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사소하고 중요한 것들 (1)
프란츠는 곤란했다.
“이런 곳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거예요? 허리 아프지 않아요?”
때아닌 불청객 때문이었다.
그의 책상 앞, 집무실 가운데에 마련된 소파에는 에반젤린이 앉아 있었다. 발랄한 음성에도 프란츠는 대답 없이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처음 에반젤린이 독대를 요청했을 때, 그냥 안으로 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상의 없이 계획을 지연시킨 만큼 할 말이 있겠거니 싶은 정도였는데, 이건 예상 밖이었다.
말수가 적은 편이라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종알거릴 줄이야.
기운이 넘치는 스무 살의 패기를 목도한 순간 프란츠는 급격하게 피로를 느꼈다.
“과묵한 척은 포기하기로 한 건가?”
“딱히 그런 척을 한 적은 없는데. 말 같지도 않은 말들에 일일이 장단을 맞춰줄 필요가 있나요?”
“그렇긴 하지.”
순순히 인정하는 남자를 에반젤린은 의아한 듯이 쳐다보았다. 딱딱한 태도만 보면 완전 권위적으로 굴 것 같은데, 제법 의외였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여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그래서, 어제는 왜 갑자기 밖으로 나가셨던 거예요? 돌아와서는 갑자기 시기를 미루자고 하고.”
원래 어제 공표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꼼짝없이 환송연 자리를 노려야 하게 생겼다. 프란츠는 악동처럼 웃는 숙녀의 얼굴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어쩌다 보니.”
연회장으로 다시 돌아온 뒤로도 그는 계속 기분이 저조했다. 우울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겠지만, 제 감정에 둔한 남자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결국 계획을 변경했다. 웅성거리는 리하르타넨 사절단 중 한 명에게 시기를 뒤로 미루자 귀띔하고 문제를 마무리했다. 그들은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그래봤자 주도권은 이쪽에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기한에 아직 여유가 있다지만 감정 때문에 계획을 뒤로 미루다니, 제 인생에서 다시 없을 멍청한 짓이었다.
프란츠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뜩이나 제라니아가 비앙카 모렌츠와 단둘이 어딘가로 나갔다는 보고를 들은 직후였다. 그의 손가락이 의식 없이 책상을 초조하게 두드렸다.
신기하다는 듯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에반젤린에게 프란츠가 조용히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국왕 폐하 같은 분께서도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워서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
매정한 대답에도 에반젤린은 개의치 않았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박하게 말하면 교양이 부족했다.
오래 말을 섞어보니 확실히 예법에 익숙한 인물은 아니었다. 연회에서 입을 거의 열지 않았던 이유는 그 때문도 있을 것이다.
“할 거면 빨리 해치우고 싶다고요.”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장 해결될 일은 아니니, 이쯤에서 무의미한 시간 낭비는 그만두는 게 어떻겠나.”
요컨대 꺼지라는 뜻이었다.
“냉정하셔라.”
그럼에도 우아한 음성으로 답하는 여인은 제법 존재감이 있었다. 그는 새까만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레이스는 물론 자수도 거의 없어 밋밋했지만 무척 잘 어울렸다. 모자를 쓰는 대신 자잘하게 땋은 머리를 하나로 올려 핀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얼굴과 분위기가 있으니 다듬으면 적당히 쓸 만해지겠지.
물건을 감정하듯 상대를 응시하는 무기질적인 시선에 진저리를 치는 대신, 에반젤린은 기어코 가신들 모두가 외면했던 화제를 던졌다.
“정말 그 상냥한 왕비님이랑 싸우시기라도 한 거예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이라 생각하지.”
그가 고요히 원흉을 노려보았지만, 에반젤린은 지지 않고 마주했다. 무슨 말을 해도 기죽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본인이 장담한 대로 거머리보다 질기다면 질겼다.
“냉큼 받아들인 사람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보는데요.”
“이제라도 계약을 무르고 싶다는 뜻인가?”
“존경하는 국왕 폐하께서, 국가의 이름을 걸고 한 약조를 그렇게 쉬이 파기하실 거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말주변이 제법이군.”
“칭찬 감사드립니다.”
에반젤린이 입가를 가리고 웃는 시늉을 했다. 눈빛을 번뜩이는 게 제법 건방졌지만.
“정말 후회하지 않겠나.”
지나가듯 가볍게 묻는 국왕에게 에반젤린은 공손히 답했다.
“후회할 것부터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답니다, 폐하.”
“…….”
“저는 힘이 없어서, 어리석게 보일지 몰라도 일단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자신을 나약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여인에게서는 비굴한 태도가 엿보이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그럴 필요가 없는 올리비아와 비슷하면서도 많은 것이 달랐다.
그 점이 제법 흥미롭기는 했다.
“그대가 생각한 최선은 도망이 아니었나? 왕비의 호의를 좀 더 이용했어도 됐을 텐데.”
“왕비님께서는 그저, 수도를 구경시켜 주셨을 뿐이랍니다. 호의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에반젤린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입에 겨우 풀칠하고 살던 시절에도 남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굽실거린 적은 없었다.
