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우정과 사랑의 경계 (3)
“뭔데?”
“별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내 의견이 다를 때, 너라면 어떻게 할까 싶어서.”
가벼운 어투였지만 눈빛은 전혀 달랐다. 세상이 무너진다면 저런 눈빛을 할까, 싶을 정도로 절박해 보였다.
요즘 안색이 좋지 않았던 이유일까. 그것을 묻는 대신 제라니아는 대답을 내주었다.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아. 보아하니 너는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은데?”
“내가 틀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너무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싶고.”
지그시 그를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너는 그게 옳다고 생각하잖아.”
크리스토퍼의 입술이 아교로 착 붙인 듯 꾹 다물렸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던 제라니아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얹혔다.
“아무리 애써도, 막을 수 없으면 어떡하지? 절대 바꿀 수 없을 것 같으면.”
제라니아는 쥐고 있던 물컵을 크리스토퍼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찰랑이던 수면이 서서히 잔잔해졌다.
“나라면…. 그래도 최선을 다할 거야. 결과를 안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는 게 더 후회할 것 같거든.”
설령 결과가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과정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긍정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람은 희망을 가지기에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거니까.
아주 작은 변화라도 있으리라고,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제라니아는 노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 내 의견은 단순히 참고로만 삼아줘. 무엇을 고민하든, 네가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결정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아.”
제라니아는 손을 뻗어 크리스토퍼의 손등을 덮었다. 따뜻하게 퍼져가는 온기가 안정감을 주었다.
“진지하게 네 마음에 물어봐.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너라면 분명 맞는 답을 찾아낼 거야.”
친구의 얼굴을 한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토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제라니아, 그거 알아? 나는 널 정말…. 동경했어.”
“어?”
“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 어릴 때 너는 정말 거대해 보였거든. 물론 그때는 네가 더 크기도 했지만.”
웅크리고 앉아 있는 제게 손을 내밀던 여자아이. 작았지만 거대했다. 해맑아 보이지만 생각이 깊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대하던 소녀.
한때는 그 다정함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너는 모두에게 공평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은 생각보다 더 음습하고 어두워서, 멋모르던 사춘기 시절에는 조용한 열병을 앓기도 했다.
“철없을 때는 네가 마냥 초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공작 각하 앞에서 말을 꺼내면서, 뒷짐을 진 네 손이 떨리는 걸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하지만 안다. 네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눈부시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 너는 두렵지 않은 게 아니구나. 두려워도, 용기를 내는 거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라, 알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다는 걸.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용기를 내기 마련이야. 나만이 특별하지는 않아.”
두려움을 이겨내는 감각은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킨다. 제라니아는 이런 경험이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으며 나아가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앉아 있는 친구 역시도.
“그간 힘내왔던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소꿉친구인 만큼, 제라니아는 그가 겪었던 고난을 옆에서 지켜봐 왔다.
휴스타인을 포함한 트라이탄 출신 귀족들은 사교계에 쉬이 편입되지 못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어른들의 분위기를 알아챈 아이들은 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셀리나는 꽤 나이가 차고도 친구가 거의 없었고, 크리스토퍼 역시 비슷한 귀족 또래들에게 냉대를 당했다. 루크는 신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처럼 아예 그들을 무시했다. 네이선은 그런 일을 겪기엔 한참 어렸고.
제라니아의 아버지, 아이작은 아론 휴스타인을 마음에 들어했다. 연회를 개최할 때마다 꼬박꼬박 트라이탄으로 초대장을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휴스타인은 바이첸이 내미는 호의를 마다할 입장이 아니었고, 때문에 제라니아는 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는 언니와 함께 제 아버지를 따라온 크리스토퍼와 놀면서 가끔 들어오는 시비에 지지 않고 대응하곤 했다. 크리스토퍼가 성장하고 나서는 입장이 뒤집혔지만.
“어느 쪽의 불행이 더 크고 용기가 더 큰지, 굳이 비교할 필요 없는걸.”
어릴 때 크리스토퍼는 제법 소심했어서,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껄끄러워하는 것에 주눅이 들곤 했다.
‘역시 내게 문제가 있는 걸까?’
‘응? 전혀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 때문에 너랑 칼리아까지 겉도는 것 같아서….’
‘됐어. 무리 지어 남을 따돌리는 바보들이랑 놀다간 머리 나빠져. 안 그래, 제라니아?’
‘맞아.’
맑게 웃으며 제 손을 잡아당기던 어린 소녀의 얼굴이 지금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넌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너한테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니야.”
“…네가 그러니까, 내가 널 포기하지 못하는 거야.”
크리스토퍼는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제라니아와 그에게 이상하지 않다고 말하던 자신, 어제와는 반대가 된 입장이 제법 웃겼다.
“한때의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관계에는 사랑만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 언제 식을지 모르는 감정 때문에, 우리가 그간 쌓아온 관계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게 두려웠고.”
요동치는 마음을 숨기고, 그는 평온한 자신을 꾸며냈다.
“네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심경이 퍽 복잡해. 널 그렇게까지 만든 국왕 폐하가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런데도 포기가 안 되니 미칠 것 같지.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건 검을 쓰는 것밖에 없으니까…. 너를 지켜줄 수 있는 기사가 되고 싶었지.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고, 지금 여기까지 왔어.”
