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자각 (1)
서늘한 밤공기가 화려한 왕궁을 감싸 안았다. 하얀 반달이 새까만 하늘에 매달려 있고, 그 주변으로 별들이 반짝였다.
홀에 달려 있는 창문 사이사이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샹들리에마다 마력을 연소해 빛을 내는 하얀 수정들이 달려 있었다. 대신전을 제외하고는 왕실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이었다.
넓은 홀에는 예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악사들이 연주하는 고즈넉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렸다. 손을 잡고 가운데로 나아간 이들이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여기 계셔도 괜찮아요? 왕비님. 국왕 폐하랑 같이 계시지 않고.”
엘레나는 쫙 펼친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장난스럽게 물었다.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엘레나의 옆에 서 있던 제라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그렇게 자주 붙어 있었던가?”
“어휴, 자주 안 붙어 있었어도 지금은 붙어 있어야죠. 내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면요.”
엘레나는 힐끗 저 멀리 덩어리진 무리 하나를 노려보았다. 그 중심에 서 있는 프란츠가 사람들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서 떨어져 나왔지만, 제라니아라고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았다. 방금도 제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 하나를 보낸 참이었다.
왕궁에서는 정말 연회가 많이 열렸다. 프란츠가 국왕이 되고 나서는 빈도가 많이 줄었지만,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걸 피력하듯 사절단을 맞이했던 환영식 이후로 벌써 네 번째 연회였다.
“조금 있다 같이 춤추기로 약속했어.”
“그 전까지 즐기겠다 이거 아니에요?”
“국왕 폐하는 그럴 분이 아니라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에요. 사교계를 그렇게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왜 이리 태평하냐고 제라니아의 볼을 꼬집으려던 엘레나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손을 거두었다.
커튼이 반쯤 쳐져 있는 창문가에 선 제라니아가 물끄러미 유리에 맺히는 상을 응시했다. 손가락으로 문지른 듯 흐릿하게 번져 있는 얼굴이 살며시 일그러져 있었다.
“여기서 뭐 하니?”
작게 속삭이는 음성에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부른 칼리아와 코델리아에 이어, 반가운 얼굴이 하나 더 보였다.
“크리스.”
“오랜만에 뵙습니다.”
차분하게 예를 갖추는 그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제라니아는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별로네.”
“별일 아닙니다.”
원래도 무뚝뚝하지만, 지금의 크리스토퍼는 한층 더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새까만 예복을 차려입고, 머리를 넘긴지라 시원한 이마가 한껏 드러났다.
“너 혼자 온 거야? 다른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혼자 처량하게 서 있는 게 가여워서 주워 왔어.”
연둣빛 드레스를 입은 코델리아가 크리스토퍼의 팔에 팔짱을 낀 채로 씩 웃었다. 그는 올가미처럼 저를 붙든 손에서 팔을 빼냈다.
“보는 눈을 생각해.”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기민하게 포착해 낸 크리스토퍼가 조용히 말했다.
“뭐야, 언제부터 그런 걸 걱정했다고?”
코델리아가 거침없이 그의 등을 퍽 소리 나게 내려쳤다. 얼얼한 감각도 잠시, 크리스토퍼는 코델리아의 손에 있던 술잔을 빼앗아 갔다. 코델리아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내놔.”
“직접 가져가보지?”
심드렁하게 대꾸한 크리스토퍼가 급습하는 코델리아의 손을 잽싸게 피했다.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며 제라니아는 참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옆에서 엘레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칼리아가 문득 일어나는 소란에 눈길을 돌렸다가, 멈칫했다.
“어.”
작게 튀어나온 감탄사에 일행은 일제히 칼리아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프란츠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홀 한가운데로 나왔다. 에반젤린 메디나가 무심한 얼굴로 그 옆에서 걸었다. 가운데에 선 그들은 곧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 세상에. 국왕 폐하께서 선택한 건 저 여인인가요.”
“확실히 아름답긴 하나, 의외군요. 올리비아 왕녀를 대하시던 걸 생각하면.”
“분위기가 제법 좋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지 않았어요? 천박한 피가 왕실에 들어오는 건 좀….”
“어허, 증거도 없는 이야기를 함부로 떠드는 거 아닙니다.”
“곧 상전이 되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런 프란츠의 모습을 보고 놀란 건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발꿈치를 들고 있다가 그만 넘어질 뻔한 코델리아를 크리스토퍼가 받아 안았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일행을 돌아보며 코델리아가 작게 소곤거렸다.
“뭐야, 내가 뭘 보고 있는 건데?”
“갑자기 왜….”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내던 칼리아가 재빨리 제라니아를 돌아보았다. 초록색 눈동자가 춤추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멍해 보였다.
“…제라니아?”
제 이름을 들은 그가 눈을 깜빡였다. 여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언니.”
“응?”
“…잊고 있던 게 있었는데, 지금 생각났어. 잠깐 그거 좀 가지러 다녀올게.”
“지금? 잠깐만!”
저를 말리는 음성에도 느릿하게 돌아선 제라니아가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조용히 문을 열고 통로로 나간 뒤 정원으로 발을 내딛자, 새하얀 달빛이 제 몸에 닿아 부서졌다.
밤의 정원은 무척 적막했다. 이따금씩 바람이 꽃이나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미로처럼 뻗어 있는 산책로가 보였다. 장미 덩굴이 얽혀 있는 아치형 입구 옆에 벤치 하나가 마련되어 있었다.
총총 걸어간 제라니아가 그 벤치에 주저앉았다.
“…….”
