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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29화 (130/171)

제129화. 마음 가는 대로 (1)

작고 네모난 창문 너머로 푸른 하늘과, 다닥다닥 붙은 골목들이 보인다. 흔들리는 마차에 앉아 제라니아는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그날 이후, 프란츠는 다시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무언가 달라졌다. 떨어져 있을 때도 같이 있을 때도 미묘하게 선이 그어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신은 내가, 정말 다른 사람한테 친절하게 굴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날 왜 그런 말을 한 거냐고 묻고 싶어도, 그는 자신과 단둘이 있는 상황을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다 같이 있게 돼도 보통 아이들이 함께하는 만큼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건넨 말이 왜 이렇게 돌아온 걸까. 서운해하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보고자 프란츠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걸 상상해보다 포기했다. 그의 말마따나, 그렇게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협상의 진척이 더뎠다. 세 국가 다 본인들에게 유리할 법한 조건을 얻어내고자 치열하게 맞섰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아직까지도 고함이 터져 나오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로 격렬했다.

2주가 그리 긴 시간은 아닌데 유독 길게 느껴졌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를 쓰면서도, 빨리 협상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러면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도 사라지지 않을까.

“어머니, 무슨 생각 하세요?”

부풀어 오르던 생각이 바늘로 찌른 듯 한순간에 톡 터졌다. 현실로 돌아온 제라니아가 제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똘망똘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라에게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답했다.

“국왕 폐하를 생각하고 있었단다.”

아이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이라의 발이 허공을 동동 굴렀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싸우신 거예요?”

“응?”

“아버지 표정이 되게 무서워요. 눈이 이-렇게 올라가 있어요.”

아이라가 검지로 양쪽의 눈매를 쭉 밀어 올렸다. 제니스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반박했다.

“아니야, 아버지는 아파서 그런 거랬어.”

“…뭐?”

흘려 넘길 수 없는 발언에 제라니아는 제니스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갑자기 자신에게 쏟아지는 어머니의 시선에 제니스는 히끅, 딸꾹질을 했다.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니?”

“히, 힐데요.”

작은 입술에서 어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머리가 아프시다고 그랬는데, 힐데도 이유를 모르겠대요. 아주아주 힘든 일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그랬어요.”

아, 맞다. 어머니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힐데의 당부를 떠올리고 제니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제라니아는 머리를 굴렸다. 힘든 일이 대체 뭘까.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엔 아이가 옮긴 말이니 아마 돌려 말했겠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숨기지?

문득 조금 억울해졌다. 아이들도 아는 걸 혼자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서운함이 똬리를 틀었다.

왜 하필 지금 다퉜을까. 곧장 따지러 가지도 못하게.

“도착했습니다.”

그때, 우렁찬 마부의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쇠창살로 만들어진 대문 안쪽으로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구호소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우르르 쏟아졌다. 곧장 고개를 숙이면서도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듯 힐끔거리는 이들에게 제라니아는 눈짓으로 화답했다. 양손은 아이들이 붙잡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원장의 안내를 받아 건물을 빙 돌았다. 이곳은 크게 배식을 하는 곳과 잠자리, 아픈 이들을 수용하는 장소로 나뉘었다. 그 모든 장소를 가급적 꼼꼼히 살피고자 노력했다.

다만 환자들이 있는 장소만은 정서상 좋지 않으리라 생각해 아이들을 두고 가려 했으나, 제니스와 달리 아이라는 수긍한 척하다가 슬쩍 뛰어와 제라니아의 다리를 붙잡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은 방 안에는 다친 사람들이 나란히 열을 맞춰 누워 있었다. 그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간호원들과 신관들이 보였다. 그들은 환부를 닦아주거나 상처를 감싸고 있던 천을 갈아주는 등, 바지런히 움직였다.

밀폐된 공간이 아닌데도 약초 냄새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지독했다.

제라니아는 재빨리 아이라를 안아 들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바닥에 누워 끙끙 앓고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이라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사람들은 왜 저기에 누워 있는 거예요?”

“많이 아파서 그래.”

“어떻게 하면 안 아픈데요?”

천진난만하게 묻는 아이에게 제라니아는 잠시 침묵했다 입을 열었다.

“…완전히 낫는 사람도 있지만, 계속 아플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단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견뎌내는 거지.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야.”

역시 세 살배기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말이었는지, 아이라는 잘 모르겠다는 듯 불만스레 입을 삐죽였다.

건물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새침하게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있는 제니스를 내버려둔 채, 아이라는 제법 의욕적으로 주변을 쏘다녔다.

“자자, 숙녀는 얌전해야 하는 거예요. 공주님~.”

“그럼 나는 숙녀 안 할래!”

입을 삐죽 내밀고 비앙카를 피해 다니는 아이라를 보며 제라니아는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누굴 닮은 건지.

건네받은 장부를 원장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설비, 위생, 음식 등등. 살펴볼 건 다 확인했으니 슬슬 돌아가도 되겠지.

“그럼, 다음에….”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천천히 옆을 돌아보자, 열대여섯 살로 보이는 소녀가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가죽 주머니와 책 한 권, 그 외 소지품들이 소녀의 발치에 흩어져 있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아래로 내려 묶고, 뺨에 주근깨가 박혀 있는 귀여운 얼굴. 어린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메리…?”

