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34화 (135/171)
  • 제134화. 우정과 사랑의 경계 (1)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크리스토퍼가 멍하니 벤치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라니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우려하다가도, 제가 나섰다가는 일이 더 커질 것이 분명했다.

    “크리스토퍼!”

    갈팡질팡하는 그의 앞으로 뛰어온 누군가를 알아보고 크리스토퍼는 눈을 깜빡였다.

    “…칼리아.”

    드레스 자락을 옆으로 모아 쥔 채 달려온 칼리아가 그 자리에 멈춰, 화급히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리했다.

    “제라니아는?”

    “국왕 폐하랑….”

    그 말만 듣고도 상황이 파악됐는지 칼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기어코 사달이 났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없어야지. 이 이상 제라니아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

    저를 나무라는 엄격한 목소리에 크리스토퍼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하시네요. 방금 전 제대로 실연을 당했는데.”

    가볍게 말하려고 했지만 덜컥 목이 메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칼리아가 크리스토퍼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국왕 폐하께서 춤이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오시더라. 제라니아를 쫓아 나갔구나 싶었지.”

    혼잣말을 하듯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벤치에 등을 기대며 칼리아는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묵묵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토퍼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무언가를 쫓듯 집요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그를 보고 칼리아는 픽 웃었다.

    스산한 바람이 둘의 옷자락을 휘감았다. 칼리아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중얼거렸다.

    “너나 나나, 미련투성이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올리비아의 시선이 홀로 서 있는 에반젤린에 가 닿았다.

    춤이 끝나고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더니, 국왕은 곧장 밖으로 나가버렸고 에반젤린은 혼자 남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걸어간 그가 다른 이들의 춤 신청을 단호하게 뿌리치는 것까지 올리비아는 전부 지켜봤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해놓고, 다른 여자랑은 아무렇지 않게 춤을 추다니.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분할 지경이었다.

    제법 아름답기는 하나 품위라고는 없는 여자였다. 인사를 건넸을 때도 그저 고개를 까닥이거나 몇 마디 이어가다 마는 정도였다.

    다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여자가 메디나 공작의 사생아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물론 그에 관해 대놓고 말을 꺼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공작이 제 딸이라 공표했다면 그렇게 받아들여야 했다.

    리하르타넨 공국은 작지만 부유하고 결속력이 강한 나라였다.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없었다. 물론 그게, 에반젤린을 두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심한 자들이었다.

    올리비아는 기품 있는 여성이기에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런 속내를 티 낸 적이 없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사태를 관망하며 막연한 거부감을 감추는 게 전부였다.

    그때, 에반젤린이 고개를 돌렸다. 두 여인의 시선이 맞닿았다.

    순간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올리비아와 달리 에반젤린은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가 내보이는 감정에 올리비아는 불쾌해졌다.

    ‘뭐야, 마치 날….’

    동정하는 것 같은.

    올리비아가 입을 달싹이는 것보다 에반젤린이 눈을 피하는 게 더 빨랐다. 다시 시선이 엇갈리고, 시끌벅적한 연회장의 소음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 도도하게 서 있던 올리비아는 제 어깨를 감싸는 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에드윈을 발견하자마자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오라버니!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시는 거예요?”

    투정 어린 목소리에 에드윈은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구나.”

    올리비아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그 귀족이랑요?”

    에드윈은 최근 한 남자와 어울렸다. 유쾌하면서도 깍듯한 태도와 풍부한 지식, 유창한 언변을 가진 남자는 금세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건 왕자님께만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그는 최근 북동쪽에 있는 영지의 산에서 금광으로 보이는 동굴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관심을 보이는 에드윈에게 남자는 슬쩍 투자를 권했다.

    에드윈은 한 번 거절했다가, 거듭 권하자 못 이기는 척 제안을 검토해 보겠다 말했다.

    “돌아가서 아버님과 마저 의논해 봐야겠지만 말이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에드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도 여전히 올리비아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기쁘지 않은 거니, 올리.”

    아무리 곱게 키워졌다지만 올리비아라고 사정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재정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외부의 지원이 필요했고, 왕국과의 정략혼은 자금을 끌어오기 위한 수단이었다.

    치를 떨면서도 왕국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다면 다른 혼처를 알아보든가, 다른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올리비아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니, 그…. 기쁜데, 너무 일이 잘 풀려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 기분이 이상해.”

