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마음 가는 대로 (2)
메리의 볼을 따라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야.”
흐려지는 시야에 메리는 허둥지둥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지만 멈추지 않았다.
“사실 나도 반가웠어. 반가운데, 화가 나서….”
처음에 마주했을 때는 놀랐고, 그다음에는 원망스러웠다. 원망을 비워내니 그 바닥에 남아 있는 건 그리움이었다.
‘메리,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잊지 마.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야.’
헤어지기 전 제나는 그렇게 말했고, 자신은 그 말을 제법 오래 기억했다. 힘들 때마다 자신에게 속삭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독립하기 위해 일을 배웠고, 아카데미에 들어간 건 1년 전이었다. 낮에는 일을 해야 했기에 저녁에나 공부할 시간이 있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급기야는 엉엉 울기 시작하는 메리를 끌어안으며 제라니아는 가만히 등을 토닥거렸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야.”
내가 왜 죽냐고 장난스레 대꾸하자, 제가 아파서 사라진 줄 알았다고 훌쩍이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상상력이 풍부한 건 여전하구나.
어깨를 감싼 천이 눈물로 젖어갔지만, 그걸 지적하는 대신 손을 뻗어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어렸을 때 해주던 것처럼 상냥하게.
울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메리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눈가와 코끝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제라니아가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남아 있는 얼굴을 닦아주었다.
“여기에는 왜 온 거니?”
“최근 이쪽 일을 돕고 있어서. 식사도 주는 곳은 흔하지 않으니까. 좀 힘들지만 괜찮아.”
“고아원을 나온 거야?”
“아니, 하지만 1년 뒤에는 나와야 하는걸.”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고 중얼거리는 메리의 손을 꼭 붙들어 주었다. 예전에는 손바닥 안에 쏙 들어왔는데, 어느새 마주 잡을 수 있을 만큼 커져 있었다.
7년이란 세월이 새삼 길긴 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저기, 제나.”
“응?”
“왜 나한테 화를 내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냐고 웃고 넘기기엔 메리의 표정이 무척 진지했다.
“제나는 아주 높은 사람이잖아. 내가 이렇게 굴어도 괜찮은 거야?”
방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메리는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밖에서는 그러면 안 되지만, 여기는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아.”
여길 나가면 메리가 아는 ‘제나’가 아닌, ‘제라니아’의 모습이 된다. 메리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 부분은 분명히 해야 했다. 왕족과 평민의 차이는 그토록 까마득했다.
우스웠다. 둘 다 자신인데도 그 경계를 나눠야 한다는 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메리를 바라보며 제라니아는 덧붙였다.
“하지만 메리, 너랑 나는 다르지 않아.”
분명 신분이 모든 걸 가로막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올 거야.
장담할 수 없는 말을 삼켜내며 미소를 지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메리의 손을 놓아주었다.
“제대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말할게.”
“…….”
“내 진짜 이름은 제라니아. 제라니아 바이첸이야.”
결혼한 뒤의 성은 7년이 지난 지금도 익숙하지 않았다. 20년을 넘게 이 이름으로 살아왔으니 당연한가.
멍하게 말을 듣고 있던 메리는 곱씹듯이 방금 들은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나름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메리가 슬쩍 말을 꺼냈다.
“저기, 아까 그 애들은….”
“내 아이들이야. 귀엽지?”
메리가 불퉁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더 귀여웠어.”
이상한 경쟁 심리를 불태우는 소녀를 보며 제라니아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저기에 좀 멈춰줄래요?”
마차가 제법 외진 길에 멈춰 섰다. 문을 열고 내리며 제라니아는 기사들에게 아이들을 잘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잿빛 망토에 후드를 뒤집어쓴 상태로 기사 중 한 명을 바라보았다.
“비앙카 경만 따라와요.”
레몬빛 머리칼의 기사가 타고 있던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서점에 가보려고요.”