소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고목을 닮은 눈동자가 제라니아의 차림새를 훑어보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어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뭐 하는 거냐!”

“그만둬요.”

호통을 치는 원장을 제라니아가 손짓으로 저지했다.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는 메리의 앞으로 다가갔다. 허리를 숙인 그가 주머니에서 나온 메리의 소지품들을 주워 담았다. 내밀어진 가방에도 메리는 우뚝 멈춰 있기만 했다.

“…많이 컸구나.”

예전처럼 손을 내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달라진 입장을 상기하니 입맛이 썼다. 가만히 속삭였다.

“잠시 시간을 내줄래?”

원장실 옆에 있는 손님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제니스와 아이라는 기사들에게 맡겨두었다. 둘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지만 선선히 비앙카를 따라갔다.

“앉을래?”

소파를 가리켰지만 메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소녀를 보며 제라니아는 난감해졌다.

내가 억지로 끌고 온 걸까?

“내가 너를 모른 척하는 게 나았니?”

소녀는 물끄러미 제 기억보다 한층 작아진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는 그렇게 커 보였는데, 지금은 자신보다도 살짝 작았다.

장식 없이 밋밋하지만 비싼 천으로 만든 게 분명한 옷과 굽신거리지 못해 안달이 난 원장의 태도, 지나가듯 들은 오늘 왕실에서 누가 온다는 말.

“제나는 높은 사람이었구나.”

여린 음성이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말문이 막혔는지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굳어 있는 제라니아에게 메리는 독이 오른 눈빛을 했다.

“그래서 더는 오지 못한다고 한 거야?”

어린 시절의 말투였다. 까마득한 신분의 차이를 알면서도 무례를 서슴지 않는 메리를 제라니아는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메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오기로 가득 찬 갈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계속 생각했어. 왜 더 이상 고아원에 오지 못한다고 한 건지. 어째서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건지.”

몇 년간 꾸준히 방문해 아낌없는 애정을 주었던 사람이다. 낯을 가리는 친구들조차 금방 마음을 열었을 만큼.

그러던 제나가 갑자기 오지 못한다며 작별을 고할 때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 다시는 오지 못하는 거냐고,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는 곤란한 듯 미소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원장 선생님은 궁금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자라나는 생각까지 막지는 못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사를 가나? 공녀님이 더는 우리를 후원하지 않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라면, 혹시 어디가 아픈 걸까? 그래서 말없이 떠나간 걸까. 그런 생각이 덜컥 들 때는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떨 땐 그런 생각이 들었어. 우리한테 질렸기 때문에 이제 그만 오는 건 아닌가 하고.”

“아니야.”

재빨리 반박하자 바로 날 선 시선이 돌아왔다.

“그러면 왜 신분을 숨겼어?”

“…….”

“왜 다정하게 대해줬어? 그렇게 가버릴 거면 처음부터 매정하지. 정을 주게 하지 말지!”

악을 쓰듯 말하는 메리의 눈가가 붉어졌다.

7년이나 지났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토록 고아원에 자주 방문했던 사람은 없었으니까.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지 얼굴은 약간 달라졌지만, 표정이나 눈빛은 여전했다.

봄바람을 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따스하고 다정하며, 제가 무슨 말을 해도 화를 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예전에도 제나가 화를 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조곤조곤 타이르는 음성은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지금과 기억 속의 얼굴이 일치한다고 느낀 순간, 메리의 목소리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는 건데.”

속에 든 말을 다 쏟아낸 다음에야 두려운 것처럼 제 눈치를 살피는 소녀에게 제라니아는 조용히 말했다.

“그림책은….”

“…….”

“여전히 좋아하니?”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목소리는 경쾌했다. 멍해진 얼굴을 목도하는 눈초리가 곱게 휘어졌다.

“아까 떨어뜨린 책을 알아. 나도 그 작가 좋아하거든.”

글씨가 빼곡한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됐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제라니아는 기이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조용하고 평범한 삶과는 이별하기로 했으니 그에 후회는 없다. 선택에는 늘 대가가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걸 곧이곧대로 입에 올려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늘 마음에 걸렸다.

나는 과연 신중한 판단을 한 걸까. 내 이전의 삶을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네가 그렇게 느꼈을 만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상대를 설득하고자 하는 것조차 제 아집일 테니.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신분을 숨겼지만, 들키는 순간 어떻게 될지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그 또한 제가 감당해야 할 결과겠지.

세심하게 말을 골랐다. 원망을 듣는 건 그렇다 쳐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가끔 너를 떠올렸어.”

“…….”

“너도, 다른 아이들도.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알아보지는 못했지.”

먼저 손을 놓은 건 자신이니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뭣보다 불공평했다. 자신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고아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데, 아이들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귀족으로서의 자신을 내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제나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외부에서 활동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 그래서 너희를 떠나기로 한 거야. 욕심을 부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제가 다니던 고아원들에 슬쩍 아카데미 관련 통지를 보내두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프란츠와의 계약서에 서명할 때, 거창한 꿈을 꾸자고 생각했다. 기회가 생겼으니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자고. 그러면 꿈이 좌절되더라도, 그 편린이 커다랗게 남을 테니까.

조금이나마 이 불합리한 경계를 허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데도…. 너를 다시 만난 게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널 붙잡고 말았네. 미안해. 네가 바란다면 다시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제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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