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자각 (2)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태연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라 제라니아는 화급히 몸을 옆으로 물렸다.
“아, 그게….”
어쨌거나 해명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말을 하기도 전, 성큼성큼 다가온 프란츠에게 팔을 붙들렸다.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조금은 거친 손길이 제라니아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돌아가죠.”
정말로 화가 난 건지 프란츠는 평소보다도 말이 짧았다. 냉담한 그의 태도에 쉽사리 말을 붙이지 못하고, 앞장서서 걷는 그를 따라 제라니아는 끌려가듯 걷기 시작했다.
“국왕 폐하!”
다급한 외침에 프란츠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선 크리스토퍼가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듯 빨라지는 걸음걸이에 제라니아는 뛰듯이 걸어야 했다.
왕비가 머무는 처소에 도착하니 시종들이 놀란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에 서 있던 시녀들까지도 내쫓은 그가 침대에 제라니아를 앉혔다. 어깨를 꽉 붙든 채 그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더없이 잔잔했지만, 분위기는 다소 위압적이었다.
제라니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연회는 어쩌고 여기로 온 거예요?”
이 와중에도 여전히 그가 무섭지는 않았다. 그게 목소리에서도 느껴졌는지 프란츠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이 상황에서도 그게 걱정됩니까?”
분위기가 살짝 누그러진 게 느껴지자, 제라니아는 재빨리 말했다.
“아무 일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
“왜 그러고 있었냐면….”
제라니아의 머릿속이 밀어닥치는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바쁘게 굴러갔다. 사실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고,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 설명을 위해서는 에반젤린 공녀와 춤을 춘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라니아는 오랜만에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것 같잖아!
“고민이 있어서, 크리스한테 상담을 좀 받고 있었어요.”
고르고 골라 가장 무난한 답부터 내밀었다. 프란츠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면 밀회라도 하는 줄 알겠더군요.”
어두운 밤에 둘이서만 야외에 나와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퍽 친밀해 보였다. 저를 보자마자 하얗게 질리는 제라니아의 얼굴을 본 그는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감정을 다스렸다.
‘내가 방해한 겁니까?’
그 순간 튀어나갈 뻔한 말을 프란츠는 간신히 짓눌렀다. 제라니아는 제 아내였다. 누구보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여인의 정숙함을 의심하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피가 거꾸로 솟는 게 이런 느낌인가.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다분한 말에 제라니아는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프란츠를 노려보았다.
“나는 주신에 맹세코,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당신은 그렇겠죠. 하지만 상대도 과연 같은 의견일까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공녀와 춤을 췄던 건데요.
간신히 입을 다문 제라니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프란츠의 손가락이 상대의 턱을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면, 왜 그자에게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인 겁니까.”
“무슨 표정을….”
말하면서도 뭔지 알 것 같아서 제라니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갈수록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그게 무엇이든, 아마 당신을 떠올리고 있었을 텐데.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 그런 당신을 보여주지 말란 말입니다.”
어깨를 꽈악 움켜쥐는 손길에 제라니아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걸 듣자마자 프란츠는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손을 떼어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그가 곧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이 와중에?
벌떡 일어난 제라니아가 밖으로 나가려는 프란츠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때는 가만히 놓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잠깐만요!”
“이거 놓으십시오. 심한 말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난 괜찮으니까, 가지 마세요.”
“어떻게 괜찮을 수 있습니까!”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버럭 소리치는 남자에 제라니아는 깜짝 놀라 옷을 놓쳤다. 떨어져 나간 손과 제라니아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프란츠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발.”
목에 턱 걸려 있던 진심 하나가 튀어나왔다.
“제라니아, 나는, 당신이 두렵습니다.”
기어코 내뱉은 말에 제라니아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이번에야말로 뒤돌아서서 빠져나가려던 그는 다시금 당겨지는 옷자락에 걸음을 멈췄다. 제라니아의 손이 조금 더 세게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안 돼요.”
맑지만 단단한 녹색 눈이 프란츠를 바라보았다.
“지금 가면 또 날 피할 거잖아요.”
고집을 부려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알았다. 당신은 계속 도망치고 싶어 하니까. 누군가는 상대를 붙들어야 했다. 그래야 끝날 수 있었다.
“당신이 나한테 조심스러운 건 알아요. 하지만, 선을 긋기만 하다가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요.”
“…….”
“우리 그냥, 그냥 솔직해지면 안 될까요. 국왕 폐하. 아니, 프란츠.”
제라니아가 또박또박 말을 읊었다.
“나는 그저, 당신이 뒤에서 이야기를 듣는 게 싫었을 뿐이에요. 정말이에요.”
“…….”