좁은 골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골목을 지나면 바로 커다란 서점이 나온다. 비앙카가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저쪽 대로에서 내리시지 않고요.”
“그건 너무 눈에 띄잖아요. 책만 사러 가는데요, 뭐.”
도란도란 대화를 주고받으며 앞장서는 비앙카를 따라, 제라니아는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가지가 뻗은 듯 양옆으로 군데군데 갈림길이 즐비했다.
출구에 거의 다 왔을 즈음, 기사는 갑자기 멈춰 서며 제라니아의 앞을 가리듯 손을 뻗었다.
“왜 그래요?”
“발소리가 들리는데, 수가 꽤 됩니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후드를 푹 눌러쓴 누군가가 비앙카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누가 봐도 쫓기는 것처럼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얼결에 상대를 막아서게 된 비앙카에게 그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외쳤다.
“비켜!”
후드 아래로 새까만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삐져나와 있었다. 입가만 살짝 드러났지만, 톤이 높은 걸 보아 여자인 것 같았다. 뒤에 제라니아가 있는 만큼 비앙카는 일단 여자를 단단히 붙잡았다.
“어떻게 할까요?”
골목 밖에서 우르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초조한지 입술을 짓씹으며 발버둥을 쳤다.
“이쪽으로.”
비앙카에게 눈짓한 제라니아가 뒤돌아서 옆에 보이는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비앙카는 곧장 여인의 입을 틀어막은 다음 그를 질질 끌고 그 뒤를 따랐다.
비앙카가 골목으로 들어오자마자 소속을 알 수 없는 무장한 병사들이 골목 밖을 스쳐 지나갔다.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후에야 제라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 것 같네요.”
비앙카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여인은 그를 홱 밀치고 뒤로 물러났다. 하도 발버둥을 쳐서 그런지 후드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어두운 골목 안이기는 했지만 얼굴을 아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제라니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갈색 피부에 새까만 머리카락,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만큼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얼굴.
에반젤린 메디나.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 * *
골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기에 우선 제라니아는 그를 데리고 마차로 왔다.
방금 전, 경계 가득한 시선으로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에반젤린은 제라니아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놀라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일정 거리를 두고 그들을 바라보는 에반젤린에게 제라니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은 일단 넘겼지만, 여기 계속 있으면 들킬 거예요.’
그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여인은 다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순순히 제라니아를 따라왔다. 지친 듯한 발걸음에서는 옅은 체념이 묻어났다. 입가만 내놓은 채 마차에 올라타는 여인을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일단 왕궁으로 돌아온 뒤, 아이들을 시녀들에게 맡긴 다음 제라니아는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앉아 있던 에반젤린이 입을 열었다.
“무슨 속셈이에요?”
“쫓기고 있는 것 같던데요.”
동문서답이었지만, 여인의 입을 막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도망치는 것 같던데, 내 착각은 아니죠?”
“…….”
말발굽 소리만이 침묵을 갈랐다.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여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수중에 돈은 있나요?”
“네?”
“도망치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양, 에반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얼결에 대답했다.
“…마테라 열 닢이요.”
금화로 열 닢. 심지어 왕국 통화인 세타화도 아니다.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살짝 걷어낸 제라니아의 손가락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골목을 가리켰다.
“여기서 나가서 딱 세 블록만 걸어가면 환전상들이 모여 있는 길가가 나와요. 돈은 거기 가서 환전하면 돼요.”
거기까지 말했다가 제라니아는 아차 했다. 상인들은 대체로 교활했고 말재간이 좋았다. 젊은 여자 혼자 갔다가는 덤터기를 쓰기 쉬웠다.
“혹시 불안하다면, 따로 돈을 마련해 줄까요?”
제법 진지하게 묻자, 에반젤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를 도와주려는 건가요?”
“그래요.”
“왜죠?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의심이 가득한 시선에도 제라니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요.”
