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35화 (136/171)

제135화. 우정과 사랑의 경계 (2)

“어서 와.”

크리스토퍼가 조용히 자신을 반기는 제라니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제라니아의 몸 여기저기를 매섭게 훑었다.

“다친 곳 없어.”

“…다행이네.”

맞은편에 마련된 의자에 착석한 상대에게 제라니아는 가볍게 권유했다.

“물이라도 마실래?”

제라니아의 앞에 놓여 있는 물잔을 본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느릿하게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건 크리스토퍼였다.

“설마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몰랐어.”

시녀에게 돈을 쥐여주고 쪽지를 맡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광장 근처에 있다는 건물은 크리스토퍼도 익히 알고 있는 장소였다. 제라니아의 손에 이끌려 축제를 보러 갔을 때, 거기에서 같이 연극을 봤었다. 스물한 살 때였으니 10년 전 일이다.

사실 연극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반짝이는 눈으로 연극을 구경하던 제라니아의 미소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고민하긴 했는데…. 그냥 묻고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크리스토퍼를 만나러 왔다는 게 알려지면 오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결론은 찜찜했다. 크리스토퍼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와 오랜 친구였던 만큼 확신할 수 있었다.

“국왕 폐하와는…. 이야기가 잘 끝난 거야?”

조심스럽게 묻는 크리스토퍼에게 제라니아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투명하고 푸른 눈동자에 경악이 차올랐다.

“설마 싶어 묻는데….”

“네 탓이 아니야.”

언젠가는 터질 갈등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제라니아는 그에게 어떠한 짐도,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았다. 불가능한 것에 희망을 주는 일만큼 잔인한 일도 없었다.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크리스토퍼는 씁쓸하게 웃었다.

“예상은 했는데, 역시 눈치챘구나.”

“…….”

“제라니아, 난….”

크리스토퍼는 손바닥을 내어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 소리가 그의 심경을 대변했다.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평생 알리고 싶지 않았어.”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무거운 진심을 토로하는 크리스토퍼에게 제라니아는 나직이 말했다.

“내가 널 믿지 않을 리가 없잖아.”

이 와중에도 그저 차분한 음성이 크리스토퍼의 귓가에 닿았다.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아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넌 정말 상냥한데, 그만큼 잔인해.”

“…….”

“가망이 없다는 걸 태도에서부터 보여주니까.”

고개를 들어 제라니아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퍼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애써 목소리에서 감정을 비워냈다.

“가면무도회 때 기억나? 나 있지, 네가 했던 말.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어.”

‘난 보호받기만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야.’

‘넌 언제나 나를 지켜주려고 해. 널 알아온 이후로 계속 그랬던 것 같아. 정말 고마운데, 그런데 가끔, 너한테 내 의견이 중요하긴 한 건지 의문이 들 때가 있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기사로서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가치관이 그 말에 거세게 흔들렸다.

내가 너를 무시하고 있는 걸까. 너를 돕고 싶었던 행동들이 네게는 그저 부담이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데, 나는 역시 그런 상황이면 나설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난 네가 다치는 게 싫고, 힘들어하는 게 싫어.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아.”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라니아가 한마디를 보탰다.

“잘 알고 있어.”

그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자신의 친구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동경할 만한 존재였다.

“너한테는 아무 문제도 없어, 크리스. 네 방식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뿐이야.”

신중하게 말을 골라내는 입매가 굳어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그에 안도했다.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칼리아의 말을 그는 지금 이 순간 뼈저리게 이해했다.

“…감정을 정리할 수 있다는 장담은 못 하겠어. 나라고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니까. 쉽게 되었다면, 지금까지 질질 끌고 있지도 않았겠지.”

말을 쥐어짜 내는 그의 시선이 제라니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급히 덧붙였다.

“네 입장 잘 알아. 그래서 계속 숨겼던 거고. 티 안 내도록 노력할게. 정말 노력할 거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그러니까….”

“…….”

“접으라는 말만 하지 말아줘. 부탁할게.”

더는 견딜 수 없었는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는 크리스토퍼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음성이 쏟아졌다.

“안 그래.”

이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는 크리스토퍼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 제라니아는 자꾸만 물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감정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사고하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기 위해 노력하자.

평생의 신조를 생각하면 이렇게 말하는 자신이 정말로 낯설었다. 예전이었다면 크리스토퍼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깨달았다.

아, 나도 변했구나.

“하지만, 너랑 거리를 두기는 할 거야.”

프란츠가 걱정하니까. 그 말까지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눈치 빠른 크리스토퍼는 바로 알아들었다.

“국왕 폐하 때문이지?”

“맞아.”

선선히 인정하는 제라니아를 크리스토퍼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머쓱해진 제라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표정이야?”