    우물거리는 여동생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에드윈은 말했다.

    “걱정 마, 다 잘될 거야.”

    * * *

    “왕비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멍하니 거울을 응시하던 제라니아는 제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시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것도.”

    시녀가 들고 있는 커다란 빗이 갈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빗었다. 얌전히 서 있는 제라니아의 손톱을 손질하던 다른 시녀가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그러고 보면, 사절단분들이 돌아가실 날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조약은 크게 평화 협정과 교역 문제로 나뉘었는데 첨예한 협상이 오간 건 후자였다. 특히 관세가 제일 문제였는데, 유독 의견을 굽히지 않던 디나이안 측에서 최근 타협안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덕분에 원래 일정보다 지체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두 사절단은 예정대로 나흘 뒤에 귀국할 것이고, 그날 환송 연회가 열린다.

    …그 전까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텐데.

    “맞아요, 눈이 무척 즐거웠는데 말이죠.”

    새처럼 재잘거리는 목소리들이 무척 경쾌했고, 부산스럽지 않았다. 낮이라 방 안은 밝았고 이따금씩 밖에서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라니아는 속으로 한탄했다. 이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심란한 게 나 혼자뿐이라니.

    시녀가 여러 가지 색깔의 천을 끼워 넣으며 머리를 땋았다. 그것을 위로 뭉쳐 올려 철사로 고정한 뒤 진주로 만든 예쁜 핀을 꽂았다. 제라니아가 재빨리 말했다.

    “아, 핀은 하나면 돼요.”

    상전을 한껏 치장할 마음이 가득하던 시녀들이 실망한 얼굴을 했지만, 제라니아는 머리 모양만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너무 무거웠다. 레이스며 보석이며, 머리 장식들이 도대체 몇 개인지.

    “좀 더 화려하게 꾸미고 나가셔야 한다니까요~?”

    “국왕 폐하께서 보내주신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왕비님, 딱 이거 하나만 더 꽂으시면 안 될까요? 진짜 잘 어울리실 텐데!”

    제라니아는 시녀의 손에 들린 핀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라색 천으로 꽃잎을 만들고 가운데에 자수정을 박아놓은 커다란 핀이었다. 간절하게 쳐다보는 시녀의 시선에 그는 싱긋 웃었다.

    “안 돼요.”

    양보 없는 대답이었다.

    “자, 끝났습니다.”

    제라니아의 손을 쥐고 있던 시녀가 조심스레 그것을 놓아주었다. 제라니아가 잠시 의아한 듯 시선을 고개 숙인 시녀의 뒤통수에 두었다.

    “다들 수고했어요. 이만 나가들 봐요.”

    사람들을 내보낸 뒤 제라니아는 제 손에 쥐어져 있는 짧은 쪽지를 확인했다. 내용은 짧았다.

    [네가 곤란하지 않다면,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어. 가급적 빨리. 오늘이어도 괜찮아.]

    익숙한 필체가 그를 반겼다. 누가 썼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

    제라니아는 고민했다. 오늘은 프란츠를 찾아갈 예정이었다. 어제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제라니아는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고민했지만 사실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당신의 다정함을 믿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나를 가엾이 여겨서, 이미 결혼한 사이니까, 그래서 내 곁에 머무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했을 뿐이죠.’

    제가 손대는 걸 거부하는 프란츠를 본 순간, 단순히 제가 사랑한다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동정하는 것으로 보였던 걸까. 장례식이 있었던 그날부터, 쭉?

    말문이 막혀버린 자신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프란츠는 제 손을 놓아주고 밖으로 나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쪽지를 보자마자, 억지로 묻어두었던 고민거리 하나가 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라니아는 고개를 휘휘 저어 몰려드는 망설임을 떨쳐냈다.

    전부 처음 느끼는 감정들이라 그런 걸까, 골머리가 아팠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제라니아는 창문으로 시선을 두었다. 동상이 세워져 있는 넓은 광장이 작은 창 너머로 내려다보였다.

    건물 4층에 자리한 작은 방. 여기는 제라니아가 가진 아지트들 중 하나로, 평소에는 비워뒀지만 축제 때마다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사용했다.

    전에 리암과 같이 오려고 했다가 일이 생겼었지. 제라니아의 입가에 잠시 머물렀던 미소는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스러졌다.

    사람이 왔다 보고하는 비앙카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망토를 두른 덩치 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자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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