왕궁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인은 줄곧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해 보였다.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듯이.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데도, 쏟아지는 관심에도 무료해 보이는 얼굴에 눈길이 갔다. 제 언니인 칼리아가 꼭 저런 표정을 했었으므로.
“하지만 절 도와줬다는 게 공국에 알려지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텐데요.”
제라니아는 나직하게 웃었다.
“이 정도로 걱정할 필요 없어요. 변명거리는 차고 넘친답니다.”
자신이나 왕국의 입장을 생각하면 직접적으로 제 힘을 동원해 도와주기는 어렵더라도, 자금을 마련해 주거나 수도 밖으로 나가는 샛길을 알려주는 정도는 가능했다.
애초에 에반젤린은 지금 이 시간에 저잣거리에 있어서는 안 됐다.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미 정해진 일정이 있지 않던가.
변명거리가 차고 넘친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정황이 있다 한들, 그들이 쉽게 자신에게 이 문제를 따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걸 따지자면 일단 왜 에반젤린이 저잣거리에 있었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당장 공국의 병사들이 행적을 신고하지 않고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것만 지적해도, 충분히 외교적인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겠냐는 듯 눈짓으로 묻자, 에반젤린은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은 아니에요.”
“네?”
“…팔려 갈 생각이 없었을 뿐이죠.”
적나라한 단어가 그의 입술에서 튀어나왔다.
“국왕 폐하께서는 혼담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세요.”
에반젤린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이대로 공국으로 돌아가면 다른 곳으로 팔려 갈 텐데.”
공국 내에서는 쉽사리 도망칠 수 없었고, 외국으로 나올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고 도망치고자 시도했었으니까.
그런 제 행동에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란 작자에 에반젤린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집착의 근원이 제 어머니라는 걸 알았기에 더 진절머리가 났다.
제가 아까 그 여자만큼 강했더라면 도주가 좀 더 수월했을 텐데.
“그럼, 도망치고 나서는 어떻게 할 건데요?”
“어떻게든 되겠죠.”
어머니와 단둘이서 지낼 때도 입에 풀칠을 못 하고 살진 않았다. 적어도 갑자기 공작의 자식이라고 불려 와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화려한 삶에 자신을 구겨 넣어야 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여인을 제라니아는 기가 막힌 듯이 바라보았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에반젤린이 선수를 쳤다.
“이것저것 재다가는 시간만 흘러갈 뿐이에요. 기회가 보인다면 어떻게든 잡으려고 아등바등해야지. 나머지는 그다음에 생각해도 된다고 그랬어요.”
“…누가요?”
“내 어머니가요.”
천연덕스럽게 답하는 여인의 눈빛에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그 순간이었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화가 난 듯한 비앙카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실례지만, 잠시 마차 안을 확인해볼 수 있겠습니까.”
정중하게 요청하는 남자의 음성에 제라니아와 에반젤린은 시선을 교환했다. 적막이 감도는 마차 안에서, 일단 둘러대기 위해 입을 열려는 제라니아의 팔목을 에반젤린이 붙잡았다.
제법 억센 손길이었다. 굳은살이 꽤 많이 박여 있다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말리기도 전에 에반젤린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비앙카는 물론, 공국에서 온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얼굴에 꽂혔다. 제법 많은 수의 기사들이 마차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기사들의 얼굴은 침착했지만 절박함이 묻어났다. 에반젤린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안심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묘했다.
외교적인 마찰을 감수하고라도 찾아야 할 만큼 이 여인이 중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취급이 박했다. 보호라기보다는 감시에 가까운, 사람보다는 물건을 대하는 것 같았다.
문득, 여인이 말한 ‘팔려 갈 생각이 없었다’라는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가슴이 갑갑했다.
“산책을 좀 나왔을 뿐인데 요란하네, 다들.”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내며 에반젤린은 제라니아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비님.”
그러니 이만 돌아가요.
가볍게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은 잘 만든 가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