“당신이 사랑받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남들도 당신의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용기를 내어 말하려던 순간 프란츠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제라니아의 눈빛이 일순 멍해졌다.
한참 뒤에야, 광소에 가까운 웃음소리가 겨우 잦아들었다.
“왜, 웃은 거예요?”
프란츠가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했다.
“우습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제 허리를 감싸고 끌어당기는 손에 제라니아는 뻣뻣하게 굳었다. 어느새 바짝 붙어 그의 품에 안긴 자세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반대입니다. 난 가끔, 당신을…. 가둬두고 싶다 생각합니다.”
남자의 손길이 올가미처럼 제 몸을 압박했다. 불꽃을 담은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이 제라니아의 얼굴로 쏟아졌다.
“도대체 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당신을 공유해야 합니까?”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혼자 보고 있기도 아까워 미치겠는데, 남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가끔 당신이 정말로 사랑스럽다 느낄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순간을 박제하고 싶다고.”
그러면 영원히 흘러가지 않을 텐데.
“나 같은 인간조차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겠죠.”
프란츠의 시선이 뱀처럼 느릿하게 제라니아의 턱에서부터 붉은 입술, 발그레한 뺨, 오뚝한 코,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훑었다. 그림자가 얼굴을 덮고 있어 눈빛이 평소보다 둔탁해 보였다.
“나와 같이 생각할 이들이 많은 것이 싫고, 당신을 바라보는 자들의 눈을 전부 뽑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는데…. 문득, 왜 이런 생각을 하나 싶은 겁니다.”
프란츠가 허탈하게 웃었다.
“당신을 밖에 내보이지 않는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제 처소로 향하지 않은 건 실낱같은 이성의 결과였다. 그랬다간 정말 가둬두고 싶다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으리라.
물건이라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왜 당신은 살아 있는 사람인 걸까. 왜, 당신은 내 것이 될 수 없는 걸까.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날것의 욕망을 전시하던 그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실행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은 고작 나 하나의 욕망에 갇혀도 되는 이가 아닙니다.”
아무리 충동이 일어도 절대로 시행하지 않을 일이었다. 제가 꺾으려고 한들 꺾일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제라니아는 지금 이대로가 제일 아름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신은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주체가 설령 자신일지라도.
그러니 겁먹지 말라고. 이런 나를 알고도 내 곁에 있어달라고. 눈빛으로 호소했다.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제라니아는 그러지 않았다. 꼼지락거리며 손을 내민 그가 양팔로 프란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예요?”
“…….”
“난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프란츠. 그렇게 약속했었잖아요.”
약속이라는 말에 프란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의심에는 믿음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날 믿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제라니아는 조곤조곤하게 물었다. 여전히 따스하고 다정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더는 참을 수 없어진 프란츠는 제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떨쳐내며 물러섰다. 온기가 나약하게 떨어져 나갔다.
저 단정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를 마구 휘젓고, 더럽히고 싶었다. 불쑥 치미는 충동이 명치를 세게 두드렸다.
구역질이 난다.
“…당신의 다정함을 믿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울컥 올라오는 본심을 겨우 혀끝으로 밀어냈다.
“나를 가엾이 여겨서.”
차곡차곡 쌓이고 쌓이던 불안이 넘쳐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미 결혼한 사이니까.”
질끈 눈을 감고 싶어지는 마음을 억눌렀다. 표정 없는 얼굴로 마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 곁에 머무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했을 뿐이죠.”
문득 제라니아가 곁에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었던 과거의 자신이 우스워졌다.
몸만이라도 좋다는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처음부터 마음을 바라고 시작한 주제에,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강박적으로 선을 그었다. 남들에게도 공평하게 내주는 다정함은 어떠한 확신도 주지 못했다. 제가 여지를 주는 순간, 제라니아는 언제고 자신의 손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성은 현재를 보는데, 감정은 미래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굳건하던 이성은 제라니아의 앞에서만은 언제나 약해졌다. 둘 사이의 충돌이 시작된 지는 꽤 되었고, 두통이 심해진 것도 그때를 기점으로 했다.
“어떻게, 그런….”
경악이 서린 목소리가 말을 토해냈다.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입을 달싹거리는 제라니아를 본 프란츠는 자못 유쾌해졌다.
독 사과를 베어 무는 기분이 이럴까.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모습이란, 전에도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달콤했다.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조차도 즐길 수 있을 만큼.
다시금 저를 붙잡으려는 듯 뻗어온 손이 제 몸에 닿기 전, 프란츠는 그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렇더라도, 제일 개자식인 건 나겠죠.”
그대로 손목 안쪽을 잘근 깨물자, 선명한 잇자국이 남았다. 마치 표식처럼.
남자는 더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어떤 생각을 하든, 당신을 놓아줄 생각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