자라날수록 자신을 닮아 아름다워지는 딸에게 어머니는 내리 경고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여자에게 미색은 인생을 박복하게 만드는 지름길일 뿐이라고. 늘 유쾌하던 어머니의 얼굴에 쓸쓸하게 감돌던 미소를 기억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에반젤린은 그 말에 따랐다. 일을 나갈 때마다 얼굴에 천을 둘러 미모를 가리고, 조용히 하루를 영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이들을 만났을 때,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성의 생활은 갑갑했다. 제게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찾는 아버지란 인간이나, 시종일관 냉랭하게 구는 공작 부인, 피가 통한 걸 알고도 집적거리는 형제란 인간들에게 정이 붙을 리 없는 건 당연했다.
성에 붙잡혀 왔을 때부터 도망가려고 시도한 게 어언 4년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안 봐도 뻔했다. 병사들은 무례를 감수하고라도 마차 안을 확인할 게 분명했고, 제가 선수를 치지 않으면 왕비가 곤란해졌을 것이다.
외양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 단단하고 맑은 왕비의 눈동자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호의를 거절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는 어머니가, 더 이상 자신 때문에 희생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왕비님 같은 분을 꽤 좋아하거든요.”
“…어떤.”
“선의라는 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람.”
에반젤린은 손등에 턱을 괴고 웃었다.
“알 거 다 아는데도 사람 경멸하지 않는 거,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거든요. 마음이라는 게 사람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는 연회장에서 올리비아와 눈을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자색 눈동자에 희미한 경멸이 스쳐 지나가던 순간을.
평범한 귀족이라면 대체로 그런 얼굴을 한다. 천민 출신의 정부에게서 난 사생아. 이유 없이 이토록 많은 사람의 악의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명칭이었다.
4년을 넘게 그런 시선 속에서 살아온 만큼 에반젤린은 귀족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 생각을 조금 달리한 건 왕비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였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왕비는 한 번도 자신에게 그런 낌새를 내보이지 않았다. 그게 못내 신기했다. 무엇 하나 고생하지 않고 자랐을 법한 여자에게서 제 어머니의 모습이 연상되는 게.
자신 같은 이를 멀리하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그런 눈을 하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환경은 천성조차도 왜곡시킬 수 있으므로.
“주제넘은 바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이 계속 변하지 않고 그대로셨으면 좋겠어요.”
프란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에반젤린은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나저나, 왕비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는 건가요?”
싸하게 감도는 침묵에 에반젤린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세상에, 따라 나가길래 당연히 얘기하셨을 줄 알았는데요.”
그런 말을 할 정신이 있었을 리가. 새삼 그날 자신이 이성을 잃었음을 깨닫고, 프란츠는 밀려오는 두통을 가라앉혔다.
“…환송회 날이면 알게 될 테니까.”
그가 변명처럼 말을 주워섬겼다. 단단하던 목소리에 살짝 힘이 빠졌다.
“문제가 없다면 괜찮겠지요.”
에반젤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생활이라면 더 묻기보다는, 이쯤에서 돌아가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반젤린이 그를 향해 우아하게 예를 갖췄다.
“그럼, 환송회 날 뵙겠습니다. 폐하.”
* * *
넓은 홀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여느 때와 다르게, 어전의 가운데에는 커다랗고 둥근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람들 앞에 서 있던 제라니아의 시선이 바로 앞에 보이는 테이블로 향했다.
사람들은 얼핏 보면 규칙 없이 서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경계선이 있었다. 경계를 따라 정확히 세 덩어리로 나뉘어 있는 이들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여 있는 무리 앞으로 대표인 사람이 한 명씩 걸어 나왔다. 디나이안에서는 에드윈 왕자가, 리하르타넨에서는 울프 메디나의 장자인 제이든이, 크레이츠에서는 국왕인 프란츠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섰다.
테이블 위에는 세 장의 종이가 올려져 있었다. 대표로 나선 이들은 조약의 내용이 적힌 종이에 차례로 도장을 찍었다. 각기 한 장의 종이를 돌돌 말아 인연을 상징하는 녹색 끈으로 묶었다.
“…하여, 세 국가 사이에 평화 협정이 세워졌음을 공표하는 바이다.”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하는 프란츠를 끝으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준비되어 있는 환송회 자리로 이동하면서 제라니아는 제 옆에 서 있는 프란츠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평소보다 표정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사적으로는 싸웠다 한들 공석에서는 사이좋게 웃는 게 정치라는 말답게, 두 사람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를 고수했다. 워낙 점잖은 부부였던 만큼 사람들도 딱히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는 듯했다.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삼킨 제라니아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조금 뒤, 프란츠가 힐끔 시선을 내렸다. 곧은 자세로 단정하게 걸어가는 여자의 얼굴에 조용히 머물렀던 시선은 연회장에 도착한 뒤 거두어졌다.
사람들이 전부 연회장에 들어서자, 프란츠는 술잔을 들었다. 간단한 축사를 읊은 뒤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중대한 발표를 하겠다.”
국왕의 아름다운 얼굴에 산뜻한 미소가 어렸다. 그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는 타국 사람들과 달리 크레이츠의 귀족들은 전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가시가 돋은 꽃이었다. 화려할수록 독이 강하다질 않은가. 국왕의 웃음만큼 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건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 서 있는 에반젤린 메디나 공녀와의 결혼을 발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