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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28화 (129/171)

제128화. 역설의 미학 (5)

칼리아는 기가 찬 웃음을 뱉었다.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는 건데?”

그냥 결혼이 하기 싫은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건가. 말했다간 무슨 소리가 날아올지 몰라 꾹 참았으나, 불행히도 그의 형제는 눈치가 빨랐다.

“그게 아니라면…. 너 설마, 독신으로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서라. 재산을 물려받는 순간 표적이 될걸.”

설령 무남독녀로 영지를 상속받았다 한들, 영지를 노리고 납치혼을 감행하는 남자들이 수도 없었다. 결혼은 여성이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에게서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프레드릭의 음성이 더없이 냉정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국왕 폐하께 인사는?”

“아까 다녀왔어. 분위기 장난 아니던데. 당분간 좀 시끄럽겠더군.”

프레드릭은 국왕의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올리비아에 이어, 실내에 모여 있는 어느 무리로 눈길을 돌렸다. 그 중심에는 리하르타넨 공국에서 보낸 공녀, 에반젤린 메디나가 서 있었다.

그는 갈색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 고집스레 다물린 입매가 돋보이는 미인이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에넹1)으로 눌러쓰고,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짙은 속눈썹이 여인의 눈꺼풀을 따라 흔들렸다.

“미인이 있는 장소에는 파란이 일기 마련이지.”

프레드릭이 가볍게 눈을 찡긋거렸다. 외모가 외모인지라 그럴듯해 보이기는 했지만, 혈육의 잘난 척이란 외양을 불문하고 재수 없기 마련이다. 속으로 구역질을 하던 칼리아는 불길함에 되물었다.

“설마, 손대려는 건 아니지?”

“나도 상대는 가린단다, 동생아.”

“상대가 있으면 안 되는 거라고. 애들이 제발 네가 아니라 파멜라를 닮아야 할 텐데.”

악담 아닌 악담을 퍼붓는 칼리아를 보면서도 그의 입가에는 느긋한 미소가 머물렀다.

“그냥, 국왕 폐하께서 어려운 길을 간다 싶어서 말이야. 미인을 안겨 주겠다는데 저렇게까지 거절하다니, 사내로서 배포가 너무 작은 거 아닌가?”

“제라니아의 남편이야.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

“그 이전에 일국의 국왕이지. 나는 일반적인 상황을 말한 거라고.”

하하, 가볍게 웃음을 흘리는 입술과 달리 고동색 눈동자엔 웃음기가 없었다. 정치인의 얼굴을 한 남자가 손가락을 세워 빙빙 흔들었다.

“물론, 격이 낮은 결혼을 감수하겠다고 하는 것부터 둘 다 동태가 수상하긴 해. 하지만 지나치게 대응해 봐야 저쪽이 동정을 사기 마련이란 말이지.”

프레드릭이 무감한 얼굴로 올리비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연약한 사슴을 떠올리게 하는 미인이 발개진 눈가로 애써 미소 짓는 모양새가 가련하다 해줄 만했다.

건조한 얼굴을 한 남자와 그 앞에서 눈물짓는 여자라. 호사가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아주 좋은 구도였다.

선대의 방관 아래 왕궁에서 벌어졌던 개싸움이 재현되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응이 과했다. 적당히 상대하다가 협상이 끝난 뒤 돌려보내면 그만인 일에 왜 저렇게까지 반응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래?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은데.”

의외라는 양 프레드릭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칼리아는 덤덤히 읊었다.

“너는 지나치게 계산적이야.”

“넌 보기보다 감성적이고.”

칼리아에게로 손을 뻗은 프레드릭이 그의 어깨 위를 가볍게 털어주었다. 일견 다정해 보이는 얼굴로 남자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벽 위의 꽃.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

“널 지칭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참 재미있어. 안 그래? 나의 사랑스런 누이.”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리던 칼리아가 그의 손을 단호하게 쳐냈다.

“적어도 너한테서 듣고 싶지는 않은 말인데. 고지식하고 온화한, 귀족다운 품위를 갖추신 공작님.”

세간에서 그를 칭하는 말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도 프레드릭의 낯짝은 두꺼웠다. 겉으로나마 하하 호호 웃으며 말을 주고받던 둘의 귓가에 소란스러움이 번졌다. 그대로 야외를 내다보았다.

“오, 돌아왔네.”

국왕에게로 걸어가는 제라니아를 본 프레드릭이 살며시 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국왕 부처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려던 그가 슬쩍 칼리아를 돌아보았다.

“아무튼 잘 생각해 보도록 해.”

칼리아는 대답 없이 그를 보냈다.

“아까, 올리비아 왕녀랑 무슨 일 있었어요?”

처소로 돌아온 뒤, 제라니아는 편안한 차림으로 환복하고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에 발을 담갔다. 오래 서 있어서 그런지 유독 다리와 발이 아팠다. 평소보다 긴장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의자에 걸터앉아 풀어 내린 제라니아의 머리칼에 시선을 두던 프란츠가 답했다.