안 되겠다. 고요해서 그런지 심장 소리가 한층 크게 들렸다. 양손으로 뺨을 감싸며 제라니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아까 본 장면이 뇌리를 맴돌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니, 조금씩 기분이 진정되어 갔다. 벤치를 붙잡은 채로 발을 슬슬 흔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보면 안 될 무언가를 본 것처럼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충동에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는 했지만 정신이 들고 보니 난감해졌다. 그런데도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울이 필요했다. 지금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까는 제대로 웃었겠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른 덕인지 조금 허탈해졌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토라진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
프란츠의 그런 모습을 본 것보다, 그걸 이렇게 받아들이는 자신이 더 충격적이었다.
“제라니아!”
발걸음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바닥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던 제라니아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세 걸음쯤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급하게 쫓아 나온 건지 살짝 거칠어진 숨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크리스토퍼였다.
부리나케 밖으로 나온 크리스토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통로를 걸어간 것 같지는 않았다. 처소로 간 게 아닌가? 가만히 서서 머리를 굴리던 그는 일단 정원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뛰듯이 걷던 그의 걸음은 벤치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한 순간 천천히 느려지다, 완전히 멈췄다.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자 제라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이 마치 구슬처럼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니, 왕비님.”
경칭을 잊어버린 것을 사과하자 제라니아는 괜찮다는 듯 엷게 웃었다.
“그냥 편하게 얘기해.”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까. 생략된 말을 읽어낸 크리스토퍼가 천천히 걸어와 제라니아의 옆에 앉았다. 편안한 침묵이 둘 사이에 놓였다.
어느 쪽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상황에서, 크리스토퍼는 손을 뻗었다. 제 옆머리를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에 제라니아는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걱정 가득한 시선이 제게로 쏟아졌다.
“무슨 생각 해, 너.”
그러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평소라면 편하게 대답했을 질문이 유독 어렵게 느껴졌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제법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니 말문이 막혔다.
프란츠가 남이랑 춤을 추는 걸 보고 있으니까, 왠지 속이 울컥거려. 그런데 이유를 모르겠어.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짧게 얼버무렸다.
“이상한 생각.”
“그러니까, 좀 구체적으로 말해봐.”
“…….”
“고민하지 말고 솔직하게.”
그런데도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다물어 버리는 제라니아를 보며 크리스토퍼가 벤치에 놓여 있는 제라니아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벤치에 등을 기댄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는 제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역시, 아까 국왕 폐하가 그 여자랑 춤추는 걸 봐서 그래?”
“…….”
“맞구나.”
넌 기분이 좋지 않으면 손끝이 차가워지잖아. 가볍게 중얼거리며 그는 손을 슬쩍 거둬들였다. 제라니아는 허를 찔린 듯 입을 달싹거렸다.
“나는 괜찮아.”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크리스토퍼는 못마땅한 듯 잘생긴 눈가를 찌푸렸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나였어도 기분 상했을 텐데.”
“춤 한 곡 추는 것 가지고 그러는 것도 웃기잖아.”
“왜 웃긴다고 생각해?”
웃으며 넘어가려는 제라니아와 달리 크리스토퍼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사랑은 원래 다 그런 거잖아. 자기답지 않은 짓을 하고, 치졸하게 굴거나 별거 아닌 일에도 신경이 쓰이고.”
“…….”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없고.”
새까만 구름이 스멀스멀 움직이며 달을 가렸다. 사방에 내려앉은 어둠이 제 표정을 감춰주겠지. 크리스토퍼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기도 벅찼다.
“그건 당연한 거야. 이상하지 않아.”
침묵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크리스. 국왕 폐하는 내게 단 한 번도 확신을 주지 않으신 적이 없는걸.”
그에게 자신이 특별하다는 걸 제라니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게 늘 좋은 걸 주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래서 자신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니까.
“그러니까, 나는 믿고 기다려야 하잖아. 관계에는 믿음이 수반되어야 하니까.”
별일 아니리라는 걸 머리로는 충분히 알았다. 그런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그분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닌데…. 무언가 속에서 자꾸 덜컹거려.”
마치 흔들리는 통에 들어간 것 같았다. 이리저리 부딪치느라 정신이 없어,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왜?”
“그 사람은 늘 혼자 있으려고 한단 말이야. 외로워 보인다고. 조금이라도 세계가 넓어졌으면 해.”
그는 여전히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국왕 폐하가 나 말고 다른 무언가에 애정을 쏟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진심이야. 왜냐면, 정말….”
내가 사라지면, 그 사람이 정말 혼자가 될 것 같아서.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오래 살고자 한다고 한들 수명은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사라져도 괜찮게, 소중한 것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었다.
제라니아는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모아 쥐었다.
그는 자신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그걸 잘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런 못된 마음이 드는 걸까.
“크리스, 한 가지만 질문해도 돼?”
“…….”
“네가 보기에도,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 같아?”
곧장 들려오는 대답 대신 공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응.”
간결하고 나직한 음성에 제라니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한 순간, 구름이 물러가고 달빛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푸르스름한 밤의 기운을 머금은 얼굴이 창백했다.
그 눈에 비치는 제 얼굴을, 크리스토퍼의 눈빛을 본 순간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이 목을 짓눌렀다.
아, 이게. 사랑에 빠진 얼굴이구나.
남의 이야기를 듣듯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로 훅 다가왔다. 절로 오한이 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프란츠를 이렇게 좋아하게 된 걸까.
“너….”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숨이 막혔다. 가끔씩 그 눈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생각했는데, 프란츠와 비슷했다. 정확히는 프란츠가 크리스토퍼를 닮은 것이리라.
그걸 알아챈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설마, 너…. 나를?
저벅, 흙을 짓밟는 소리에 둘은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제라니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프란츠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