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131화 (132/171)

제131화. 마음 가는 대로 (3)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같은 결론이 나는 것에 프란츠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딴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손은 착착 서류를 결재했다.

협상의 진척이 더딘 건 예상했던 바였다. 차후 10년간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조약이 가볍게 처리될 리는 없었다. 차근차근 범위를 좁혀가고 있으니 기간 내에는 결론이 나겠지만, 너무 길었다.

주체가 자신인 만큼 저 혼자 감당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제라니아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제라니아의 의견을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감정은 아니었다. 선을 깔짝거리는 놈을 그대로 내버려둬야 한다는 게 너무 거슬렸다.

물론 감시는 붙여뒀다. 수상쩍게 군다면 즉시 조치를 취하도록.

그냥 적당히 핑계를 붙여 쫓아내면 끝날 일에 왜 이렇게까지 시간과 인력을 소요해야 하나. 그런 의문이 간간이 차올랐으나 약속을 떠올리고 포기하는 것을 반복했다.

힘주어 도장을 꾹꾹 찍었다. 마치 종이가 꼴 보기 싫은 누군가의 얼굴인 것처럼.

“그러다 찢어지겠습니다.”

책상 앞에 서 있던 이렌스가 차분한 음성으로 고했다. 펴질 생각이 없는 잘생긴 미간이 까만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왕비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왜 그런 걸 묻지.”

“폐하께서 짜증을 내시는 이유야 뻔하지 않습니까.”

어전에서도 미묘하게 어색하던 둘의 분위기를 본 순간, 이렌스는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제롬에게 물어봐도 그 역시 연회 첫날밤 왕비의 처소에서 굳은 얼굴로 나오는 프란츠를 보았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싸우셨군요.”

“…….”

“연회 날부터면…. 역시 사절단과 관련된 일입니까?”

프란츠가 눈을 들어 그를 쏘아보았다. 그만 떠들라는 눈빛에도 책사는 꿋꿋했다.

“치워버리고 싶은 인간이 있는데.”

“지금 왕궁에 머물고 있는 타국 사절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안 됩니다.”

“그래, 왕비도 똑같이 말하더군.”

프란츠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위험한 일을 겪었는데, 왜 괜찮다고만 하는 걸까.”

지금도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 속이 뒤집혔다. 제라니아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화가 난 건가.

“실례지만, 자기소개를 하시는 겁니까?”

이렌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제라니아가 옆에 있었다면 분명 제 말에 찬성표를 던졌으리라. 그가 본 사람 중, 위험에 스스럼없이 몸을 던지는 건 눈앞의 국왕 폐하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내가 자기 때문에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되는 게 싫다더군. 상관없다고 했는데도.”

“그분다운 말씀이군요.”

맥락 없는 대화에도 충실하게 답하는 제 수하를 바라보며 그는 혼잣말을 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욕심을 내주길 바라는 건 과한 바람일까.”

언뜻 듣기엔 한없이 듣기 좋은 그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돌아갔을 친절이라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틀에 박힌 상냥함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는 조금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감정을 원했다. 수도 없이 날뛰는 지금의 제 심경처럼, 한순간만이라도 좋으니 그를 뒤흔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정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나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했으면 좋겠다. 그게 당신에게는 특별함의 증표가 될 테니까.

6년 전, 선대의 장례식 날이 떠올랐다. 저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얼굴을 떠올리면 명치가 쑤시는 것처럼 괴로우면서도 달콤했다.

제라니아의 그런 얼굴을 본 사람이 오로지 자신뿐이리라는 것에.

“그건, 그분께는 정책안을 짜는 것보다 어려운 과제일 텐데요.”

사람에게 쉬이 정을 주면서도 명확하게 선을 긋는 사람. 제라니아는 딱 그런 부류였다. 자신을 절제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격렬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렵군. 어떻게 해야 손에 넣을 수 있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이렌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 인기 없습니다.”

“…….”

더는 묻지 말라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하긴 사랑과 인연이 없는 건 눈앞의 부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이렌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국왕 폐하께서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분이시죠. 자기 선 밖에 있는 모든 것에.”

왕자이던 시절부터 그랬다. 이렌스는 가만히 어린 시절의 그를 회상했다. 빈틈없는 미소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 속내를 쉬이 꿰뚫어 볼 수 없는 자.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얼핏 보기엔 완벽해 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새까만 무언가가 도사리는 눈동자의 이면이 궁금했다.

‘그렇게 가면을 쓰고 지내시면,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기회가 생겨 처음으로 말을 걸었을 때, 그는 멋들어진 미소를 내보였다.

‘꽤나 맹랑하군. 방금 한 말이 왕족 모독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본 건가.’

‘전하께서 그 정도로 저를 신경 쓰실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범하게 말을 꺼내자, 남자의 눈에 약간이나마 흥미가 깃들었다. 당장 목이 달아날 것 같진 않았다.

‘과연, 천재라 이건가. 이렌스 빈즈. 재정부에서 유일하게 쓸모 있다 평가되는 이답군.’

‘과찬이십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저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이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지.’

‘말씀하십시오.’

‘좋은 나라란 무엇이라 생각하나. 그대는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지?’

뜬금없이 나온 질문이었지만, 이렌스는 눈앞의 상대가 자신을 가늠해보고 있다는 직감을 받았다. 잘 보이고 싶다면 어느 정도 둘러대는 것이 맞겠지만, 금방 알아챌 것이 분명했다.

‘솔직한 대답을 원하십니까?’

‘그래.’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는 심호흡을 한 뒤, 또박또박 생각을 입 밖으로 읊었다.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건,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국가입니다. 타인에게 빼앗은 것들로 부강해질 필요가 없는 곳.’