“몇 마디 했을 뿐입니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그 모든 상황을 간략히 축약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라니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되물었다.

“정말 그것뿐이에요?”

“다른 게 있겠습니까.”

좀 더 캐물었지만 프란츠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자세히 설명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 얼굴을 보니 결심이 섰다.

“국왕 폐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뭡니까.”

“…너무 날을 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답이 없는 상대에게 제라니아는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잘해주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나라고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고요. 하지만 2주 내내 이럴 수는 없다고 봐요. 오늘 있었던 일만 봐도, 사람들이 어떻게 또 말을 지어낼지 모른다고요.”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그게 상관없는 일이에요.”

살짝 화가 난 듯한 음성에도 프란츠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제라니아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그가 대야에 손을 넣어 발을 꽉 움켜쥐었다.

“윽!”

“물집이 잡혔군요.”

앓는 소리를 내는 제라니아의 발을 그는 조심히 주물렀다. 제 앞에서 사부작거리는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제라니아는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슬쩍 발을 빼내려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이 나라의 태양이신 분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무엇을 하든 그건 내 마음입니다.”

“아니, 그래도….”

“나는 내 의무를 다했고, 지금은 사적인 시간입니다.”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에 제라니아는 포기하고 얌전히 프란츠의 손길에 제 발을 맡겼다.

가끔 믿기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시종에게나 시킬 일을 자처하는 이 남자가 왕좌에 앉아 오만한 얼굴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이와 동일인물이라니.

피로가 풀리고 있어서인지 금방 노곤해졌다. 긴장이 풀린 걸 눈치챈 걸까, 프란츠가 지나가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요?”

“아까 어디에 들렀다 왔습니까?”

저도 모르게 대답하려던 순간, 제라니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동자를 되록 굴리자 어느새 고개를 들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에 확신했다. 어쩌다 떠오른 게 아니다. 그가 이걸 묻기 위해 최적의 순간을 기다렸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왔다면, 문이 있는 쪽에서 왔어야 맞는데 아주 다른 방향에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게….”

잠시 망설였던 제라니아는 빤한 시선에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최대한 순화해서 이야기를 했는데도 무표정하던 얼굴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무슨…. 생각 해요?”

“그 인간들을 당장 추방하라 하겠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프란츠의 팔을 제라니아는 다급히 붙잡고 내리눌렀다.

벌떡 일어난 탓에 발치에서 물이 참방 튀었다.

“잠깐, 잠깐만요.”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그냥 넘어가자는 소리라면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니까요.”

“그렇다고 당신이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이 사라집니까?”

“시기가 좋지 않아요. 상황이 애매하게 끝났기도 하고요. 이 상황에서 그렇게 반응하면 당신이 욕을 들어먹게 될 거라는 거, 알잖아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제라니아는 살며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통했나?

천으로 제 손의 물기를 닦은 뒤, 프란츠는 아주 느릿하게 제라니아의 손을 제 몸에서 떼어냈다.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도통 들어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라니아는 재빨리 타협안을 제시했다.

“사절단이 돌아갈 때까지, 단둘이 있을 일 없게 할게요.”

“이번이라고 당신 의사가 들어간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오늘은 혼자 다녀서 그렇게 된 거라고요.”

“한 번 성공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하겠습니까?”

팽팽하게 맞서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씩 커져갔다. 제라니아는 그의 옷자락을 와락 움켜잡았다.

“프란츠, 제발.”

“…….”

“나는 당신이 나 때문에,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을 듣는 걸 원하지 않아요. 당신은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내가 이러는 건, 그만큼 당신이 내게 소중해서 그런 거라고.

그런데 프란츠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매끈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왜 저런 표정이지? 기이한 반응에 제라니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 날 위해서입니까.”

감정이 희박한 만큼, 그는 다채로운 표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표정을 찾기 힘들었다. 눈을 제외한다면.

표정보다는 말이, 말보다는 눈빛이.

그렇기에 제라니아는 프란츠와 대화할 때는 언제나 시선을 마주하고자 했다. 눈은 언제나 진실을 말하니까.

보석을 콕 박아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일렁이는 두 개의 눈동자는 이상하게도 슬퍼 보였다.

“당신은, 내가.”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가, 정말 다른 사람한테 친절하게 굴었으면 좋겠습니까?”

“…네?”

“입장이 반대였다면, 아마도 나는 절대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우니까. 달싹이던 입이 끝내 단어를 더 뱉어내지 못하고 다물렸다. 어안이 벙벙한지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제라니아를 본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피곤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만 끝냈으면 하는데요.”

“프란츠, 저기.”

“조치를 취하는 건 뒤로 미루겠습니다. 아니, 그냥. 오늘 대화는 없었던 걸로 하지요.”

제멋대로 말을 던져놓은 뒤 프란츠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제라니아가 맥이 빠진 얼굴을 했다.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도로 침대에 주저앉은 제라니아의 발치에서, 미지근한 물이 심란한 마음을 대변하듯 찰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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