에서 영지의 소유권 문제로 말이 나올 가능성이 있으니…. 그 부분을 분명히 처리해두기 위해서라도, 기간은 조금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짧으면 3년, 길어져도 5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날아가려는 정신을 수습한 에반젤린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시만요. 진심이에요? 당신 형제는 있어요?’

    ‘있었다면 재미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외동입니다.’

    ‘저기, 제 조건 제대로 들은 거 맞죠?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니까요. 대를 잇는 건 어쩌고요. 혹시 중간에 말을 바꿀 생각이라면….’

    ‘믿기지 않으신다면 계약서부터 작성할까요. 그리고 아이를 바라지 않는다는 건 진심입니다. 막말로 대가 끊기는 것밖에 더하겠습니까?’

    믿지 않기에는 눈앞의 남자는 정말 미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귀족이라면 누구나 제 피를 이은 아이를 원하지 않던가.

    에반젤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질문했다.

    ‘아이를 싫어해요?’

    ‘좋아합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만, 제 인생에 어린애는 둘로 족한 것 같습니다.’

    결혼도 그렇거니와 양자를 들일 생각도 없었다. 원인을 떠올리고 이렌스는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너무 가까이 뒀던 게 화근인 것 같았다.

    무언가에 정을 주면 이게 문제였다. 기억력이 좋은 탓에 쉽사리 잊을 수도 없으니.

    ‘이미 애가 있다고요?’

    ‘오해하실까 말씀드립니다만 초혼입니다. 아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상당히 마음이 여려서요.’

    뻔뻔하게 대꾸하며 이렌스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게다가, 공녀님께서는 몇 년 안으로 죽은 척 사라지실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

    ‘아시다시피 이건 계약이고, 저희는 잠시간 동업자가 될 뿐입니다. 굳이 제 후사를 걱정해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공녀님보다 계산을 더 많이 하면 했지, 덜 하지는 않으니까요.’

    명확히 선을 긋는 그의 대답에 안도하면서도, 에반젤린은 괜스레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초혼이랑 재혼이 같을 수는 없잖아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다음, 잠시 침묵하던 이렌스가 느릿하게 덧붙였다.

    ‘다만, 저는 딱히 살가운 남편감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무신경하다는 소리도 제법 들었고, 무엇보다 바쁩니다. 일주일 내내 일터에 처박혀 있을 때도 있고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결혼을 하더라도 지금의 생활을 바꿀 생각은 없다. 이게 남자가 바라는 조건이라는 것을 깨달은 에반젤린이 냉큼 대답했다.

    ‘앞서 말한 조건들을 전부 지켜준다면, 그 정도는 괜찮아요. 어려운 조건이라는 거 아니까.’

    이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백하고 건조한 시선에서는 어떠한 열망도 엿보이지 않았다. 초연한 분위기에 더없이 사무적인 태도가 신뢰를 더했다.

    그 상황을 관조하고 있던 프란츠가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가 말하는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는 상대라 생각하는데. 왕실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짚고 갈 것도 없었다. 에반젤린은 단호하게 답했다.

    ‘좋아요, 한번 걸어보죠.’

    * * *

    결혼이라니.

    갑작스럽고도 놀라운 선언에 웅성거림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제라니아 역시 놀란 얼굴로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튀어나가려는 질문을 겨우 억누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상대는….”

    그가 손짓하자, 누군가가 사람들 속에서 걸어 나왔다.

    프란츠의 부름에 따라, 단정한 옷차림을 한 이렌스가 천천히 걸어 나와 에반젤린의 옆에 섰다. 족히 수십이 넘는 시선이 제 얼굴을 콕콕 찌르는데도 그는 태연했다.

    그들은 계약서 작성을 끝내자마자 사람을 보내 제이든 메디나를 불러, 협상을 시도했다.

    남자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몇 가지 비밀 조건을 추가하자 못 이기는 척 끌려왔다. 메디나 가문이 에반젤린을 치우고 싶어 한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메디나 공작을 설득하는 건 제이든에게 일임했다. 그러고 하루 뒤, 제 숙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법 초췌해진 몰골의 제이든이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지금 여기였다.

    “그렇게 됐으니, 모두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주리라 믿네.”

    배부른 짐승처럼 나른한 음성이 이어졌다. 축하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친히 도륙을 낼 것처럼.

    디나이안 왕국 측을 돌아보자, 당황한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는 올리비아와 달리 에드윈은 침착했다.

    시작부터 깜짝 소식이 알려지긴 했지만, 아무튼 연회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하하 호호 웃으면서도 귀족들의 동선은 슬슬 리하르타넨 사절단 쪽을 거쳐 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입고 치열한 눈치 싸움이 오갔다.

    환송연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 터진 사건만 아니었다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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