고작 열아홉 살이 된 소년의 입에서 엄청난 말들이 쏟아졌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는 그에게 왕자는 짤막하게 답했다.

‘같은 생각을 하는군.’

그 말을 들은 순간, 이렌스는 그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곁에 있으면서 그의 성격이 예상보다 더 뒤틀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마따나 그의 성격에는 관심 없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주군. 목표하는 것이 같다면 충분히 따를 만한 존재라 여겼다.

“네 눈에 훤히 보이는 사실이라면, 제라니아도 똑같이 생각하겠군.”

그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새파랗게 변한 눈동자에는 질척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다.”

“…….”

“그래서, 하다못해 성군이 되자고 생각했지.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생각했으니까.”

“왕비님을 위해서 말입니까.”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이렌스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송구하오나, 국왕 폐하. 한 가지만 진언해도 되겠습니까.”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하는 그에게 이렌스가 냉큼 말했다.

“나쁘게 듣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저는 타인으로 자기 자신을 채울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고 하실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둘을 지켜봤다. 그동안 이렇다 할 말을 꺼낸 적이 없는 건, 남의 연애 문제만큼 참견해서 득 될 게 없는 일도 없단 생각 때문이었다.

“국왕 폐하의 고민이, 왕비님에게 무조건 모든 걸 맞춘다고 해서 해결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마, 그분께서 그걸 바라리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예쁘고 좋은 것만 내보이려 든다 한들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적당히 한 번 터지지 않으면 조용히 밑에서 곪아갈 게 분명했다. 환부를 짜낼 즈음에는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를 만큼.

답답하다는 듯 토로하는 이렌스에게 프란츠는 조용히 답했다.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지 않나.”

“…….”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자로 굳어 있던 입술이 비틀리고, 눈가가 찌푸려졌다. 난감해 보이는 주군의 얼굴을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대외용 미소나 무표정만을 내보이던 예전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이었다. 인간미가 없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사람 같았다.

“속내를 쉬이 내보이지 않는 것이 귀족의 미덕이라 하나, 때로는 솔직함이 정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말을 꺼냈다면?”

“예?”

제라니아와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하며 프란츠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심각한 어조로 말하는 프란츠와 달리 이렌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고작 그거 가지고 말입니까?”

“고작이라니.”

“고작이죠. 대체 뭐가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우신 겁니까? 해석하면 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신경 써달라, 이거잖습니까. 그 정도 말하는 게 뭐가 문제입니까? 어린애도 양육자가 자기 말고 다른 애한테 관심을 쏟으면 싫어하는데.”

꼬맹이를 쳐다보듯 제법 불경한 시선이 프란츠의 얼굴에 닿았다.

이렌스의 머릿속에 슬슬 그림이 그려졌다. 왕궁 내에 도는 소문을 신경 쓴 왕비가 국왕에게 적당히 하라고 언질했을 모양새가. 그냥 지나가듯 할 수도 있는 말 한마디에 저러고 있는 걸 보니 복장이 터졌다.

“…어렵군.”

프란츠는 조용히 선을 가늠했다. 이 정도까지는 괜찮은 건가. 제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감정을 표출할 때는 늘 신중해졌다. 자신에게는 괜찮아도 제라니아에게는 다를 수 있으니까.

고민스러운 듯 턱을 매만지는 프란츠에게 이렌스는 힘주어 진언했다.

“그분도 폐하께서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속내를 내보이시는 걸 분명 더 좋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연약한 분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눈앞의 국왕 폐하께서는 차마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렌스가 보기에는 제라니아라고 딱히 타인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 자신과 연관된 문제가 아니라면 타인에게 구태여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진짜 속내를 털어놓는 일도 드물었다. 몇 년이 넘게 알고 지낸 제게도 사생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확고히 선을 그었다.

프란츠 본인보다 더 그를 챙기던 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 제라니아는 분명 진심으로 걱정해서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내미는 애정에 목말라 있는 프란츠의 현 상태를 생각하면 꼬아서 들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래, 어느 쪽의 잘못도 아니었다. 둘 사이에 끼어서 등이 터지는 가엾은 사람들이 문제지. 예를 들면 저라든가.

가엾은 책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제발 솔직히 좀 털어놓고 얘기 좀 하십시오. 도대체 언제까지 저희 피만 말리실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대신, 이렌스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가며 할 말을 정리했다.

“솔직하게 말해, 아이라 전하가 국왕 폐하보다 더 할 말 다 하고 사실 겁니다.”

그의 제어를 벗어난 입이 제멋대로 나불거렸다.

“투기를 바라시는 거라면 좀 밀어 보시든가요. 폐하한테 호감 있는 여성분이 상당하지 않습니까? 적당하게만 좋은 분위기를 연출해 보시는 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요, 제가 실언했습니다.”

서늘해진 눈빛에 그는 재빨리 말을 수습했다. 왕자이던 시절부터 여자 문제에는 일말의 여지도 두지 않더니,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한 듯했다.

무심해 보이면서도 자기 고집이 분명한 점은 왕비와 똑같았다. 세간은 둘의 성격이 천지 차이라고 하는데, 모르는 소리. 보면 볼수록 진짜 천생연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쌍의 시선이 굳게 닫혀 있는 문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만, 국왕 폐하. 에반젤린 메디나 공녀께서 만남을 요청하셨습니다.”

“…공녀가?”

예상치 못한 이름에 프란츠는 가만히 눈을 껌뻑거렸다. 들여보내라는 말과 함께 그는 접견실로 이동했다. 안으로 들어온 에반젤린이 정중하게 예를 갖춘 뒤 프란츠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한 가지 청을 드리려고 왔어요.”

또렷한 눈동자가 거울처럼 프란츠의 얼굴을 비추었다. 에반젤린이 입을 열었다.

“저랑 결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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