“아니, 생각보다 잘 지낸다 싶어서.”

구체적인 설명을 바라는 얼굴에 크리스토퍼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분이 널 아낀다는 건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 옆에 끼고 있지 못해 안달이신 것도. 난 사실 그래서 놀랐어. 네가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게.”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나는 여전히 얽매이는 건 싫어. 누군가 날 구속하려고 하는 것도 달갑지 않고.”

손으로 잔을 꼭 쥐자, 물 위에 비친 제라니아의 얼굴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지만 양보를 할 수는 있는 거잖아. 이 정도는 괜찮으니까. 해줄 수 있는 만큼은 해주고 싶어.”

제라니아가 쓸쓸하게 웃었다. 심란한 심경이 미소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어제 결국 싸웠거든. 이게 싸웠다고 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답지 않게 말끝이 늘어지는 것에, 제라니아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때 느꼈던 서글픈 기분이 목 안쪽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겠더라.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하든, 그 사람은 화를 낼 것 같았어.”

늘 무심하게 상황을 넘기던 사람이 그렇게까지 나올 정도면, 아마도 하루아침에 쌓인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도 별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고.”

진짜로 그를 사랑한다고 자각한 건 어제가 처음이었으니, 그렇게 느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6년 전, 실이 끊어진 인형 같던 모습보단 나았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서늘해졌다.

“사랑은 어렵네.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서 좀 괴로워. 차라리 내 짝사랑이면 마음 편했을 것 같아.”

진심으로, 프란츠가 슬퍼하는 걸 보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생각한다.

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지금보다는 덜 괴로웠을까.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됐을까.

“그러지 마. 짝사랑이라는 거, 생각보다 엄청 괴롭다고.”

작게 한숨을 내쉬는 크리스토퍼를 보며 제라니아는 아차 싶었다.

“아, 미안해.”

“아냐, 너다운 말이라고 생각해.”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크리스토퍼는 말을 툭 꺼냈다.

“그나저나, 넌 그분이 무척 연약한 것처럼 이야기하네. 내가 보는 국왕 폐하는 정말로 강한 분인데.”

즉위하기 전에도 느꼈지만, 국왕이 된 이후의 그는 그야말로 날개를 단 범을 떠올리게 했다. 일관된 기조와 추진력을 가지고 몇 년 사이 많은 것을 바꾸었고, 귀족들을 휘어잡았다.

귀족들이 판치던 선대의 왕궁을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강한 분이지만…. 사람이 언제나 강하기만 할 수는 없잖아.”

조용히 읊조리는 제라니아의 얼굴에 걱정이 스몄다.

“그분을 보고 있으면 가끔 막막해져.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매달릴까 싶고…. 자꾸 걱정이 돼.”

모든 걸 다 가졌음에도,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는 듯이 매달리는 이 남자를 보고 있으면 자꾸 마음이 약해졌다.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당신이 웃는 모습이 좋았고,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게 좋았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더 특별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겪어본 적이 없는 감정을 어떻게 쉽게 장담할까.

당신에게 내가 유일하듯, 내게도 아마 당신이 유일할 것이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냥, 정말 그냥 궁금해진 건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말해봐.”

“…내가 국왕 폐하처럼 그렇게 매달렸다면, 너는 조금이라도 나를 봐줬을까?”

조심스럽게 묻는 크리스토퍼를 보며 제라니아는 잠시 침묵했다. 대답은 어이없을 정도로 분명했다.

“아니, 그렇지 않았겠지.”

프란츠이기 때문에 기꺼웠던 것이다. 자신은 그걸 잘 알았다. 왜 이제야 알아챘나 싶을 정도로.

무뚝뚝하지만 솔직하고, 나를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러고자 노력해준다. 그게 자신의 뜻과 다를지라도.

“처음이었거든. 무엇이든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리 솔직하게 살고자 해도, 가족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내밀한 비밀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아무리 사람을 사랑한들, 수용할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었다.

거리감을 재는 건 습관이었다. 조금씩 속내를 꺼냈다가 선을 긋기를 반복했다. 남들과 다르다는 건 필연적으로 거부감을 수반한다. 많은 것을 알기에, 가면을 썼을 때만 조금은 솔직해질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아마 나는, 누군가한테 이런 나를 온전히 인정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마 거기서부터였던 것 같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선을 허물 수 있었다. 사실 제가 의도했다기보다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허물어져 있었다는 말이 정확하겠지만.

“…이해했어.”

크리스토퍼의 표정은 오묘했다. 슬픈 것 같으면서도,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말없이 제라니아를 쳐다보던 그가 툭 말을 꺼냈다.

“이건 다른 얘기인데…. 하나 더 질문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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