그는 언제나 제라니아의 등 뒤를 지켰다. 한 발자국 멀어진 거리에 서. 손을 뻗으면 닿을 수도 있겠지만, 절대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속이 쓰린데, 후련하기도 했다.
“내게서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건 전부 네게서 배운 것일 거야.”
“…….”
“그것만으로도, 널 좋아하게 된 걸 후회하지 않아.”
산뜻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감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
미안하다고 하는 대신, 제라니아는 그 마음을 감사히 인정하기로 했다. 완벽한 거절인 동시에 존중이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크리스토퍼는 건물 밖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낮이라 그런지 광장에는 사람이 바글거렸다.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동상 앞에는 좌판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상대로 호객 행위를 벌였다.
후드를 푹 내려쓰고 길을 걸어가는 덩치 큰 남자에게 몇몇이 흘리듯 시선을 주었다. 가려져 있는 남자의 눈동자에 심란한 감정이 흘러넘쳤다.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스쳐 가며, 그는 기억의 한 자락을 끄집어냈다.
‘같이 이 나라를 엎어보지 않겠습니까.’
외부에 알리지 않고 비밀스럽게 회동을 가졌을 때, 케라온 공작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크리스토퍼는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검을 뽑기 전, 아론이 손을 뻗어 크리스토퍼의 손등을 붙잡아 제지했다. 크리스토퍼는 어쩔 수 없이 손에서 힘을 뺐지만, 경계하는 기색으로 그를 훑었다.
‘…왜 내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내가 지금 당장 나가서, 이 모든 걸 왕실에 고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와서 하는 소리치고는 굉장히 덤덤한 음성이었다. 케라온 공작의 뒤에 서 있던 윌터가 그들을 기가 막힌다는 듯 노려보았다.
그 불온한 시선을 본 크리스토퍼는 생각했다. 역시 검을 뽑을까. 아버지를 보호해야 했다.
‘아니요, 각하께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케라온 공작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밀려오는 불길함에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진 크리스토퍼의 바람과 달리, 그는 거침없이 내뱉었다.
‘이미 알지 않습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한계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크리스토퍼는 멈칫했다. 아버지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어도, 등지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정말 그들을 믿을 수 있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이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드리웠다. 알란 케라온은 선심 쓰듯 말했다.
‘뭐,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압니다. 시간을 드리지요.’
‘시간을 줘도 의미 없을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요.’
보다 못해 나선 크리스토퍼가 서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케라온 공작이 그를 돌아보았다. 애송이를 바라보는 듯한 그 시선에 뼛속까지 불쾌감이 밀려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왔는데도, 그 징그러운 감각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그의 발 아래로 늘어졌다. 한밤중인 만큼 주변이 무척 깜깜했는데도.
크리스토퍼는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함께 곧장 그곳을 떠났다. 밤새 말을 달려 그들의 영향권을 벗어난 뒤에야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영지에 있는 성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론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서재로 들어가는 그를 따라 들어온 크리스토퍼에게 아론은 조용히 말했다.
‘너는 억울하지 않으냐, 아들아.’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겪어야만 했던 부당한 일들이.’
왕국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차별을 견뎌야 할 필요 역시 없었을 것이다. 아론이 던진 질문에 크리스토퍼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제게서 등을 지고 있어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솟아나는 불안감을 감추고 그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한 번도 그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느릿하게 말을 꺼내는 크리스토퍼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그러셨잖습니까. 우리는 기사로서 결과에 승복하는 것뿐이라고. 그러니 언제나 당당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지침 삼아 나아왔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이미 자신을 긍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지금의 생활에 나름 만족했다. 새로운 국왕은 능력에 따라 사람을 등용했고, 선대까지만 해도 번잡하던 왕궁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적어도 그 내부에는.
최근에 그가 자신을 따로 불러 기사단장 자리를 제안했을 때는 조금 놀랐다. 예전에 극비 임무를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 달리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크리스토퍼는 그 얼굴이 국왕에게 훨씬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제의 일을 가지고 제가 이미 꺼낸 말을 취소할 사람은 아니었다. 군신으로서 그 정도 믿음은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버지, 그건 마치….’
‘그만, 피곤하구나.’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도했지만, 점잖은 목소리가 날아와 그것을 끊어 냈다.
‘조만간 의논할 자리를 마련하마. 그때까지는 함구하도록 해라. 특히 루크한테는 말이다.’
아론이 천천히 뒤를 돌아 크리스토퍼와 눈을 마주했다. 역광을 받아서인지 유독 짙고 어두워 보이는 아론의 눈동자를 본 순간에서야 크리스토퍼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7년 전, 무엇을 포기했는지.
그건 바로, 희망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가급적 빨리 제라니아를 만나려고 한 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하에서였다. 제가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문제를 매듭짓고 싶었다.
케라온 공작한테 제의를 들었을 때, 곧장 떠오른 생각은 명백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은 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평생 동안 자랑스러워했던 가문을 등지는 것도 불가능했다.
길을 잃은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 크리스토퍼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